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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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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Jun 29. 2020

옆집 부엌에도 아직 불이 켜져 있다.

이 길의 끝에 별다를 게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을 때.

"하."

 하루 일과가 끝나고 고무장갑을 뒤집어 탁탁 물기를 터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깊은숨이 터져 나왔다.


 결혼 후 유학을 원했던 남편의 꿈을 따라 갓 한 살 된 아이를 데리고 캐나다에 왔다. 교사 5년 차. 모든 것을 내려두고 내 인생 처음으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이 없는 주부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초라하게 느껴졌다. 석사학위를 받고, 이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남편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꼬였다. 나만 멈춰있는 것 같아 억울했다. '나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느새 주부로서 보낸 세월이 내 교사 경력을 넘어섰다. 나조차 내 인생이 의심스러웠다. 의심은 두려움을 불러왔다. 이 길의 끝에 별다를 것이 없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어느 때고 나를 찾아와 내 하루를 흔들었다. 6년 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캐나다에 왔던 우리의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이뤄놓은 것 없이 돈과 시간을 낭비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두려움은 부부가 함께 꾸었던 꿈도 잠식시키곤 했다. 우리가 이 길을 시작할 때 무엇을 바라며 두 마음을 하나로 모았는지 흐릿하게 했다. 미워하고 탓할 곳이 필요할 때마다 남편을 괴롭혔다. 괴롭힌 후에는 오히려 내 마음이 더 괴로웠다. 마음속에 미안함과 원망이 서로 팽팽하게 줄다리기했다. 양쪽에서 힘껏 당기다 결국은 끊어져버린 줄처럼 자괴감에 너덜거렸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못 된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곤두박질쳤고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지 몰라 괴로워했다.


 아이들은 잠들고 모든 집안일을 끝냈던 어느 고단한 밤, 고무장갑 탈탈 털어 말려두니 드디어 육아 퇴근 전 마지막 한 가지 일만 남았다. 서둘러 음식물쓰레기봉투를 정리한다. 봉투에 가득 차 질질 흘러내리는 음식물쓰레기가 내 마음 같아 더 애써 질끈 묶었다. '끝이다.' 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9시면 고요해지는 캐나다의 밤. 불 켜진 곳 하나 없이 적막하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캐나다의 밤은 무섭도록 새파랗고 까맣다. 밤하늘을 뒤로하고 서둘러 음식물쓰레기를 내놓고 들어가려다 예상치 못한 것이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온통 새까만 골목에 우리 집 부엌처럼 아직 불이 밝혀진 곳. 옆집 친구네 부엌.


 옆집에 사는 캐네디언 가족은 우리 가족과 공통점이 많다. 전업주부 엄마와 일이 바쁜 아빠. 그리고 어린 두 아이들의 나이까지. 언젠가 나란히 앉아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던 날을 떠올려본다. 아이들이 다 커서 엄마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는 때. 그때가 되면 자기는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냐며 고민하던 친구의 얼굴이 생각난다. '나는 이제 다 끝났는데 너는 아직 부엌에서 뭐하니, 친구야.' 한참 서서 그 불빛을 바라본다. 우리 집 부엌 옆에 나란히 불을 밝힌 그 부엌이 애틋하고 고맙다.


 나의 밤, 나의 창문에는 내가 걷는 길을 향한 의심과 치열하게 싸우는 내가 있다. 이유를 모르는 경주마처럼 러닝머신을 위를 달렸던 나. 그러다 숨이 가파르게 차오르면 가슴속 깊이 숨어있던 한숨도 함께 비워버리려 더욱 거칠게 숨을 내쉬었던 나. 도망치듯 차에 올라타 탁! 닫히는 문 소리에 그제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나. 다 울고 나서도 아직 풀리지 않는 마음을 안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달음박질하듯 운전하던 나. 우연히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를 듣다가,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있다. 바람에 흩어져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 간다.'라는 가사. 그 가사 두 줄이 내 마음속 두려움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은 것 같아 와르르 무너져내려 주저앉고 말았던 나.


 블라인드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두 부엌을 바라보며 한국의 밤을 떠올려본다. 건물마다 가득했던 수많은 불빛들은 회사원의 야근, 수험생의 고단함, 젊은이들의 유흥, 어쩌면 방황. 그 불빛 아래 모두 어떤 마음을 품으며 살고 있을까. 혹시 누군가는 나처럼 그 길의 마지막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길 끝에 선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의심하면서. 혹시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아닐까 봐 자꾸만 뒤돌아보면서.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처한 환경에 따라 주어진 주제가 다를 뿐,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에 물음표를 달며 살아가니까. 그 무수했던 밤에도 내 부엌의 빛을 밝히며 나의 삶을 살아냈듯이, 한국의 밤을 밝히던 그 수많은 불빛 아래 저마다의 물음표와 싸우며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어느 날 아침, 집 앞에서 옆집 친구를 마주쳐 그 날밤 이야기를 했다. 나 요즘 너무 힘들었는데 너네 집 부엌 도 불이 켜져 있어서 정말 위로가 되었노라고. 그리고 내 온 맘 다해 너의 밤도 응원했노라고.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난 두 여자가 잘 통하지 않는 언어로 나눈 대화지만 곧 서로를 향한 눈이 애틋해진다. 서로의 밤에, 서로의 불빛 아래 어떤 마음이 스쳐갔을지 말하지 않아도 아니까.


 다음 날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문 앞에 작은 꽃 화분이 놓여있다. 옆집 친구가 울고 있는 둘째를 안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보고 눈을 찡긋한다. 일단 "Thank you!" 하고 들어와 카드를 펼쳐보고 눈물이 왈칵 났다.

 "You are an amazing mom. You are doing important work!"

(넌 멋진 엄마야. 넌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이 흔한 말이 이렇게 위로가 될 일이라니.


 나와 같은 빛을 밝히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친구의 작은 쪽지에 나조차 의심하던 내 인생이 꽤 괜찮은 인생이 된다. 우리 부부가 꾸었던 꿈을 아른하게 하던 두려움을 떨쳐 내게 한다. 나와 당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며 힘주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서로의 불빛을 바라보며 힘을 내자.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의 불 켜진 밤이 있다.

옆집 친구가 두고 간 화분과 쪽지. 나조차 의심하며 두려워하던 내 인생에 힘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소중한 쪽지다.
이 가족이 옆집에 살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 번쯤은 다 때려치우자는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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