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 여파

by 자진유리

1

남쪽으로 약 사오미터 떨어진 건물 옥상에는 수년 전부터 회색 막대 모양의 기계들이 아파트 단지처럼 하나둘 세워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이면 날씨앱을 살피는 대신 옥상에 올라 먼 남쪽으로 자그맣게 보이는 돌산의 명도와 채도를 따져 보며 기상을 파악하거나 기분 따라 예보를 지어내곤 했는데 기계무리들이 돌산을 완전히 가리운 다음부터는 이불속에서 오지 않는 아침을 원망해야 했다.

기지개 켜는 법도 잊은 채 휴대폰을 더듬거리다 날씨앱을 누른다. 날씨앱 안에는 새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잠자리 날개 냄새도 나지 않으며 동남풍이 불지도 않는다. 관계와 조화에서, 그리하여 더 큰 지평을 확인함으로써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눈 뜰 때마다 갈취당하는 것이다. 문자, 숫자 등의 질서 정보들은 매번 똑같은 결과를, 흔히 말하는 굴레를 만든다. 32도면 반바지를 주워 입고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설 뿐이다. 그로부터의 의도된 일탈은 특이사항이며 스스로 조차 일상의 균열, 반항 정도로 취급한다. 감각, 감정, 그로부터 생각, 창조가 일어날 수가 없으니 사는 맛이 없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삶에서 진실로 깨달아 기뻐해야 할 것들을―그것이 의도되었든 아니든―갖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대부분이 현실이라 믿는 세상은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까 따라와' 하는 아저씨다. 아이스크림. 맛은 있지. 인간은 그 굴레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으려 욕망하게끔 학습되어 왔고 그 능력으로 먹고 산다. 그로부터 현실이라는 꿈이 더욱 생생하고도 단단해지고 있는 것이다.

까치는 기계 근처 전신주에 더 이상 둥지를 틀지 않는다. 멍청해 보이기만 하던 비둘기조차도 전깃줄에 앉아 꾸벅꾸벅 졸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는 가장 안정적이라 믿는 질서로써 점을 전깃줄처럼 하나의 굵은 선으로 잇는다. 전체가 아닌 분열로써, 그리고 육체보다 더욱 차갑고 단단한 것으로써, 우리는 더욱 강하게 우리를 별개로써 구분하고 인식한다.


중계기는 어림 잡아 세어도 스무 개가 넘었다. 나는 그것들이 통신사가 서비스를 원활히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기계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이 발산하는 영향에 대해 심각해지고 있었다. 언젠가 엄마가 그로부터 나와 같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전자파가 어떻다는 둥 말했던 것마저 떠오르자 한동안 나를 뒤덮고 흔들던 정신적인 문제들이 어쩌면 저것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중계기와 가까이 면하고 있는 안방에 공기청정기를 놓으면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오르고 시간이 지나도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안방 문턱만 넘으면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현상은 중계기 전파로 인한 오류라는 추측이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2

나는 여지껏 십 년이란 세월을 세 번 겪었고 세 번째 십 년의 말기에서 삶 전체를 파악하다가 어떤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가 십 년 주기로 동일한 지점에서 이행移行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 전체를 놓고 보아도 맞아떨어지고 일 년으로, 또 하루로 축소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1, 2, 3, 4, 5, 6, 7, 8, 9&0으로 치환하면 숫자는 수량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고 더욱 다양한 삶의 면면에서, 또 전기電氣적 이론과도 꼭 맞아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내가 몰랐던 자연법이든 연기법이든 누구도 정의 짓지 못했던 그 무엇이든, (...) 그런데 십 년 전에 내 주변에 중계기 같은 건 없었다. 이십 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실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비단 중계기의 인공적인 전자파나 특정 생명의 주파수라든지 형태만 다른 파동들의 흐름과 규모와 간섭의 불규칙한 규칙, 주기를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정확한 프랙탈을 기록하고 증명할 수가 없다.

무엇이 진실일까.

나는 문명의 여파로 얼마나 더 불완전해질 것인가.


중계기의 전자파는 우려할 만큼 몸에 해롭지 않다는 게 떠도는 정보인데 거슬러 생각해 보면 결국 나쁘다는 얘기다. 게다가 저것들은 그 수가 너무 많은 데다 매우 가깝다. 한국은 유럽이나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전자파 규제 역시 느슨하다. 그런 이유로 반짝 이슈 됐다가 사그라들었다. 코로나라든지 그 어떤 정치의 도구, 순간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욕망, 무책임, 어리석음,

인간이 보인다.

죽이고 싶다.

내 땅에 중계기를 설치하면 통신사로부터 임대료를 받아 처먹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지경을 만들어 놨다는 데에 정말 화가 난다. 민원을 비롯해서 별 탈이 없는 것 같으니 슬금슬금 늘려 나갔을 것이다. 고정 수입만 늘려 가면 된다. 그게 잘 사는 방법이다. 건물 옥상에는 세입자를 받을 만한 공간이 없지만 나는 똑똑하니까 이렇게 더욱 안정적인 고수익을 낼 수 있지롱.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지롱. 꼬우면 이사 가시든가. 민주공화국이라면서 지역 주민 사전 동의 절차 같은 건 들어 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당해버린다. 이뿐일까. 역시나 사제 폭탄을 만들어서 저 건물을 무너뜨려야겠어. 내가 거친 생각을 하는 건지 망상인지 헷갈린다. 근래 들어 머리가 많이 빠지고 생전 없던 이명이 생겨 온종일 고주파음에 시달리고 덩달아 머리도 웅웅대고 도무지 밤낮이 지켜지지 않았던 이유를 중계기 영향 때문이라고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이 집에 다시 들어오기 전에는, 또 안방에서 자기 전에 나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 익힌 지혜가 있었다. 감싸지 못하면, 그러니까 수용/포용하지 못할 거라면 떨어지라. 나는 일단 문제의 안방에서 되도록 멀어지기로 했다. 최대한 중계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 방은 현관문과 가까워서 외부 소음, 새벽에 배송기사 소리라든지 다른 가정의 철문 여닫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방이다. 그 방에서 겨우 두 시간인가를 잤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침다운 아침을 맞이했고 따라서 무척 개운했다. 안방에서 눈을 뜨면 머릿속을 웅웅대는 어떤 압력 때문에 잠에서 못 깨고 잠에서 그다음 잠으로 곧장 이어지곤 했는데 그것이 말도 안 되게 깨끗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 현상을 '전자파가 주는 인체영향'의 사례나 증거로 들이밀 수가 없다. 민원, 철거, 불가능하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거 쉽다고 생각했겠지만—나는 무기력하지만 무력하진 않다. 옹졸한 법과 질서를 야금야금 쪼아 먹어야겠다. 까치야. 그치 까치야.



3

홍어회를 주문해다 먹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양이 적어서 실망했는데 한 입 먹고 깨달았다. 나 홍어 먹을 줄 모른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더없이 꾸역꾸역 처먹었다. 어떤 풍취를 자아내려고 막걸리와 청하까지 사 왔기 때문이다. 딱 세 번 씹기까지는 괜찮았다. 그 뒤로는 오줌젤리를 씹어 먹는 꼴이다. 견디지 못하고 막걸리를 마시면 다시 세 번 씹을 때까지는 달짝지근해서 버틸만하다가 결국 해탈을 빌려다 먹는다. 맛에 좋고 나쁨이 없다. 분별이 탄생하기 전으로, 먹는 감각, 몸에 작용할 결과, 괜한 감사, 그뿐. 그리고 두 번 다시는 홍어는 쳐다도 보지 않겠다.

홍어 껍질 벗기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 같은 계절, 그리고 새벽 두 시의 밝은 인공과 어두운 자연이 다투며 만들어내는 질척하고도 차가운 시장 바닥 물웅덩이, 그 와중에 연신 커피 연기 내뿜는 리어카 아줌마, 인스턴트커피, 생물 남아예요, 거짓말하는 사람, 믿는 사람, 모르는 사람, 구라를 쳐야 먹고사는 사람들, 믿어야 사는 사람들, 몰라야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구석진, 어두침침한 철계단 위, 상인회 이름 같은 것들, (...) 더러운 변소와 욕지거리, 얼음 나르는 사람, 가죽 벗기는 나, 점액과 이슬로 흠뻑 젖은 목장갑과 고무장갑을 벗고 한숨 내뱉으면 그제야 떠오르는 태양,

늘 당했고 또 당할 것이다.

돈과 경험이라는 명목 하에 홍어를 씹어 먹듯 할 것이다.

멍청한 짓은 아무래도 못하게 되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의 진실로 할 일은 무엇일까.

굳이 욕망해야 할 게 무얼까.

성숙한 욕망이란 뭘까.

그것은 혼자 고집하면 굶어 죽는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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