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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Jan 22. 2024

스크리밍


띵동—

충동—

띵동—

충동—


잘도 질러왔다.

입지도 않을 옷을 한번 입어나 보자 주문하고 다름날 되돌려보내고, 단 한 번도 펼치지 않을 책을 혹해서 사는가 하면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시켰다. 아니다. 밥알 한 톨까지 무조건 다 먹어치운다.

그 충동과 집착은 도박적인 주식생활로 연결되어 매우 큰 금전적 손실을 남기기도 했다.

불과 육 개월 전이다.

그 무렵 이때다! 하고 안 좋은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아주 못 살 지경이었다.

난생처음으로 환각 환청에 공황까지 겪었고 그로부터 정신과를 제 발로 다시 찾기도 했다.

물론 그 사건들로 인해 다시금, 어쩌면 조금 더 담대해진 부분도 있다.


'돈 다 떨어지면 나가 죽어야지. 근데 뭐 내가 나를 설마 굶어 죽이기야 하겠어? 쪽팔리게. 살려고 돈 벌러 기어나가겠지. 안 벌어도 그만이고. 나는 이제 알겠으니까. 그래서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거니까.' 같은 거친 깨달음이었다.


적어도 내가 기록을 멈추지 않는 이상은 다시금 정신과를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기록이 지속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과 컨디션이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변방에서 홀로 지내는 자유로운 순간에도 스트레스는 있다.

커피를 내리고, 스트레칭을 하고, 체조를 하고, 싸이클을 타고, 맨몸운동을 하고, 찬물샤워를 하고, 전담을 피우고(은근 일정한 호흡 유지를 도와줌), 명상을 하고, 맨발로 산책을 하고, 하고, 또 하고,,, 했던 것들이 어쩌면 모양만 다른 스트레스 해소의 움직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게 된 것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에 대해 거룩하고도 그럴싸한 이유들을 갖다 붙였지만 실은 스트레스와 충동을 다스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타구니 사이에 달린 생식기관 대신 자판을 붙잡고 자위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은 결국 나를 노래하게 했다.

글과 노래 모두 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특히 노래는 내 한 몸만 있으면 가능한 창조방식이기에,

또 그저 앉은자리에서 해낼 수 있으니 게으르지 않지만 게으른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삶의 수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잘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 어느날엔가 난데없이 스크리밍 창법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간 내가 적어나간 글뭉터기들만 봐도 온통 스크리밍인 것이다.

캬ㅑㅑ악——

린킨파크라든지 90년대 얼터너티브락밴드들의 라이브 영상을 관찰하면서 무작정 따라 하는 식인데 연습하다 보니 머지않아 안정적으로 부를 수 있겠구나 싶다.

뭐, 이런 방식으로 노래했다간 금세 성대결절이 오거나 목에 영구적 손상을 일으켜 노래를 못하게 되는가도 싶지만 나는 이미 내 성대를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그리고 무엇보다 믿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성대가 나를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얘도 날 믿을 거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를 린킨파크의 보컬리스트 체스터 베닝턴의 생전 영상으로 이끌었다.

수년 전 오직 회삿일에 빠져있을 때도 체스터의 죽음은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영상은 라디오 인터뷰 형식이었는데 난 영어를 통 모르니 내용은 대강 짐작만 했다.


그는 늘 싸우고 있었나 보다.

린킨파크의 음악은 그의 혼란스런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노래를 했고, 사랑을 했고, 아버지가 되었고, 계속 다른 나를 찾고 무수한 또다른 나를 생성해 간 모양이었다.


그는 과연 자신을 몰랐을까.

사람은 현명해서도 죽지만 때론 너무 많은 생각으로 인해 죽기도 한다.


마지막에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십 년 주기로 사망충동을 느끼고 실행에 옮겼던 적마저 있었으므로 감히 심정을 알 것 같지만 체스터 정도나 되는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


그의 절친이었던 크리스 코넬의 죽음의 영향이 컸을까.

내 아버지도 일찍이 절친이 죽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힘들었다고 했었다.

Q도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게 되어 오래간 힘들어했다.

그것들은 통상적인 죽음의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죽음의 그림자 속에 망연히 남겨진 사람들은 영원히 어떤 죄책감 같은 것에 허덕이게 되는 걸까.

그리고 그것이 주변에 남은 생명마저 탐하려는 걸까.


이별, 상실은 그게 누구의 무엇이든 결국 동일한 배율의 강력한 혼돈과 맞바뀐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존재가 내 세상을 차지하고 지탱했던 영향력만큼, 나의 여러 대륙 중 하나가 침몰하는 거대한 사건인 것이다.



There's something inside me that pulls beneath the surface  
...
I've felt this way before
So insecure


세계적인 가수가 되고, 모두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아도 마라는 돌아왔다. 마라는 끈질기게, 끝끝내 수많은 한 생명들을 낱낱이 꺼트렸다.  

대중은 그에게 치유받았지만 정작 그는 순교자처럼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들이 남긴 음악으로 그를 기리며 밤이건 낮이건 그를 찬양한다.

그들의 노래는 스스로 영원히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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