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의 함정
외딴섬에서 지내던 때 벚꽃을 떨어뜨리고 땅을 충분히 적실만큼의 봄비가 내리고 난 다음날이면 나는 고사리를 꺾으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사리 하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보청기를 끼셨던 할머니를 시야에서 놓치면 고사리를 찾는 것보다 할머니를 찾는 시간이 더 많았다.
로켓프레시를 애용하는 나는 지난주문목록을 돌아보면 채소류가 대부분이다. 지난달에는 참나물을 주문해다가 실컷 무쳐먹었고 얼마 전에는 시금치를 무쳐먹다가 시듬직할 때 된장국에 넣어 먹었다. 이만하면 나물을 꽤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낭 안에 호미를 넣고 계절마다 포인트를 찾아 나물을 캐러 다닐 정도는 못 되지만, 나물 캐는 사람들은 대개 나물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생계를 위한 노동인 것이니 나물을 좋아한다는 건 시장바구니에 담긴 나물 앞에 잠시 멈춰 선다거나 검색창에 나물을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거다.
거대 자본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편리함을 가장한 서비스들은 개인이 나물을 캐러 갈 생각 자체를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거인들의 손바닥 안에서 사람들은 스마트폰 하나로 마치 귀족이 된 것 같은 체험을 한다. 그러나 그래서 내가 지금 귀족의 모습인지, 이것이 편리가 맞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나물을 먹기 위해 기업의 서비스 외에는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나물은 사 먹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참이 된다.
만약 친구가 어디냐고 전화가 왔는데 나물, 버섯 같은 걸 캐러 왔다고 하면 친구는, '얘가 힘든 일이 있구나', '생계가 어렵구나', 밝게 생각하면 아이들과 주말농장에 갔구나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이 자식이 나물을 좋아해서 나물을 캐러 갔구나라는 추측은 미친 생각이다. 친구는 속으로 그럴 것이다.(미친놈인가?) 평범한 개인이 나물을 캔다는 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미친 짓임에 틀림이 없다.
개인은 평생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부와 기업에게 돈과 경험치를 뜯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식당에 갈 줄은 알지만 식당에서 나오는 나물의 이름도 잘 모르고 호미질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물론 나물의 이름 따위 몰라도 되고 호미 따위 평생 안 쥐는 게 성공한 인생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물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의 자유를 축소시키고 재산을 빼앗고 경험을 가로막는 편리한 서비스들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깨달았을 때 이미 개인이 채집할 수 있는 나물은 어디에도 없다.
편리
편하고 이로우며 이용하기 쉬움
이로운가
이롭다 근데 과연 누구에게
이용하기 쉽다는 마치 서민들을 이용해먹기 쉽다로 해석될 정도로 나는 열에 받쳐있다.
편리는 불편도 함께 데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젯밤 일이었다.
나는 오늘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지만 끊이지 않는 오토바이 소리에 주의를 뺏겨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메모를 남겼다.
씨방새들이 돈 벌려고 편리한 듯 마케팅해서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거, 안 하면 루저 취급받게 만드는 게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둘러봐. 30년 전보다 나아진 게 있나 둘러봐. 근원적인 건 아무것도 발전하지 않았다.
새벽 2시까지 편리하게 배달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새벽 2시까지 오토바이 소음을 들을 수 있다.
배달은 편리인데 동시에 새로운 불편이 생겨났다.
그래도 할 것인가.
편리와 불편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은 채택되어야 하는가.
멍청한 시민이 되고 싶지 않다.
씨방새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저는 참새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머리맡에 앉아 짹짹거리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옮겨 적고 있으며 꾸준히 기록하고 싶은 마음과 참새가 날아갈까 염려되는 마음들이 교차해, 본 매거진에는 새똥 같은 기록들이 많습니다. 아직 대단한 요령이 없어 글을 다듬고 고치는 데 품이 많이 드는 편이고 그 과정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읽으시기에 불편한 콘텐츠임을 알면서도 눈 딱 감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다 해당 본문을 읽고 계신다면 이쯤에서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산책을 나서면 작은 동네 시장을 지나가게 된다. 왜 그렇게 루트가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산책하기로 한 첫날 그렇게 걷게 되어서 지금까지 거의 비슷한 경로로 걷는다. 그러다가 반찬가게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귀한 로스터리 카페도 찾게 되고, 내 나이대의 존재는 나처럼 어슬렁 거리며 시장을 둘러보지 않는다는 것에 노인이 된 것만 같은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했다. 시장 자체에 사람이 없다. 날씨는 무척 추웠고 가게 사장님들도 시큰둥하다. 배달 오토바이들만 위협적인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내가 사는 세계는 그런 모습이었다.
반찬가게 쇼윈도에서 제육볶음을 꺼내다가 눈에 띄는 나물을 몇 가지 집어 들었다. 개중에 하나가 냉이나물이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놀라운 향이 났고 질겅질겅 씹는 맛도 좋았다. 세상에 너무 맛있어서 이틀 지나 또 사 먹었다. 그리고 급기야 인터넷으로 냉이를 주문하게 된다. 참 바보 같은 게 시장에 갔으니 시장에서 냉이를 사도 됐을 텐데. 다음번에 먹을 땐 어떻게 사 먹는 게 신선하고 저렴한지 비교할 수 있게 있으니 되었다.
냉이나물을 무친다. 된장, 고추장, 매실액, 대파, 고추,... 유튜브에 올라온 어떤 콘텐츠든 조리 순서와 양념은 차이가 없었다. 조회수가 높은 걸 따라 한다, 맛있는 걸 따라 한다, 내 색깔로 포장만 바꿔서, 세상사 많은 것들이 그렇다. 근원적인 것들은 여간해선 새로운 것이 없다. 나는 된장과 어간장, 대파, 참깨, 참기름으로 간을 하기로 한다. 아직 실내자전거 페달을 굴리고 있던 터라 정해진 거리를 달리고 샤워까지 한 다음에 부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급했다. 자전거는 평균 속도 40km/h, 70RPM으로 10km를 달리고 잠시 쉬었다가 10km를 더 타는 게 룰이다. 나는 쉬는 시간에 배송받은 냉이 포장을 뜯고 한 움큼 집어서 물에 3번 씻고 식초 물에 담가 두었다. 그리고 조금 들뜬 마음으로 10km를 더 타고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냉이 앞으로 돌아와 몇 번 더 찬물에 헹구고 끓는 물에 천일염을 넣고 1분을 데쳤다. 찬물에 냉이를 씻고 꾹 짠 다음에 샤워를 하러 간다.
짰다. 반찬가게 냉이나물처럼 냉이의 향이 전혀 나지 않아서 흐흐 헛웃음이 났다. 이건 냉이나물이 아니고 시금치나물입니다라고 해도 틀림없었다. 또 실패했다. 그러나 무치지 않은 신선한 냉이가 아직 수북이 쌓여 있고 다음번에는 어떻게 무치면 좋겠다는 새로운 활로가 열린다.
사 먹는다 = 맛있고 간편하다
해 먹는다 = 많은 경험치
경험치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내가 그저 나물을 사 먹는 데에 그쳤다면, 나물을 사 먹었다. 맛있었다. 또 사 먹어야지의 문장 정도로 삶은 단순해진다. 복잡한 세상 단순하게 사는 게 현명한 게 아니냐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순하다의 순과 순진하다의 순은 같은 순 자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어수룩하다는 뜻이다. 세상은 많은 어수룩한 사람들을 양분으로 유지되고 비만하고 있다. 복잡한 세상이 왜 복잡한지, 나는 왜 그것을 복잡하다고 느끼는지, 이 세상에서 개인이 가져야 하는 단순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 중에 현질 하는 사람들 치고 그 게임에 오래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나도 경험으로 조금은 알고 있다. 가령 어떤 특별한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는 출석체크(현실로 치면 아침일기를 쓴다 정도가 되겠다)라든지, 다양하고 복잡한 던전을 클리어해야 하는데 게임사는 ~편리하게 취득하세요~ 현질 치트키도 마련해 놓는다. 현질로 아이템을 취득했다 치면 마치 굉장한 이득인 것처럼 생각이 된다. 돈이 있으니 게임 참 쉽다. 남을 뛰어넘는 건 쉽다.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지금도 매일 출석체크를 하고 던전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모종의 우월감 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아이템의 진정한 가치, 소중함을 알 수 없다. 나아가 게임자체의 가치가 떨어지고 금세 싫증을 낼 것이다. 더 이상 할 게 없다. 이미 나는 이 게임에서 대적할 사람이 없다. 게임이 너무 지루한 나머지 현질을 한 아이템을 강화했다.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근데 어째선지 아이템은 산산조각이 났다.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쓴 돈이 얼마인데. 고객센터에 전화해 화를 낸다. 약관을 읽으라는 얘기만 한다. 분이 풀리질 않는다. 아이템을 또 산다. 적어도 예전만큼의 강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강화에 실패한다. 수없이 실패한다. 이제 현질 할 돈도 없다. 어떡하지. 게임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동안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안 된다. 믿을 수 없다. 그 사람의 결말은 분노의 화신이 되어 유저들에게 해를 끼치다가 로그인 정지를 당하거나 스스로 로그아웃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과연 출석체크를 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이 남아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그런 힘이 있긴 했을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들은 더 높은 이익에만 급급할 뿐이지 자신들의 서비스나 상품이 어떤 부작용을 초래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표면적인 편리 뒤에 숨은 미지의 강력한 불편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은 선택한 개인의 몫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눈 앞에 자연스레 놓여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경중을 따져봐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이래도 나물을 캐러 나서지 않을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