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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Jul 25. 2024

조현병자나 예언자나 그 누구나

(수1~24)

비로소 정신이 들고 좀 집중해 볼라치면 어둑어둑 잘 시간이야. 이래가지고 되겠냐고. 딱 여섯 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루가 짧아. 왜냐면 잠을 못 자기 때문이야. 점점 얇고 넓게 퍼지는 거야 잠이... 그렇게 널리 퍼지기만 해서 대체 뭘 어쩌려는 건지... 만두를 빚으려는지... 피자를 굽고 싶은 건지... 돌돌 말았다가... 펼쳤다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말이야... 뭔가가 끝맺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면 나는 뭔가 맺고 싶은 모양이지? 끝마쳤다, 마무리했다는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가 보지? 왜 안 느껴질까. 몇 달 전에 시작된 하루가 왜 끝나질 않는 걸까.


겨울엔 그랬지. 겨울엔 쓰고 딱딱한 순대국밥 뚝배기를 벗어나 어디론가 자꾸 가버리는 질투의 증기, 눈물처럼 거꾸로 식어가는 혈기에게 말하고 싶어서, 내 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마셨다. 아주 가끔, 술을 마신다고 해봐야 고작 막걸리 반 병이지만 계절의 정서와의 결속을 떠나서 감당할 수 없는 망상과 사고의 비약을 진정시키므로 내가 잘 모르는 무엇에게는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깨진 뚝배기는 참말로 씁쓸하고 딱한 맛이 난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삼키려고 마신다. 고독의 공포에 굴복해서 마신다. 그랬더니 천장을 살피거나 전력량을 수시로 체크한다든지 또 시간여행을 한다든지—시간여행이란 하나의 사건을 시초로 펼쳐지는 최악의 결과 대결들로 뻗어져 있으나 끝내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예언 소화 작업이다—더는 알고 싶지 않은 굉음들로부터 해방되었다. 때마침 뇌우가 하늘을 찢을듯하니 나도 인연만 갖췄더라면 언젠가 여호수아 행세를 했겠지. 그래서 아직까지도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새김질하고 뉘우치려는 거겠지.


조현병 환자의 치료 전후 일기를 보게 됐는데, 반응된 사람들 거의가 문서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는데, 나도 그랬음 했는데, 또 그러지 않았으면 했는데 와해된 글자들이 술술 읽혀버렸다. 어떤 상황인지, 감상인지, 그 조그만 머릿속에 얼마나 무한하고도 무참한 사건들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지, 위태롭게 반짝이고 있는지, 나의 특정 기록들과 견준다면 나 또한 환자라 치부해도 틀림없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래서 뭘 믿을래.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그럴싸한 것들은 나날이 근거와 권위를 높이 쌓으며 더욱 단단한 번데기서 튀어나오듯 갱신되고 있다. 똑같은 말을 어렵고 복잡하게 디자인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언제나 후대인이었으니까. 종교철학에서도 예술에서도 과학에서도 기타 모든 방면에서 뒤처진, 후진, 후대인이다. 복잡하고 어리석지 않으면 내세울 게 없으니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신 또한 수많은 방편으로 해석하고 때로는 타산에 따라 병균취급될 수도 있다. 병이라는 자각을, 이미지를 믿는 것은 푸른 대지에 ㅁㅁ를 함부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그 물을 마신 뱀을 밟아 죽이고 세눈박이 토끼를 닭장에 가두는 것과 같다. 언제쯤 바보행세를 그만둘 수 있을까. 누구 말이야. 누구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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