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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quaviT Apr 24. 2016

단어의 무덤

스페인 - 바르셀로나

  


  굉장히 오랜만에 키보드 앞에 앉았다. 그동안 기다리셨던 분들을 위해서 사정을 말씀드리자면, 쓸만한 여건이 안 나왔기 때문. 이미 바르셀로나를 떠나고 국경을 건너 프랑스 툴루즈를 거쳐 보르도에 있는데, 이 사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바르셀로나의 호스텔은 시설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는데 방 안에서는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았다. 잘 잡히는 곳은 태블릿을 충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바르셀로나를 떠나 툴루즈에서 처음으로 카우치서핑을 해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와이파이는 없었다. 그런 고로 보르도에서, 유난히 날씨가 좋지 않은 날 드디어 와이파이를 잡아 키보드를 마주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마셔본 총알 모양 에너지 드링크. 그러고보면, 스페인 사람들은 에너지 드링크 참 좋아하는 듯.


  

  위의 다소 구구절절한 이야기에서도 드러났듯, 바르셀로나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었다. 볼 게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페인을 넘어 전 유럽, 아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여행지인 바르셀로나. 그런 상황이 오히려 여행객에게는 다소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다. 언제나 사람이 많은 만큼 호스텔을 비롯한 숙소도 많지만, 그 숙소들 대부분이 성수기, 비수기 구분할 것 없이 예약이 가득 차있다. 좀 외진 호스텔은 그나마 덜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가격이 싼 편은 아니다. '조금 큰 도시이긴 해도, 리스본이나 마드리드, 포르투도 그냥 숙소 예약 안 하고 갔는데 바르셀로나라고 뭐 다르겠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에게 따귀를 때릴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달랐다. 확실히.



카탈루냐 독립 홍보 포스터. 카탈루냐 지역이 스페인과 사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바르셀로나의 숙소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이미 '꿀 자리'에 있는 숙소들은 예약이 다음 달까지 들어찬 상태(말이 그렇다는 거다)였기에, 바르셀로나 상트(Sants) 역에서 지하철 타고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숙소를 찾았다. 그나마 지하철 역이 코앞이라는 건 좋지만, 방 안에서는 연결할 수도 없는 와이파이에 타월 및 조식은 미포함인 주제에 가격은 또 더럽게 비쌌다.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이라면 바르셀로나 갈 날짜 정도는 확실히 받아놓고 좋은 호스텔을 골라 예약하시는 편이 좋을 것이다.


  두 시에 잠들었는데, 여덟 시에 눈이 떠졌다. 숙소비가 비싼 탓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서 바르셀로나에 3박 4일, 사실상 2박 3일만 할애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일찍 일어나서 일찍 움직여야 했다. 오늘 일정의 시작은, 숙소에서 걸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까지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걸어다니면서 만난 것들. 호날두 유니폼도 팔고 있는 게 의외였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다. 지금 와서 간신히 궁색한 변명을 생각해보자면, 뭔가 순례자의 기분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마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카메라 하나, 지도 한 장을 들고 길을 나섰다. 길을 잘못 들어서 몇 번이나 되돌아 갔다가, 되돌아 간 길도 틀려서 또 다른 길로 갔다가 마침내 맞는 길을 찾은 게 몇 번째일까. 저 멀리, 하늘로 솟아오른 옥수수들 같은 모양새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착점을 눈에 담게 된 마라토너의 심정이 그랬을까. 한적한 건물들을 내리 2시간 가까이 보다가, 마침내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이 곳은 바르셀로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진만 보고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저 먼 곳까지 가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골목 하나를 돈 순간이었다. 가드를 내린 순간 꽂히는 노련한 복서의 훅처럼 묵직하게 와 닿는 한 방이, 그렇게 갑자기 나타났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다. 바르셀로나에 발 들이길 소망하는 이들이 가장 뵙고 싶어 하는 존안, 그것이 내 앞에 자태를 드러내는 순간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냥 입을 벌리고 바라보기만 하면 됐다. 하늘을 찌르고 있는 종탑들의 꼭대기를 일일이 바라보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주변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을 뚫고 들어가서 입장 티켓을 사려고 하니, 다음 입장은 오후 4시 가까이 되어서야 가능하단다. 참고로 이때의 시각은 11시 즈음. 세 시간 정도가 붕 떠버리자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사실, 좀 멀다) 구엘 공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헤매다가 삼십 분만에 도착한 구엘 공원. 그러나 여기는 다음 입장은 다섯 시부터. 심지어 그게 마지막 입장. 멘탈이 붕괴된다는 표현은 이 때 딱 맞다. 사실 누굴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약하라고 홈페이지도 만들어 놨고, 심지어 온라인 예약을 하면 더 싼데도 그걸 모르고 그냥 털래털래 온 내가 잘못이다. 하지만 당시엔 그러거나 말거나 완전히 멘탈 붕괴였다. 내가 내 돈 내고 들어간다는데 왜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거지? 하는 짜증뿐.



여기까진 들어가볼 수 있었다. 



  십 분 정도 그늘에서 쉰 후, 어느 정도 조각난 멘탈을 짜 맞추고 내일(일요일) 티켓을 예매했다. 혹시 모르니, 비교적 늦은 시간인 오후 6시 반 티켓을 예매. 또 헤매다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향해보니 어느새 입장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들어간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 그저, 엄청났다.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하늘에서부터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종유석처럼 솟아오른 네 개의 종탑, 그리고 예수의 탄생을 다룬 '탄생의 파사드'를 지나 들어선 성당의 안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뚫고 부서지는 것처럼 쏟아지는 빛들로 가득 물든 곳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 그냥 정말 특별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여느 성당과 비슷한 듯도 하면서, 여느 성당과도 달랐던 그 안에 내 발소리가 울리는 순간은 그랬다. 







  하늘까지 이어져있을 것처럼 서있는 수많은 열주들, 그것들이 떠받치고 있는 천장, 그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탄성, 그리고 빛, 빛, 빛. 빛이 부서져 들어오고 있었다. 빛이 공간을 완성시킨다. 서늘한 어둠에 형형색색으로 쏟아지는 빛들이 섞여드는 순간을 마주한다. 유난히도 더웠던 낮동안의 헛걸음 덕에 가득 쌓였던 짜증이 일순간 녹아내렸다. 아니, 사실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마주한다고 해도 같으리라.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지금까지 만나보았던 어떤 건물과도 달랐다. 이 웅혼한 건물이 아직도 공사 중이라는 것, 10년 정도가 더 걸린다는 것. 완공되는 순간을 지켜볼 사람들이 벌써부터 부러웠다.






  개인적으로 'A에 가면 B를 꼭 봐야 한다'는 식의, 여행 대법관이 된 듯한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 바르셀로나, 아니 스페인을 방문하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바보 같은 일이다. 사실 덩치가 덩치이다 보니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다소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더라도 그 안까지 꼭 볼 것을 권한다. 가우디의 건축은 그저 외관의 특이함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알 수 있다.





  탄생의 파사드, 즉 입구의 맞은편에는 후면이자 공사 중인 '수난의 파사드'로 나가는 문이 있다. 수비락의 조각으로 완성되고 있는 부분인데, '탄생의 파사드'가 가우디의 유려한 - 자세히 보면 조금 그로테스크하기도 한 - 조각으로 채워져 있는 것과 반대로, 수비락의 조각은 상당히 직선적이다. 생전에 직선을 매우 혐오했던 가우디의 성향을 생각해본다면 아이러니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수비락의 조각은 예수의 수난을 상당히 잘 드러내고 있었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는 이야기다). 




  

수비락의 조각은, 거칠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저기 각이 지고 거친 그의 조각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의 수난을 보여준다. 이런 방식을 가우디가 바랐을는지는, 그리고 가우디가 맡은 '탄생의 파사드'만큼의 감동과 전율을 이 '수난의 파사드'에서도 사람들이 느낄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비락의 조각이 예수의 수난을 잘 보여주고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파사드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현양된 십자고상을 바라볼 때만큼은 오로지 나만 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꼈으니까.





  '탄생의 파사드' 왼편으로는 지하실이 뚫려있는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건축 원리 및 원안 스케치, 진행 상황 등을 전시해두었다. '여기 전시관 있어요! 들어오세요!' 하는 큰 표지판이 따로 없어서, 눈치 못 채고 그냥 나가는 사람도 있을 법했다.



  



    건축 원리도 여러 구조물을 전시해두고 공을 들여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 쪽으로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어서 큰 감흥은 없었다. 이 전시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 모습을 만들어놓은 모형이었는데, 크기가 상당히 컸고, 또 정교했다. 그런데 이 모형마저도 공사 중 - 즉, 미완인 점이 의미심장했달까. 일부러 완성을 안 한 것인지는 몰라도, 모형조차도 공사 중인 거면 도대체 나중에 완공되면 얼마나 크다는 거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공사 중인 모형. 



    바르셀로나의 하늘이 조금씩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조금은 고집스럽게 제 색을 지키고 있지만, 점차 주홍색으로, 그리고 어둠으로 물들어가겠지. 야경도 멋지겠지만, 남은 일정이 있었기에 발을 돌려야 했다.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 찬 주변을 헤치고,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인 카자 밀라와 카자 바트요를 보러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한참 동안이나 보이다가,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예수에게 바쳐진 것 중에 가장 화려한 왕관,

  가우디의 꿈이, 열정이, 그리고 그 자신이 잠들어있는 곳.

  아직 나의 글과 말로는 채 다 묘사할 수 없는, 어떤 단어들조차 빛이 바래는 단어의 무덤.

  어쩌면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우리 시대의 낭만.


  그곳엔 오늘도 망치질 소리가 쌓여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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