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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Jul 05. 2024

질투하는 모세와 나

(출19~40)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명령을 받으려 할 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또한 말을 잘하지도 못한다며 한사코 다른 적임자에게 당신의 일을 넘겨주길 요청했다. 그러자 그의 역할을 대신할 모세의 형 아론이 나타나 그의 짐을 덜어주었다. 그 소심하던 모세는 장차 민족을 이끌고 법을 짓고 그 모든 이야기를 기록하기에 이른다. 왜 하필 모세였을까.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순수와 연민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어릴 적 생활통지표에 적힌, 말을 조리 있게 잘한다는 평가에 무색하게 나는 별안간 말을 못 하게 된 적이 있다. 신나서 잘하기만 하다 보면 반드시 크게 넘어진다. 나는 크기를 알 수 없는 말실수를 계기로 입을 한동안 열 수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말을 대신할 언어, 그 무엇이 없었고 아론 같은 형도 없었다. 언어가 되었어야 할 그 무엇이 벌레처럼 내 속을 파먹기 시작했다.



어제와 비슷하게 자고 일어났다. 여전히 깊이 잠드는 법은 없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잊어버렸다. 그냥 웃는다. 계절처럼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자질구레한 것들도 화농처럼 모여들었다가 시퍼런 줄기들로 흩어지는 모양이다. 별수 없이 여름이란 잠들 틈도 없이 우거지는 몸이로구나. 가을에야 비로소 낙엽처럼 조금씩 잠에 떨어지겠구나. 사계절의 무궁함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야 보기 좋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고 그것을 살아낸다는 것은 잠 못 드는 미친 사람과 미치지 않으려 온갖 방편을 만들기에 미친 사람과 그것을 소화흡수시키는 더욱 미친 사람들을 낳았다. 빨갛든 노랗든 잠잠하든 시끄럽든 얼굴만 다른 세계의 미치갱이들. 계절과 계절, 계절과 나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느낀다. 머지않아 우지끈한다면 껍질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거대한 이름은 무엇이게 될까.


옥상에 올라 새벽바람을 맞는다. 무언갈 잊지 말라는 듯 몇 개의 십자가가 어두운 하늘 군데군데에 걸려있다. 작지만 돋보이는 그것들은 하나는 빨갛게 다른 하나는 하얗게 빛을 낸다. 십자가의 색깔도 남산타워의 그것처럼 의미가 있겠지. 십자가가 말한다. 적어도 이만큼은 하나님의 땅이고 하늘이고 건물입니다. 하나님은 낮은 곳에도 당연히 있지마는 십자가 보다 한참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아파트들이 괜히 눈에 거슬린다. 돈이 더 높지. 욕망이 더 위에 있고. 정말 많이 양보해서 해석해야 아파트들이 십자가를 둘러싸 그를 지켜준다고 볼 수 있겠지.


십자가... 교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하나님이 오신 적 있던가. 말씀만 들여다 봐도 하나님은 홀로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번뜩이는 아이디어처럼 나타난다. 그 역시도 자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나. 깨달음, 부처, 그밖에 다른 모든 이름이 마찬가지다. 그로부터 타고난 몸뚱이만큼만 땅을 대신하고 말씀을 대신하면 그만이지 거기에 무슨 더 강한 힘과 규모와 이름이 필요한가. 그냥 들꽃처럼 예쁘게 사는 모습뿐일 것이지. 부족하지도 남기지도 않는 너른 들판. 그게 보기도 좋고 놀기도 좋은 땅 아니야? 아마도 지금은 지구가 둥글지 않겠지. 한 사람 마음만 보아도 알지.


스스로의 마음을 진득하게, 끝까지 읽어내지를 못하니 덮어두고 앞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허물이나 열람하고 열광하는 시대다. 굳이 자신의 동그라미를 드러내고 박수받아야 살맛이 나나 보다. 젖이 아닌 허물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광경은 지켜보기 괴롭다. 어느덧 세상에는 그만큼 부끄러운 직업이 많아 보인다.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지. 부끄러움은 잠시니까 무시하거나 무릅쓰고 나야 뭔가가 될 수 있다는 둥. 대체 뭐가 되려는 걸까. 이미 다 되었으니 태어난 건데. 사람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나. 특히 다 큰 성인들을 모아 놓고 소리 내는 것에. 지혜로운 노인도 못 되는 바보의 후손이자 개인이론자들, 누구도 진정으로 돕지 못하는 허울뿐인 작자들은 본인의 직업이 부끄럽지도 않나? 안 창피해? 여지껏 자기가 여기저기 떠벌고 다닌 거 안 부끄러워? 아무리 멍청해도 일주일만 지나면 부끄러울 것 같은데... 주말마다 특별히 기억을 지운다거나 부끄러움을 터는 방법이라도 있나 보지? 부끄러워서 매일밤 어떻게 자지? 돈이 부끄러움을 감춰주고 어깨를 가볍게 해주나 보지? 대체 무슨 말이 필요하길래 마이크를 잡는 거지? 지능 검사 좀 받아봐야 되는 거 아니야? 돈에 눈이 멀었지 뭐. 굳이 그래야만 하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걸. 나 같으면 그렇게 사느니 그냥 굶어 죽겠다야. 그전에 정신 차리는 과정에서 부끄러워 나가떨어질 확률이 높겠지만. 그나저나 아직도 스스로를 모르고 일해? 아직도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 네 눈앞에는 뭔가 특별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나 보지? 고작 그런 약쟁이였어?


모세에게서 사람들의 냄새가 난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들과 그것을 품은 자비로움이자 하나님을 오가는 모세의 진동. 나는 분명한 답을 알고 따라서 공생을 위해 노력하는데 그러지 않는 너를, 나보다 많거나 적은 너를, 나보다 잘났거나 못난 너를, 나와 방향이 다른 너를, 나의 믿음을 흐뜨리는 너를 때때로 미워하고 죽인다. 나를, 가족을, 민족을,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의 이름은 끝내 질투였다. 맞건 틀리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까지 자신의 세운 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애쓰는 모세. 그리고 인간. 줄곧 하나님이었다면 누구도 기록 따위는 않았겠지. 그러나 지금의 왕들은 그런 모세에 비해 어떤가. 하나님을 사용하는 방법조차 잘 모르는 것 같다. 인간의 기초 능력을 상실한 그냥 등신이다. 진정한 왕들을 만나고 싶다. 그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세상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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