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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Sep 25. 2024

우산을 잠시 접습니다




이런 것쯤 말 안 해도 그만이지만... 두고두고 저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남깁니다.


별 건 아니고요.

빨간우산 파란우산.

아무도 모르는 브런치 북이요.

녀석들의 우산을 잠시 접어둘까 합니다.

다가올 회차는 되도록 마무리해 볼 생각이고요(찝찝해서).

우산 펼친 지 얼마나 됐다고―내 이럴 줄 알았다―역시나 변덕이 심하시네요.


어쩌겠나요 덜컥 가을이 왔고 비도―잠시―멎은걸요.


아마추어도 못 되는 나부랭이에게 함부로 연재일을 지키라는 압박이 이따금씩 걸리적거리기도 하고요(쓸데없이 브런치북으로 엮어가지고는).


실은 혼자 살면서 글쓰기에 시간 할애하기가 녹록지 않습니다(둘이, 셋이, 다섯이 사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백수 주제에 할 일이 왜 이리 많은지.


잠자야지, 일어나야지, 묵상해야지, 환기해야지, 세수해야지, 오줌 싸야지, 달력 넘겨야지, 화분에 물 줘야지, 음악 들어야지, 멍 때려야지, 커피 내려야지, 계란 삶아야지, 명상해야지, 사과 먹어야지, 똥 싸야지, 일기 써야지,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 한 줄이라도 주워 담아야지(전혀 못 읽음), 성경 넘겨야지(왕하 4에서 멈춤), 유튜브도 봐야지(다큐, 과학, 영성 등), 스포츠 하이라이트도 봐야지(오타니 어디까지 갈까), 영화도 보고 싶고(뭐 이리 눈을 많이 쓴담?), 또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둘러보고 처리해야지, 청소해야지(청소기, 밀대걸레, 온갖 기물 손걸레질, 화장실청소...), 빨래해야지, 먹고살겠다고 한두 번 밥 해 먹어야지, 설거지해야지, 쓰레기 버려야지, 이 닦아야지... 요가 같은 야메 스트레칭해야지, 체조해야지, 숲길 걸어야지, 실내자전거 타야지, 로잉머신 당겨야지, 맨몸운동해야지, 샤워해야지, 머리 말려야지, 연고 발라야지, 기타 쳐야지, 얼후(해금) 켜야지, 노래 불러야지(피아노는 입꾹닫), 노래 만들어야지(이 쓸데없이 크고 무거운 노트북의 본래 용도는 로직)... 계절 바뀌었으니 저놈의 베란다 곰팡이도 닦아야 하고 천장에 물자국은 하... 어쩌나... 에어컨 필터, 세탁기 필터, 공기청정기 필터, 선풍기... 씻어내야죠(이 많은 걸 도대체 일하면서는 어떻게 해왔담? 어떡은 무슨 죄다 생략했지).

아, 귀찮아.

힘들어.

가제트 만능팔 내놔.

맥가이버 데려 와.

세대가 달라서 몬 온다고.

그럼 도라에몽이라도 납치해.

쓸데없는 물질계.

멀티탭에 너무 많은 것들이 꽂혀있다.

곁에 누가 있다면 덜 힘들까 더 힘들까.

짬짜면을 오가겠지 정신 못 차리는 거지 어쨌건 짜장만 먹는 것보다는 행복할 거 아니야. 아닌가. 나 짬뽕 별로 안 좋아해. 나가사끼는 좋아


하여간 이 동물이요.

별안간 마음을 틀면 그쪽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하루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단 말이죠. 꿍해지면 설거지 하나 울며불며 고통스러워하던 미물이.


잠을 좀 줄여보면 어떨까 싶다가 말도 못 꺼냈습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불면증 이야기나 실컷 쏟아내지 않았던가요.

푹 못 자면 종일 멍해가지곤 아무것도 못하는 데다(직장 다닐 때야 별수 없지만) 선천적으로 기분 관리도 잘 못합니다.


여기에 더해 구직활동을 하라는 하늘의 계시가 점차 높은 강도로 수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거쳐온 일들에는 아무런 미련도 이끌림도 없네요.

이를 어쩌죠.

이 애매한 나이에 대체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하면 좋을까요.

거듭 고장난 사람이 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다던 그 양반은 어디 가셨는지.

예수마냥 거듭났다고 까불던 그 양반 어디 가셨는지.


뜬금없이 골동품 가게에 취직하고 싶은 거예요.

가게에 온종일 틀어박혀 무슨 할 일이야 있을까마는 저 같은 젊늙이들이 용달트럭에 뭔가를 분주히 싣고 내리는 걸 지나가다 우연히 봤거든요. 그냥 몸 쓰는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저기라면 왠지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겠다 싶은 거예요. 문화라든지, 역사라든지, 냄새라든지. 유년시절부터 TV쇼 진품명품은 기가 막히게 챙겨봤거든요. 나도 나중에 나이 들면 저 할아버지처럼 새하얀 머리에 중절모 쓰고 저기 앉아서 값어치 매겨주고 싶다... 하는 돌아보면 불경한 생각을 했지요.


장인정신이 필요한 일이면 좋겠습니다.

거기다 자유와 개성이 보장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이런. 돌담 쌓는 기술자가 유망할 때 찾아갔어야 했는데 놓치고 말았군요.

그 동네 털보 삼촌이―자식 같아서 하는 소리야―추천해 줬던 집 짓는 일이라도 열심히 잘 배워볼걸(음악이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


(비닐)하우스 짓고 허무는 막노동은 해봤어요. 외삼촌 고물상 하시던 때 사촌형 따라 온종일 파지도 주우러 다니고... 시장일이며, 밭일이며, 카페며, 레스토랑, 피자 굽고, 돈까스도 튀겨 보고, 펜션 청소며, 아동센터, 운전,... 삼 년 남짓 섬생활 할 적에는 여기저기 참 많이도 기웃거렸습니다(실화냐...).


돌아보면 누구보다 나태하고 제멋대로인 존재를 데굴데굴 굴려 그나마 사람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준 것 또한 앞선 사람들이었네요. 이제와 굴려줄 사람 없어 어디로도 감히 구르지 못하는 이 몸이 가엾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자 운세가 하필 또...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배움 짧고 성격마저 괴팍한 존재지만 이 좁은 도시에서 뭐 하겠다고 서로 다투며 허물과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일일랑 더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사람들을 홀리는. 특히나 가장 최근에 몸 담았던 광고대행사업처럼 심리를 가지고 장사한다거나 불안을 연료로 주의를, 시간을, 돈을 갈취하는 행위를 돕는 일이라면 더욱이요. 하필 그런 일을 가장 길게 전문적으로 열성을 다해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못마땅합니다. 돈에 눈이 먼 것도 아니었습니다. 깡무지했죠. 무지의 죄가 탐욕보다 대단한지 번아웃이 참 오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수청소부 일은 어떨까요.

대신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냄새를 잘 못 맡습니다.

들숨이 몸속으로 잘 안 들어오고요.

크고 작은 수술을 일곱 번이나 했습니다.

홍어 껍질도 그래서 끝내주게 잘 벗겼습니다.

천직이란 말에 도망쳤지만요.


무관심히 벌어진 일들을 주워담고 싶습니다.

무책임히 버려진 것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아닙니다.

제 주제에 감히 어찌.



끝내 정신이 무너질 때, 모든 가난의 앞잡이들이 마구잡이로 들이닥칠 때, 꾸역꾸역 살아갈 이유를 지어내는 것에도 회의와 의심이 질겨질 때, 지금도 그렇지만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멈춘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글쓰기였습니다—남이 건네준 다양한 사랑모양도 꼬리는 똑같이 뾰족했습니다—글쓰기는 자가치유 섬유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뜩 이것에 너무 과하게 매몰돼있다 싶은 거예요. 시큰 밑이 빠지는 기분이요. 자가치유가 자가포식으로 돌아 앉았습니다. 뭣도 없이 초조하기만 한 일과 중에 시간도 가장 많이 잡아먹히고 있었습니다(물론 고통가운데서는 여전히 글쓰기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태생적 집요함 때문에 진즉 치유됐음에도 움직이지 못하는가 싶기도 하고요. 아님 엄살을 부리고 있다거나. 이런 까닭인지 한번 바닥에 양반다리하고 앉으면 통 일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의자에 앉더라도 비슷하긴 합니다. 직장 동료가 담배 한 대 피우러 가자 하면 어 그래, 하고는 감감무소식이었죠. 이것만 더, 조금만 더, 막상 일어날 때면 동료는 이미 한참 전에 다녀온 뒤랄까요(긁적).


아무튼 빨간우산 파란우산 이야기 속에 빨강, 파랑, 이 눈 시려운 텍스트, 하잘것없는 내용을 게다가 이런 폐쇄적인 공간에서 그 누가 꾹꾹 참아가며 읽어줄까 싶기도 하거니와...

―너무 길어지네요

―생각은 넘치는 강물처럼 주체할 수 없군요


여긴 참 묘한 공간입니다.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 없는, 모두 같지만 동시에 모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 하는 모습을 듣습니다. 한자리에 굳건히 앉아 곡괭이질 하는 모습을 봅니다. 한참 지내다 보니 이곳에서는 오직 보물을 캐겠다는 일념보다는 그들에게 넌지시 다가가 물 한병 건네주는 사람이 더 귀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사람 찾아서 응원해 주고, 다친 사람 찾아서 옆에 잠시 앉아 있어 주는 거요. 그러나 또 더군다나 온라인 세계에서 그 마음이 어떻게 진실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조회수. 라이킷. 댓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렵습니다. 의도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오직 열린 마음, 사랑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합니다.


독자가 존재해야 작가가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에 무대미술하는 친구가 그랬어요.

자기 작품 봐주는 사람 딱 한 명만 있어도 예술 1년 더 한다고요.

내가 몰랐던 예술가의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다가가는 연습을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나이 먹을수록 사람들은 간단히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놈의 머리가 종일 망상에서 계산하고 따지고 있을 테니까요. 먹고 사니라 바쁜 건지, 바쁘다가 다친 사람이 많은 건지, 닫힌 사람이 많은 건지, 그래서 사회 분위기가 달라진 건지, 수준이 높아진 건지, 기준이 날카로워진 건지, 제가 남들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단계를 순순히 밟지 않아 소외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르고 유난스러운 바람에 사람의 매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부 다겠죠.


아무튼 곡괭이 덜 쥐고 첩첩겹겹 이야기에 접속하는 시간을 늘려보기로 합니다.

이 말이 그렇게나 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 마음은 절대적인 매력 같거든요.

중력이고요.


마지막으로 세상 모든 작가와 독자, 독생자 여러분... 맺을 말을 찾지 못해 집어든 것이 진부하게도 파이팅입니다. 저는 줄곧 진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요.






앞서 할 일이 많다고 변명을 늘어놨는데요. 최근에—쓸데없이—할 일은 또 생겼습니다.



붓펜을 샀습니다.

한 다스에 육천 원짜리랑 한 개에 육천 원짜리를.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까 취미를 들여보려 했던 사비 연필은 어쩐지 속이 더욱 쓰렸고 십팔 색 크레파스는 발달 퇴행을 유발했습니다.

붓펜은 잡자마자 놀라웠어요.

아무것도 몰라 재미있습니다.

아침 일과에 더하기로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간신히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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