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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Feb 16. 2021

3.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는 1947년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얼마나 귀한 딸이었던지 외할아버지는 딸의 이름마저 “귀한”이라고 지으셨다. 어머니는 부잣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귀한 딸자식인 만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셨다. 영어공부를 해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대학교에 진학하셨고, 여행이 좋아서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셨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소개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당시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하셨다. 당시 초혼 평균 연령이 20대 초반이었기에 10년이나 늦게 결혼하신 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유로운 삶도 결혼과 동시에 끝나고 말았다. 전기도 안 들어올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과 결혼한 덕분에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아버지 월급의 대부분이 일곱 명의 시동생들과 시부모님의 생활비로 쓰였다. 어머니는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린 내가 자고 있을 때 주인집 아이들을 가르치셨다. 결혼 후 어머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새에서 새장에 갇힌 새로 살게 되었다.      


결혼 후 자유롭게 살지 못했던 어머니는 불행해 보였다.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은 새들처럼 먼 하늘을 종종 응시하시곤 했다. 어머니의 불행을 나에게만큼은 전가하고 싶지 않으셨던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고 늘 말씀하셨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기 때문에 남이 시키는 일 말고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 때 늘 하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공부 잘하던 아들이 음악을 한다고 하니 격렬히 반대하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으로 바이올린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건을 내거셨다.      

“바이올린 하는 것은 좋은데, 성적 떨어지면 그날로 끝이다.”

“아버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시긴 했지만, 내심 못마땅해하셨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적을 유지하면서 바이올린도 열심히 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이올린 실력이 점점 늘었고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청소년 오케스트라단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난 후 학습량은 점점 많아지는데, 음악에 쏟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자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 때 결국 성적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며 성적표를 나눠주던 날 죽기보다 집에 가기 싫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놀이터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고 춥고 배고파지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오늘 성적표 나왔지? 성적표 가져와 봐!”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가슴이 콩알만 해졌다.        

“아버지, 여기 있어요.”     

성적표를 확인하시던 아버지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큰 소리로 화를 내셨다.      

“성적이 이게 뭐냐! 너 바이올린 한다고 공부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거잖아! 바이올린 당장 가져와!”     

아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서 바이올린을 꺼내어 거실 바닥에 내리치셨다.      

“이놈의 바이올린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으니, 앞으로 다시는 바이올린 하겠다는 이야기 절대 꺼내지 말아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가 반으로 두 동강 난 바이올린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방에 들어가셨고, 어머니는 울고 있는 나를 뒤에서 가만히 안아 주셨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펑펑 울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깨우셨다.      

“아들, 아침 먹고 엄마랑 어디 좀 가자”

“주말 아침부터 어디 가는데?”

“비밀이야. 아무튼, 밥 빨리 챙겨 먹고 나갈 준비 해!”     

식사 후 나갈 준비를 마치자 어머니는 나를 이끌고 백화점으로 향하셨다.

“엄마, 평소에 안 오던 백화점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잠자코 일단 따라오라니깐.”       

백화점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수십 대의 바이올린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눈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조명을 받은 바이올린은 하늘의 별들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들, 엄마가 그렇지 않아도 바이올린 새로 사주고 싶었어. 기왕 사는 거 제일 좋은 거로 사줄게”

“엄마가 돈이 어디 있다고........”

“걱정 마, 아빠 몰래 모아놓은 비상금 있어.”     

그 날 어머니는 그간 모아놓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들을 꺼내어 가게에서 제일 비싼 바이올린을 사주셨다.      

“아들, 엄마가 오늘 밤에 아빠 오시면 설득할 테니깐 아들은 걱정하지 말고 지금처럼 바이올린이랑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알았지?”     

어머니의 그 말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머니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나중에 꼭 성공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해주신 어머니께 보답하고 싶었다.      




“형, 성모병원 응급실로 빨리 와 줘!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셨어!”

늦은 밤 동생의 전화를 받고 긴급히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워 응급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급히 집을 나섰다. 엄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마음이 너무 조급해졌다. 1분 1초가 아까워서 교통법규도 무시한 채 서울 도심을 시속 100Km로 달렸다.


‘하느님 아버지, 제발 엄마를 살려주세요!’


병원으로 가는 동안 마음속으로 화살기도를 끝없이 했다. 30분 뒤 성모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아들, 엄마가 미안해. 아들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피곤하겠다.”

“엄마 아픈데 당연히 와야지! 섭섭하게 왜 그런 말을 해! 빨리 퇴원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호두 파이 먹으러 가자!”


엄마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내일 출근해야 하는 자식 걱정부터 했다.      


3개월 전 엄마는 말기 위암 진단을 받으셨다. 평소 너무 건강하셔서 엄마가 아픈 줄도 몰랐는데, 어느 날 어머니의 목 주위가 부풀어 있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강 검진을 받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너무나도 차가운 말투로 말씀하셨다.      


“위암 말기입니다. 3개월 정도 남으셨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얼굴을 세게 꼬집어 보았는데 너무 아팠다. 의사 선생님의 오진 일지 모른다며, 다른 큰 병원에서 다시 재검을 받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큰 병원에서도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너무 억울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어머니는 평생 고생만 하셨다. 아들이 좋은 회사에 취업하고 결혼해서 손녀딸도 보고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 왔는데, 어이없게 엄마는 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엄마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안 좋아질까 봐 일부러 더 밝은 척하셨다.


“아들, 암보험 가입해놓길 잘했어. 보험금으로 2천만 원이나 나온대! 이 돈으로 해외여행이나 실컷 다녀야겠다!”


그리고 내게 간곡히 부탁하셨다.      


“아들아, 지금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 주라. 암에 걸렸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병자 취급받고 싶지 않거든.”

“네, 알았어요. 엄마.”     


엄마는 보험금으로 친구분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오셨다.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다며, 사진을 보여주시며 연신 즐거워하셨다. 엄마의 밝은 모습을 보니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만간 완쾌하실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엄마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엄마는 이상한 행동을 계속 보이셨다.

 "아들아, 숨을 쉬기 너무 힘들어 의사 선생님께 빨리 산소호흡기 좀 달라고 전해줘!"


라고 말을 하시고는 갑자기 먼 허공을 바라보셨다.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입에 거품을 내실 때면 엄마의 임종이 다가온 듯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라도 엄마가 돌아가실까 봐 엄마의 발바닥을 미친 듯이 지압했다. 발바닥을 지압하면 간혹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밤새 엄마 발바닥을 지압했다.     


냉정하게도 현실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엄마의 심장 박동을 표시하던 기기는 굴곡이 점점 없어지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평평해졌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의사 선생님을 찾아 병원 복도를 미친 듯이 뛰었다. 의사 선생님을 발견하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선생님! 엄마의 심장 박동이 멈춘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은 매일 겪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말씀하셨다.

"심폐소생술 진행해 드릴까요? 진행하라고 하시면 진행은 하겠지만 시술 도중에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질 수 있으며, 숨이 다시 돌아오신다고 하더라도 얼마 더 못 사십니다."      


세상에 어떤 자식이 엄마의 죽음을 선뜻 선택할 수 있을까, 당연히 심폐소생술을 요청했고 요청과 동시에 의사 선생님 세 분과 간호사 선생님 세 분이 엄마 침대 주위 커튼을 치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10분 뒤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고개를 떨구고 나오셨다. 선생님의 얼굴을 통해 엄마의 죽음을 직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막 임종하셨습니다. 고인과 잠시 시간 보내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와 동생은 세상 어느 때 보다 더 슬프게 곡소리 내면서 울었다.      




어머니께 바이올린 선물을 받은 지도 벌써 30년이 흘렀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10년이 지났다. 얼마 전 집안 정리를 하다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바이올린을 발견했다. 바이올린을 보자 30년 전 내 손을 잡고 백화점으로 가시던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지?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있길 바래. 나중에 하늘에서 만나면 그간 못했던 이야기도 많이 하고 즐겁게 보내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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