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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Aug 13. 2024

살아있는, 사랑하는 시늉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걸까. 누구나 평생 한 번쯤은 고치에서 튀어나오듯 거듭나는 걸까. 나는 어쩌면 당연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늘어놓는 건지도 모른다. 정돈해서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 당장의 고통을 덜기 위해 쓴다. 불쌍한 기록이다.


기운이 있을 때마다 날 뒤집으려 애쓴다. 뒤집기 위해 짓누르고 부순다. 부수기 위해 나를 본다. 나를 보는 것으로 지금에 들어 있는 과거도 미래도 본다. 누구나의 지금, 이곳이 팽창하기 전 본래 우주의 중심이자 전체인 것처럼 지금이라는 가장 좁고도 무궁한, 무시무시한 범주에 내 정신과 육신이 뒤집힌 거북이처럼 허우적댄다. 무언가는 뒤쳐졌고 또 무엇은 쓸데없이 앞서 있다. 잘 부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 혼돈에 빠진다. 부서지면서 무엇들이 제멋대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날마다, 부수기는 쉬워지는데 연결은 점점 복잡하고 기괴해진다. 연결 안 하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확신할 수 있다면 부서진 채로 산산이 흩어져 있고만 싶다. 그러면 누군가 밤하늘에 나를 이어서 심심한 이름이라도 붙여줄까.


답은, 진리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진즉 깨달았음에도 그것이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는지 그것이 전부라고 믿었다. 세상 그 무엇이든, 죽음마저 두렵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나를 읽거나 바라보거나 더 이상 나와는 무엇도 이야기 나눌 필요가 없었다. 머지않아 무지했고 자만했고 방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삶의 거대한 의문이 풀린 뒤의 허무. 내가 알던 허무와는 다른 차원의 허무. 깨달음 보다 더욱 거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나를 집어삼켰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나날이 쪼그라들고 말라붙는 기분이었다. 봄처럼 돌이킨 생기가 사라지고 몸도 점점 볼품없어져 갔다. 빛으로, 기적으로, 내가 느끼고 간직하고 있는 그것으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뭘 해도 잘 살 거라고 기쁠 거라고 자신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도 되었다. 어둠이, 그 너머의 허무가 더 이상 평화를 안겨주지 못했다. 두려웠다.

나의 놀라운 경험을, 기쁨과 신성의 상태를 나누고 누구에게라도 부디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그래서 살아있다는 기쁨과 큰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아직 내 주위엔 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호하거나 아예 대화가 되지 못했다. 서로는 외계인이었다. 나는 누구나 이지경으로 깨어나길 바랐다. 또 앞선 누군가에게 약간의 칭찬과 응원을 받고 싶었고 아주 조금의 부러움도 따르길 바랐다. 그것이 내가 길을 잘 들었다는, 삶의 이유를 잘 찾았다는 증거, 확신, 용기가 될 거였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인정을, 사랑을 받길 원했던 이유는 안심하기 위함이었다. 나 홀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계 지어진, 한정된 인간적인 사랑을 완성하지 못해서였을까. 보편적인 사랑으로 전환되지 못해서였을까. 나는 조언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 내게 남은 거라곤 죽음뿐이었고 몸을 버리는 일밖에 하고 싶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 더 이상 해줄 게 없으며 충분히 나누고 누렸으며 이 뿌듯하고도 허망한 마음으로 남은 몸을 이고 산다는 것은 죄를 짓거나 죄를 짓지 못해 굶주림과 고통 속에 절규하는 일뿐일 거였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하나님, 부처, 참나, 무엇이라 일컫든 그 경이로운 존재와 하나 된 이후에 찾아오는 또 다른 미지의 두려움과 절망에 대해 묻고 싶었다. 내가 원하던 걸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모든 의문이 풀렸는데 어떻게 더욱 고꾸라질 수가 있는지. 온전히 깨달은 자가 우물에 빠진다. 어찌 된 일인가? 그러면서 종교, 영성, 철학, 신비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들을 닥치는 대로 얻기 시작했으나 차츰 다양한 그것들에 현혹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됐다. 엉망진창. 추상적인 이것, 본질, 사랑, 평화, 자유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것들은 주물주물 변질이 잘 된다. 나는 개안을 한 것도 아니고 거듭난 것도 아니고 돈오한 것도 아니고 조울증도 아니고 조현병 환자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먹거나 먹히기에 따라 언제든 특정한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날로 삶이 통째로 달라졌고 달라진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축복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다만 안다는 것과 그것이 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상태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빛이 사그라들고, 믿음이 사라지고, 의심이 자라고, 그날들의 서툰 기록만이 뒤죽박죽 남아있을 때, 긴 꿈을 꾼 것만 같을 때, 껍데기 앎만이 남아있을 때 나는 막다른길에서 언어로 뭉쳐진 정보들의 희생양이 되야만 했다. 언어는 편리이자 불편인 도구이지 진리가 아니다. 언어에는 진리가 담길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인류는 지성 너머 영성을 어떻게 풀 것인지 알지 못한다.

허무에 빠진 뒤에는 깨어남, 깨달음,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마저 부질없어 삶을 더욱 비관하게 됐다. 거대한 고통과 고요에 몸서리치다 잠시 돌았나 싶기도 하고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걸 싶기도 했다. 도로 삶의, 마음의 노예가 된 것이다. 빛은 나의 창을 닦고 새로운 문을 열게 할 수 있으나, 햇살을 미치도록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 자리에도 영원은 없었다. 나는 주되게 쓸데없이, 머저리같이 고통이나 일으키고 있고 내일은커녕 당장을 몹시 견디기 힘들어한다. 허무의 무게가 존재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압도적인 절망으로 곤두박질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보다 큰. 존재가 떠난 느낌. 불이 꺼진 느낌.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허망함. 이제 어쩌지. 이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산다는 게 가능키나 한가. 허튼, 조잡한 정보나 들쑤시며 위안삼거나 무엇이든 좇아 수행해야 하는 걸까. 내 빛은 어디로 갔나. 너무 퍼줬나. 뭔가 잘못했나. 잘못했겠지. 아니면 인연이, 때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찾아 나서야 하나. 그럴 마음이 도무지 나질 않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속에서는 가스가 끓어 올라 개구리알 같은 검은 별들이 쏟아지는 듯하다. 우주도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 내 고통도 거기 있을 텐데 과연 아름답게만 바라볼 일인가. 들여다보려는 욕망, 시도는 타당한가. 우리는 언제까지 미지와 고통과 싸워야 하는 걸까. 안 그래도 되는데.


존재에 머물고 싶고 그래야 하는 게 마땅한데 돌아보면 그것도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존재와 다시금 하나 된다해도 삶의 문제들은 문제 삼지 않게 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언제든지 혼돈에 빠질 수 있다. 또 일반적인 사고와 대화가 어렵게 된다는 점. 시시하고 부질없는, 낮은 차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괴리감에 스스로 단절을 택하든가 마지못해 어울려 같은 선상에 머물다 보면 익숙한 습을 느끼고는 언제든 낮은 차원의 의식, 고통의 삶으로 돌아가 허우적거리게 될 거라는 자명한 느낌. 한편으로 빛나는 동안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위해, 목적지향적인 한정된 명분과 책임, 사랑을 앞세워, 먹고살려고, 돈 많이 벌고 싶다 등의 이유로 경제활동을, 삶을 꾸려나가기가 어렵다는 것. 그것들이 삶의 아무런 이유가,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것. 뜻이야 어떻든 결국 돈의 힘에 이용당하고 싶지도 않고 돕고 싶지도, 속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 그러면 도대체 남은 내 삶을 무엇으로 어떻게 꾸려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 두려움. 수도자가 될 수도 없고 머리를 깎고 싶지도 않다. 어떤 모습으로 굳어지고 싶지가 않다. 뭐 다 싫대. 내놓은 것, 이미 드러나서 깊은 골이 생긴 것들일랑 닮거나 좇기가 싫다. 따라서 무엇을 궁리해야만 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결국 나는 아무 이름도 갖지 못할 것이고 그게 내가 바라던 삶일지도 모른다. 버틸 수 있을까. 두렵다.


성경은 읽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에 이미 성경을 다 읽은 듯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성경에는 없다는 걸 느낌으로 알고 있다. 다만 그랬겠구나 하는 것들. 존재가 내 안에서 진정으로 살아 숨 쉰 이야기들, 그것도 아주 오래되어 퇴색된 이야기를 꾸역꾸역 들춰보는 것. 부러워하는 것. 저래야 하는데. 저 느낌인데. 신을 만들어 매달리는 것. 요구하는 것. 닮으려는 것. 기준 삼으려는 것. 그것은 거듭남의 장애일 뿐이다. 존재와 하나 되지 못할 때 말씀이나 세간의 무엇을 기준 삼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비참하다. 존재가 거할 때면 누구라도 자연히 알게 된다. 아무것도 읽고 듣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생명은 깨닫지 않아도 본래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안에 세상 모든 것이 생생히 움직이고 있다. 그 경이로움 앞에서 눈물 흘리고 감탄할 일밖에 없다.


공空함을 고통이 아닌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평온한 마음이라도 되찾고 싶다. 외적인 환경으로부터, 변화로부터, 변화의 고통으로부터 나는 끊임없이 집요하게 생각하고 감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부분만큼은 때에 따라 누구보다 광활한 데다 민감하고 취약하다. 민감한 건 특별하고 유능한 것인데 그것이 제 역할을 못하는 시대라 취약함이 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닌 온갖 어지러운 상들이자 욕망의 물질들 때문이다. 그것들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싶다. 언어와 기술로 대체되어 인간의 본질과 본능을 제한하고 무가치하게 만드는 군더더기들이 세상에서 모조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상황을 바꿀 수 없거나 바꿀 의욕이 없다면 나는 고통과 싸우며 소진될 것이 아니라 침잠할 필요가 있다. 고요히 바라보고 발견하고 느끼고 그것을 더욱 단단히 뿌리내리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평화. 감사. 사랑. 자유 같은 것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빛을 늘 깨어 소중히 지킬 필요가 있다. 죽더라도 그 안에서. 고통, 시련 가운데에서는 그야말로 고통과 시련뿐이 없다. 죽음도 깃들지 못한다. 공空과 지혜 단계에 이르러서도 언제든 타락할 수 있다. 나는 성급했고, 되돌아가 날뛰는 소를 찾아 길들여야 하겠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말뚝 박고 끈질기게 지켜봐야 한다. 전보다 더욱. 그러다 소를 타고 놀 것이고 용을 타고 놀 것이고 어느 날 또다시 하얗게 잊을 것이다. 재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평생 도를 닦아야 될 것만 같다. 속상하지만 거부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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