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 손주부 Sep 07. 2020

#30 부모님 모시기

1999년 여름, 미국의 한 요양원 겸 호스피스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당시 사람들이 꺼려하던 치매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소변을 잘 못 가리시는 분이 많아서 간호원과 간호조무사들이 꺼리는 병동이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었기에 백인만 있는 호스피스에 영어도 못하는 노란색 얼굴의 동양인에게 기회가 주어졌던 것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의 대소변을 처리할 때도 더러워서 기저귀 갈고 손을 여러 번 씻었는데, 이역만리 타국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백인 할아버지들의 기저귀를 갈 때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기저귀를 열었을 때 홍어회 냄새보다 100배는 더 강력한 응가 냄새가 내 코를 찌르고 지나가면 속이 울렁거려 근무 전 먹은 음식을 재확인하고 싶어 지게 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볼일을 보고 나면 기저귀가 부풀어 오르거나 색깔이 변해서 갈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기적으로 체크를 해서 기저귀를 갈아드리면 좋으련만, 기저귀를 가는 일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에 기저귀를 갈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간호조무사들은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나쳤다. 그래서 나는 교대를 하자마자 기저귀를 체크했다. 그러면 백이면 백 기저귀를 간지 오래된 경우가 많았다. 교대하고 나자마자 열심히 새 기저귀를 교체해 드리고 나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고마움을 표시하는 분들을 뵐 때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낸시라는 70대 할머니와 친해지게 되었다. 남편분과 사별하고 나서 치매에 걸리셨는데, 자식들이 집에서 모시기 여의치 않아서 호스피스로 보낸 것 같았다. 2주에 한번 꼴로 가족들은 할머니를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낸시 할머니는 호스피스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늘 옷을 잘 차려입으셨다. 짧은 커트 머리에 밝은 베이지색 원피스 차림의 할머니를 뵐 때마다 로마의 휴일(스페인 계단에서 젤라토 먹는 장면)에 나오는 (곱게 늙은) 오드리 헵번 같았다. 할머니는 유달리 내게 잘해주셨다. 다른 간호조무사와는 달리 할머니 말을 잘 들어줘서 좋아했던 것 같다. 당시 영어를 잘 못해서 열심히 듣기만 했는데 할머니는 이런 나를 '경청의 아이콘'으로 보셨다. 할머니는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노래도 가르쳐 주셨고, 어설픈 영어로 떠듬떠듬 말해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셨다. 내가 말을 할 때면 사슴처럼 큰 눈을 더 크게 뜨시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떠한 심정인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경청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야간 근무를 서던 날이었다. 야간 근무는 오후 7시에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지속되는 근무였다. 오후 10시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침대에 잘 누워계신지 확인하고 침대 가드레일을 올린 후 비상벨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면 그 날의 일과가 끝나게 된다. 이후에는 혹시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대기실에서 대기만 하면 되었다. 대기실에 가기 전 난 항상 떨어진 당을 보충하기 위해 초코바 자판기로 향했다. 쿼터 동전을 넣고 트윅스를 누르는 순간 갑자기 할머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난 트윅스를 자판기에서 뺄 시간도 없이 긴급하게 비명소리가 나온 방으로 뛰어갔다. 그 방은 낸시 할머니 방이었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악몽이라도 꾸셨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붙잡으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부탁이야, 제발 나 좀 집으로 데려다줘.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어.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대전에서 혼자 살고 계신다. 서울에서 같이 살자고 말씀드려봐도 혼자 사는 게 좋다고 늘 말씀하셨다. 대전이 서울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그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해 드렸다. 무엇보다도 여자 친구가 생기신 것 같아서 혼자 사시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분을 가족들에게 소개해 주시진 않았지만 혼자 사시는 아버지 집에 핑크색 꽃무늬 고무장갑과 리시안셔스 꽃병의 출현은 나의 심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엘지 냉장고 광고 사진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타파웨어들을 보았을 때 분명 여자분의 손길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그래, 혼자 사시는 것보다 여자 친구분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다'


혼자 사는 게 편하고 너무 좋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얼마 전 갑자기 같이 살고 싶다고 하셨다. 그 여자분과 헤어지기라도 하셨던 것일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전화드려 봤더니, 올해 아버지의 연세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해의 연세와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하셨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진 동아리, 당구 동아리 등을 못 가고 집에만 계시니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아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대전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모시고 같이 살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의견도 중요하기에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 고양이 세 마리 (아내, 1호, 2호) 들에게 물어봤다. "얘들아 이제 할아버지 연세도 많고 요즘 외출이 어려워 집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계실 것 같은데 대전에 내려가서 같이 사는 건 어떨까?" "할아버지랑 사는 거 너무 좋아! 그런데, 대전에 가서 사는 건 싫어. 거긴 친구들도 없고 서울처럼 예쁜 카페들도 별로 없단 말이야!" "할아버지가 서울에 오셔서 같이 살면 안 돼?" 아내는 신혼초부터 서울 말고 다른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늘 해온 사람인지라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심성이 착한 사람인지라 내가 부탁을 하면 그러자고 말할 것 같았지만, 서울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어중간한 상황이 한 달간 지속되었다. 아버지를 생각해서 대전으로 내려가자니 아내와 아이들이 신경 쓰이고, 아버지 혼자 계속 저렇게 사시게 하자니 맘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아, 이 상황 어찌하오리까!

작가의 이전글 핑크 드레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