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인규 Dec 24. 2024

칩거의 즐거움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시간

나는 공공 기관 1군데, 그리고 사설 기관 1군데와 협약을 맺고 프리랜서로 심리상담과 커리어코칭을 하고 있다. 그런데, 12월이 되면서 공공 기관으로부터의 업무 의뢰가 크게 줄어들었다. 지난 1년의 사업 예산을 다 소진하고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년 2월 사업이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 한동안 새로운 업무 의뢰는 없을 것이다. 사설 기관으로부터의 업무 의뢰는 조금 더 늘어났지만, 전체 업무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셈이다.


프리랜서의 일은 이와 같이 발주처의 상황에 따라 변동이 크다. 발주처 예산이 소진되거나, 사업계획이 변동되면 프리랜서는 어쩔 도리 없이 큰 영향을 받는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다른 분들의 사정을 살펴보아도 비슷한 것 같다. 이럴 때 프리랜서의 마음은 위축된다. 직장인이라면 해고되거나 회사가 문을 닫지 않는 한 월급을 못받는 일은 없을테지만, 프리랜서의 통장은 민감하고도 위태롭다.


일이 적어진데다, 날씨마저 추워졌기 때문에 예전보다 외부에 잘 안나가게 된다. 등산이나 헬스클럽 같은 운동 뿐 아니라, 지인들과의 만남도 되도록 나가지 않으려 한다. 을지로입구의 공유 오피스에 나가서 행정업무나 창업준비를 할 때도 있지만, 먼저 바깥 날씨를 확인해 보고 기온이 낮거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웬만하면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2-3일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종일 집안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 일상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다. 쿠팡과 배달의민족 같은 편리한 서비스 덕에 필요한 것은 스마트폰을 열고 클릭 몇 번이면 쉽게 살 수 있다. 씻기와 식사, 청소 같은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을 오전 중에 마무리하고 나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피아노를 연습한다. 최근에는 몇 가지의 교육을 수강하고 있는데, 화상미팅 어플로 모든 과정을 수강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겨울 내내 집안에만 있어도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듯 하다.


문득 ‘칩거’라는 말이 떠올랐다. 칩거(蟄居)는 일반적으로 집 안에 틀어박혀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하며 지내는 생활이 내게는 편안하고 즐겁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타의에 의해 칩거를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2년간 자발적으로 칩거 생활을 하며, 단순한 삶과 내적 평화를 탐구했다. 책 ‘월든’에 그의 자발적 칩거 생활이 묘사되어 있으며, 자연 속에서 고립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을 느낄 수 있다.


정약용은 정치적 박해로 약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기간 중에도 학문적 열정을 잃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분야에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또한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 가르쳤다. 유배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당시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나중에 더욱 실용적이고 개혁적인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자발적 칩거는 사실 굉장히 매력적인 삶의 형태이다. 나의 생활에서 생계를 위한 본업이라는 무거운 돌을 치워내고, 그 빈 자리를 가장 의미있고 즐거운 일들로 채우는 것이 칩거의 본질인 것 같다. 생계와 삶의 의미 간에 균형을 맞춰주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교수인 친구들이 가끔씩 안식년이라는 것을 얻어서 강의를 하지 않고 다른 일들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게는 몹시 부러운 일이었다. 1년의 시간 동안 중요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실컷 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대학 교수 외의 다른 직업에는 대체로 안식년 같은 좋은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필요하지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보통 사람이 현실의 삶에서 겪어야 하는 가슴 아픈 역설이다.


이번 12월은 내게 한시적으로 칩거가 허락되는 달이다. 칩거를 하면서 나는 예전에 바쁘다는 핑계로 등한시했던,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일들을 실컷 하고 있다. 이 시간들이 너무 좋다. 영영 지나가지 않기를 바랄 정도이다. 하지만 언젠가 칩거의 시간은 끝나고, 다시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미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소중한 칩거 생활을 실컷 즐기려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