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의 문] 가장 안전한 장소. 공부.(1)
‘學, 배울 학‘
’지붕 아래, 아이가 누군가의 손을 보고 따라 하며 배우는 모양‘ 보호된 공간 안에서, 혼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익히는 글자.
하지만 나에게 학은 달랐다. 학은 공부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든 지붕이었다.
초6, 중학교 선행학습을 하고 있다. 국영수 못하는 것은 없었다. 사실 나는 수학을 정말 못했는데, 잘하는 척했다. 신기한 게 똑똑한 척하니까, 사람들이 똑똑하다했다. 외국 한번 간 적 없지만, 발음을 잘하는 척했다. 그랬더니 외국에서 살다 왔냐고 했다. 아마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머리가 좋지 않은 내게,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래 앉아있기. 그리고 끝없는 반복.
잠들기 전까지 책상에 붙어 있었다. 엉덩이를 최대한 오래 붙여 집중을 한다. 무작정 앉아서 하지 않았다. 스탑워치를 샀다. 오로지 집중하는 시각을 찾았다. 처음에는 충격적 이게도 35분. 60분을 앉아있으나, 집중하는 시간 35분. 밀도가 낮았다. 공기 반, 소리 반. 소리가 더 필요했다. 연필을 깎거나, 물을 마시거나, 책상 정리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쉬는 시간에만 가능했다. 연비가 좋지 않은 차가 최대한 효율을 낼 수 있는 지점. 50분 공부하고 10분 쉬기. 그 시간만은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나만 그런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다. 단지 도망치지 않고, 버티는 방법으로 익혔다.
”내가 한다면 하는 거, 어디 하늘 같은 지아비한테!“
“ 애 공부한다. 3주 뒤에 시험인 거 모르나! 중학생 된다!!”
안방 문이 닫혔다. 엄마아빠의 데시벨이 낮아진다. 엄마 방패가 하나 생겼다. 공부 잘하는 딸의 시험기간. 아빠는 멈칫했고, 거실에서 방으로 이동하던가, 목소리를 낮추려고 했다. 물론 공부를 잘한다고 기집아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부가 날 살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아빠. 어느 순간 자랑할 대상이 나 밖에 없었다. 기집아이가 공부를 꽤 잘하더라고. ‘학교에서 1등이야 ~’. 동료 교수들은 늘 본인 닮아서 딸도 영특하다고 했다. 아빠의 어깨는 올라갔고. 동료들에게 말하는 내 명칭이 조금씩 바뀌었다. 기집아이, 계집년에서 딸년, 그리고 딸내미. 딸내미는 맞지 않느냐고? 어림없는 소리.
“이번 시험 못 치면 아빠가 책임질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으면, 좋은 핑곗거리가 생기는 거다. 배울 학. 시퍼렇게 멍든 오른쪽 허벅지를 문지르며 다시 집중한다.
영어는 늘 주어가 나온다. I, You, We. 그런데 집에는 I가 없었다. You 단어가 보이면 생각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타날까. 나 말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릇이 깨졌다. 얼음 가는 하늘색 펭귄 기계가 부서졌다. 얼음이 쏟아진다. 영어 단어를 외웠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이 문을 열고, 저 사람을 막아줄 사람이 있을까. 아빠보다 더 세고, 강한 사람이 나타나서. 기도했다. 기도 같은 거 안 했는데, 교회 다니는 친구에게 성경을 받았다. 그 성경 페이지에 이 말씀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종교가 없다. 정확한 글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의미였다.
“모든 신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고통과 시련을 준다. “
내 주특기는 버티는 것이다.
버티는 아이는 울지 않는다. 다만 오래 남는다.
아주 가끔은 견딜 수 있는 이상이다. 그럴 때마다 남들이 다 자는 새벽까지 꾹꾹 버텼다. 아빠가 잠들 때까지. 다른 소원을 비는 이가 잠들 때까지. 그리고 빌었다. 아무도 소원을 빌 수 없는 시각에 나만 빌고 싶었다. 내 목소리가 조금 더 잘 들리게. 조그만 아이라서 혹시나 더 멀까봐. 조금이라도 잘 들리시라고.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당신이 있다면, 무슨 신이든 상관없으니 나를 구해달라고. 구해주면 나 평생 믿고 의지 하겠다고.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누구도 없었다.
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나를 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문을 더 세게 붙잡았다.
아직은, 그 문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으면서.
———————-
이 이야기의 문은 아직 다 닫히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문이 있었나요.
금주 병원 일정으로 토요일편을 미리 업로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