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지 말아 주세요.

[넷째 날의 문] 가장 안전한 장소, 공부. (2)

by 일라

툭, 투둑. 뚝. 뾰족했던 연필이 뭉개졌다.


꾸욱 눌러쓰던 글씨가 툭 하고 번져버렸다.

마치 잔잔한 파도에 물방울이 하나 퍼져나가는 것처럼, 연필심이 하얀 공책을 물들였다.


새벽 세시. 맞은편 아파트 불이 하나둘씩 꺼진다.

놀이터의 미끄럼틀, 하루 종일 운동했을 그네, 길마다 놓여있는 가로수도. 잠이 든다. 바람이 지나간다.

시원한 바람이 일렁거린다. 여린 풀잎, 반듯한 나무, 곤히 잠든 새를. 조심스레 안아 들며 지나간다.

감히 잠들 수가 없었고, 잠들기 싫었다.

하루 중,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에.


중학교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수학문제를 외운 공식으로 푼다. 친구는 마치 떠오르는 영감처럼 풀었다. 어긋난 줄을 다시 세우는 것처럼, 쉬어 보였다. 나는 영어 단어를 외우고, 테이프 속 외국인을 따라 말했다. 친구는 호주에 살다 왔다. 그냥 외국인이다. 초등학교와 다르다. 처음 느꼈다.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 누구나 아는 것처럼,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다행히 절망할 틈도, 포기할 수도 없다. 힘들어봤자다. 기집아이의 공포에 비하면. 평범했다.흔들릴 수 없다. 더 단단해져야 했다. 그날도 어느 때처럼 9시 뉴스를 틀어놓고 싸우는 엄마 아빠에게 말했다.


“나 수학, 영어 과외 필요해. 시켜줘. “


아빠는 뉴스의 볼륨을 줄였다. “과외? 중학생이 벌써 과외를 해야 하나?” 나는 대답했다. 중학생이 다 하는지는 모르겠다. 높은 성적을 위해 수학은 꼭 필요하고, 영어는 붙여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빠는 흔쾌히 오케이 했다.


기집아이한테 쓰는 돈, 쓰는 만큼 나온다며.

나는 아빠를 벗어나기 위해서,
아빠를 이용해야만 했다.


가진 것 없는 학생은, 중학생인 것처럼 행동했다.

하필 생리를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춘기가 왔을 타이밍. 친한 친구는 가족이 꼴 보기 싫다 했다. 집에 혼자 있고 싶다. 아빠가 친한 척해서 짜증 난다 했다. 과일을 깎아주고 필요한 것 없냐고 물어본다고. 나도 끄덕이며, 그렇다 했다. 하지만 더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잠이 오면 내 살을 꼬집었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버텼다. 정말 졸릴 때가 때때로 온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나만의 비밀 레시피가 있다.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준비물은 뾰족한 은빛 바늘 하나. 가늘수록 좋다. 안쪽 허벅지를 찌른다. 잠이 오면 더 깊게. 꾸욱 눌렀다. 보이지 않는 곳일수록 좋다.


콕, 콕콕, 보랏빛 라일락 같은 동그란 멍이

툭, 툭툭 생겼다.


보라색은, 늘어날 때마다 잠을 잠재웠다.

잠들고자 하는 욕망을 줄였다. 본능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색은 다음 날 더 깊어졌다. 잉크처럼 번졌다.


가족은 늘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존재.

웃음이 빵 터진다. 마치 외국인이 농담했을 때, 이해 못 하면서 웃는 한국인처럼.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도통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른 시공간,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 시절, 제일 힘든 과목은 체육이었다.

앉아있는 것에 익숙한 나. 태권도는커녕, 수영도 해본 적 없다. 서울에 있는 대학, 특히 법학을 가려면, 내신이 골고루 좋아야 한다. 체육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중간고사는 배구.

두 팔을 앞으로 쭈욱 펼친다. 왼손과 오른손을 주먹 쥐고 붙여, 평행하게 만든다. 연속 15번이면 만점. 전교생 중, 회수가 가장 높은 단 한 명. 특별 가산점.

그날부터, 배구 특훈을 시작했다. 11시. 수학 과외가 끝난 시각. 공을 들고 놀이터로 나갔다.


공은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스피드, 노하우, 근육 따위 없다. 공은 술 취한 아이처럼 이리 튕겨나가고, 저리 튕겨나갔다. 나만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새하얀 눈처럼 하얗던 내 팔은 물들었다.

빨갛게, 파랗게, 그리고 끝내 보랏빛으로.

학교 친구들이 내 팔을 보고 수군거렸다.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더 활짝 웃었다. 밝게 이야기했다. 예민성 피부라 그렇다고. 재능이 지지리도 없는 난, 매일 2시간 공을 튕겼다. 아파트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다. “새벽 한 시다. 제발 잠 좀 자자!! “


죄송했다. 어쩔 수 없었다. 경비아저씨에게 사정했다.

팔 핏줄. 그 쯤이야! 오른쪽, 왼쪽. 허벅지는 이미 다 라일락이 피었다. 그에 비해 팔뚝은 평범했다.

마지막 시험날. 난 이를 악물고, 31번의 공을 쳐냈다.

체육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면담이었다.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이런 질문을 난생처음 받았다. 잘 이해를 못 했다. 핏줄이 곳곳에 터져, 헐크처럼 부어있는 팔을 보고. 선생님은 말했다.


“아니야. 이건… 괜찮은 게 아니야.”

우리는 자주 아픈 줄 알면서도,
이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저 1등 맞죠? 가산점 받는 거 맞죠? 저 1등 해야 해요.”


돌이켜보면 자해였다. 옷깃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부르르 떨렸다. 파랗고, 보랗고, 빨갛게. 놀이동산의 풍선처럼 부풀러 올랐다. 내 몸은 팔레트였다.


수채화가 온몸에 흩뿌려졌다. 저녁 내내 해맑게 웃었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제야 통증이 조금 느껴졌다. 선풍기 아줌마처럼 된 오른팔. 압박 붕대로 칭칭 감았다. 다음은 수학. 기출문제를 푸는데 팔이 스친다. 신경 쓰인다. 통증은 방해가 돼서 심통이 난다. 그깟 체육 때문에, 수학 문제 푸는데 지장이 생기다니! 말이야 방구야.

두 팔, 두 다리, 그리고 머리가 온통 피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혈관이 다 터지고 문드러졌다. 나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중3 마지막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내 인생 가장 강렬한 색. 그해는 보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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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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