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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quaviT Apr 28. 2016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스페인 -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은, 어제보다는 훨씬 여유로웠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고 난 이후에도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 바르셀로나 대성당 주변의 시장, 그리고 몬주익 언덕까지. 모두 주파한 뒤라 사실 남은 볼거리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걸어 다니느라, 내일 못 일어나는 거 아닐까 걱정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열 시 즈음 눈이 떠졌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에서 몬주익 언덕을 걸어 올라가는 건 미친 짓이라는 정보글을 본 것 같은데, 전혀 아니었다. 그냥 뒷동산 정도였다. 충분히 걸어 올라갈 만한 듯.


 

 일정의 시작은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넘어서는 전 세계 축구계를 레알 마드리드와 양분하고 있는 명문 구단,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프 누다. 발롱도르 5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네이마르, 수아레즈의 'MSN' 편대는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 패배해 탈락한 후였지만, 저녁에 발렌시아와의 프리메라 리가 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다. 그런 만큼 주변에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 날 저녁 있을 경기를 위해 경기장을 손질 중인 게 보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경기 전인만큼 선수들의 라커룸이나 기타 시설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인지 관람은 정말 금방 끝났다. 예상외로 빨리 끝난 캄프 누 투어 때문에 붕 떠버린 시간을 채우기 위해 지도를 펼쳐보았다. 근처에 가우디의 작품이 있다는 모양. 가보기로 했다.




  걸어서 십 분 조금 넘게 가면, Porta Miralles가 보인다. 사실 그렇게 특별한 건 없다. 그럼에도 가우디 특유의 방식이 잘 드러나 있기는 하다. 가우디 특유의, 뱀을 연상시키는 구물텅거리는 담장과 문이 꽤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사실 꽤 썰렁하다. 앞으로는 도로, 뒤로는 현대식의 빌라인지라 조금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뒤의 빌라가 너무 직선적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우디의 동상이 유난히도 쓸쓸해 보이는 건, 비단 혼자 서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가우디의 동상을 뒤로 하고, 또다시 십 분 남짓 걸으면 핀카 구엘(Finca Guell)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서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는 용이 인상적인 곳으로 '구엘 별장'이라는 뜻인데, 오후에 찾아가기로 한 '구엘 공원'과는 또 다른 곳이다. 여기도 구엘, 저기도 구엘이다. 도대체 구엘은 뭘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우디의 '스폰서'다. 벽돌 회사 사장이자, 무역으로 곳간을 그득 채운 잘 나가는 사업가, 구엘. 구엘은 당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인 가우디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그렇다. 정말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사달라는 대로 다 사줄게'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결론은, 가우디는 천재이기도 했지만 운도 따라줬다는 이야기다.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천재는 살아생전 자기 작품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친동생 테오 정도 빼면 거의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지만, 인생이라는 게 참 불공평하다. 후세에는 같이 '천재'소리를 듣는 이들이지만, 생전에 받는 대접은 정말 많은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천재들도 대접을 박하게 받는 이가 있고 후하게 받는 이가 있다는 게, 천재가 아닌 보통 사람인 나로서는 좀 야속하게 느껴진다. 왠지 용이 '일단은 걔네들처럼 열심히 살아보고 그런 생각을 해 봐'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좀 찔렸다.





  또 남은 곳은 어디일까. 지도를 여기저기 보니,  한 군데 보인다. Arc de Truinfo. 동명의 지하철역에서 내려보니 코앞이었는데,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뭐 유명한 게 있길래 그럴까, 하는 생각에 가 보니 시장이 서 있었다. 이런 우연의 선물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자유로운 발걸음이 인도한 곳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시장에서는 다양한 수공예품부터 갖은 음식까지, 상당히 다양한 걸 팔고 있었는데, 고양이에겐 생선만 눈에 보이는 법. 그중에 눈에 띄는 건 수제 맥주였다. 우리나라에서도 '크래프트 비어'가 나름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병입 되어 판매되는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병입 해서 판매하는 게 꽤나 자연스러운 일인 듯했다. 상당히 다양한 수제 맥주 부스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다 마셔볼 수 없었던 게 못내 아쉽다. 


 



  그러고 보면, 스페인의 크고 작은 도시마다 수제 맥주집이 한두 군데씩은 있었던 게 기억난다. 혹은 지역 맥주가 있기도 했고.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소주의 종류가 다르긴 하지만, 이제는 다소 '공산품'의 느낌이 너무 강해져 버린 소주뿐만 아니라 막걸리를 비롯한 지역 전통주도 각 지자체에서 관광상품으로 개발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맛이나 향처럼 새로운 '감각'들을 깨우는 데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좋은 술은 그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술의 색과 향, 맛, 입 안에서의 질감, 그리고 여운에서 오는 만족감. 좋은 술과의 만남은, 언제나 여행을 좀 더 만족스럽게 만들어준다.





  제정신으로 구엘 공원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만 마신 후, 지하철을 타고 마침내 어제는 밟지 못한 곳을 밟기 위해 왔다. 구엘 공원의 트레이드마크인 독특한 지붕이 보인다. 구엘 공원은, 사실 구엘이 완성을 보지 못한 곳이다. 1984년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는 재미없는 설명을 곁들이지 않아도, 사진에서 보이는 독특한 모양의 지붕과 분수로 많은 여행객을 잡아끄는 곳... 이라지만, 사실 이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투덜대고 있었다.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모자라 입장료도 8유로나 한다니. 뭐가 이리 까다로운지. 



 



  구엘 공원의 측면 입구로 들어서자, 낯설면서도 낯익은 모양새의 기둥이 주욱 늘어선 게 제일 먼저 보였다. 나무를 연상시키는데, 돌로 만들어졌고, 떠받치고 있는 녹색 숲과 어우러져 꼭 아주 오래된 - 어쩌면 공룡 시대의 - 원시림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주변을 걷고 있는 사람들 덕분에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기둥들. 이질적인 자연스러움, 혹은 자연스러운 이질감. 그런 것이 가우디의 작품에는 있다. 





 원시림처럼 펼쳐진 기둥들을 지나면 나타나는 탁 트인 광장 아래로, 구엘 공원의 쌍둥이들이 보인다. 소보루빵 같은 울퉁불퉁한 얼굴에, 꼭 하늘에서 구름이 떨어져 그대로 녹아 붙은 듯 하얗고 매끄럽고 올록볼록한 지붕. '동화 속에 나올 법한'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조금 마니악한 동화에 나올 법한 건물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묘사하기가 굉장히 부담스러우리만치 웅혼했던 반면에, 구엘 공원의 이 두 집은 훨씬 더 편하고 재미있게 상상력을 뻗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구엘 공원을 보는 내내, 어렸을 때 자주 꿨던 총천연색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총천연색 꿈나라에는 꽤 귀여운 녀석이 살고 있다. 용이라고는 하는데, 누가 봐도 그냥 알록달록한 도마뱀에 가까운 녀석이 침을 흘리고 있다. 구엘 공원이 1914년에 완공되었으니, 어느새 100년 넘게 저 자세로 분수에 잡혀서 침을 흘리고 있는 셈. '원시적'인 느낌을 주는 돌기둥, 그리고 '원초적'인 느낌을 주는 두 집 사이에 있는 이 도마뱀은, 그 색채와 형태로 구엘 공원에 방점을 찍는다. 원시적인 파충류가 띄고 있는 원초적인 색채.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달랐던 두 가지 느낌은 이 녀석 덕에 '세련미'로 합쳐진다. 물론 이건 미학의 'ㅁ'도 모르는 내가 받은 느낌이니, 그냥 그렇구나, 하며 봐주셨으면 좋겠다. 



  구엘 공원이 어둠을 맞을 준비를 한다. 낮동안 유난히 푸르렀던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쏘아댔던 빛들을 거둬들인다. 조금 더 지나면 총천연색의 꿈나라는 천천히 검은색으로 변해, 아주 깊은 잠에 빠질 것이고,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꿈을 꿀 것이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잎을 머리에 이고 있는 돌기둥 사이로 화려한 도마뱀 한 마리가 거니는, 그런 꿈을.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저녁, 그리고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저녁. 이제 구엘 공원의 두 건물은 우리를 배웅하며 흔드는 흰 손수건처럼 보이고 있었다. 잘 가요,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안녕. 


  그래, 안녕, 구엘 쌍둥이.

  안녕, 바르셀로나.

  안녕,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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