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지 말아 주세요.

[셋째 날의 문] 기집아이가 할 수 있는 것.

by 일라

There was no possibility of taking a walk that day.

’그날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제인 에어, 1847>


책이 좋다. 책 속에는 나갈 수 있는 세계가 열린다. 참 다양한 세상이 존재한다. 치마를 꽃봉오리처럼 봉긋하게 띄어 입는 영국 귀족 가문 여자, 평민 여자임에도 작가를 꿈꾸는 제인. 책장을 한 겹 한 겹 넘길 때마다 나는 그 세상 속에 빠져들었다. 함께 드넓은 초원을 달리고, 엽서에나 나올 것 같은 절벽 아래, 철퍼덕철퍼덕 파도가 춤을 춘다. 어느 날 밤엔 통나무로 된 작은 오두막에서 잠들었고, 다른 날 밤엔 방이 샹들리에 수만큼이나 많은 큰 궁궐에서 잠들었다. 그 속에서는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비록 방 문 앞에는, 책, 회초리, 몽둥이가 날아다니고, 손이 철썩철썩 뒤통수에 휘둘리더라도. 난 책 안에 숨어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떠한 모습이든, 책은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을 좋아해서 좋은 점이 있다. 국어랑 영어가 쉬웠다. 친구들은 시험에 나오는 단어의 뜻, 문제의 출제의도를 이해 못 할 때가 많았다. 나는 달랐다. 시험 의도는 명확했다. 책은 훨씬 더 많은 의도로 쓰인다. 저 여자의 입장에서는 방패인데, 반대편 남자의 입장에서는 꽃다발이다. 어렵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었다. 그렇게 국민학교 첫 시험이 끝났다. 9반 전체 남자아이가 훨씬 많았는데, 내가 1등 했다. 처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이 콩콩 거렸다. 슈퍼에도 들리지 않고, 삐약삐약 샛노란 병아리가 놀고 있는 아저씨네도 지나쳤다. 왼손에 성적표를 꼬옥 붙들고.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며 부엌에 있었고, 아빠는 운동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나 일등 했어!!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어. 전교생 앞에서 상장도 줄거래.”


엄마가 가스불을 껐다. 곰국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 불을 껐다. 곰국은 오래오래 진하게 끓이는 건데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앞치마에 손을 닦고 내 성적표를 넘겨받았다. 운동 샤워가방을 챙기던 아빠가 다가왔다. 갸웃갸웃 거리는 얼굴로. “진짜 니가 1등이야?” 국영수사과. 이 다섯 과목 (수). 47명 중에 일등이다.

“와, 대단하네. 내가 니 성격 더러울 때부터 알아봤다.”


늘 쓰던 아빠의 기집아이였는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칭찬하는 걸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날, 엄마 아빠는 싸우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평범한 일상이 뒤엎어졌다. 공부는 평화로운 침묵의 조건이었다. 저녁을 먹고, 엄마 아빠가 산책을 다녀왔다. 아빠의 오른손에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뚜레쥬르 과일 생크림 케이크 1호’.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라니! 뽀얀 하얀 크림 위에, 조그마한 빵가루가 토도토도 모래처럼 뿌려져 있다. 그 속에 딸기, 포도, 귤. 시럽에 별처럼 반짝 반짝였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내 케이크.


마치 동화 속 소녀 같았다. 따듯한 가정에서 자라, 어여쁜 시폰 드레스를 입고, 하늘하늘한 레이스 리본을 머리에 묶은 채, 태어남을 축복받는 주인공.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비슷했다. 이때부터, 나는 행복하거나, 좋은 일이 있거나, 너무 우울해서 행복해지고 싶은 순간, 작은 생크림 케이크를 사게 되었다.

가느다란 핑크색 초가 놓였다. 엄마가 밝은 표정으로 불을 붙였다. 소원을 빌라고 했다. 잠시 망설이다 후- . 촛불은 내가 불었는데, 소원은 아빠가 빈다. “그래, 다음에는 전교 1등 해라.” 글쎄, 그건 아마 못할 것 같다. 하고 싶지도 않다. 내 소원은 다르다. 엄마, 동생, 그리고 내가 덜 맞는 것. ‘안 맞는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평범하지 않은, 오늘 같은 날을 더 만들 수 있게. 제가 버틸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주세요.


그날 이후로 나는 알았다. 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내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울지 않는 법도, 문을 열고, 나가는 법도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기집아이가 되는 것. 시험 성적으로 칭찬받는 아이가 되는 것. 그리고 법학과를 가는 것. 그게 이 공간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나를 얼마나 오래 붙들어 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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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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