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지 말아 주세요.

[일곱째 날의 문] 엄마라는 숙제

by 일라

엄마는

늘 한 손으로는 밥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처를 남겼다.


나는 그 두 손 가운데

어느 쪽으로도 엄마를 부를 수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학교도 꼭 한번 생각해 주세요.”


진학고등학교.

새로 생긴 멀고 낯선 학교의 선생님이 오셨다.

이번해 2기를 뽑는 신생여고, 서울에 대학 갈 수 있는

각 중학교 명단을 받은 것 같았다.

시골 동네, 우리 집에서 가장 먼 곳이다.

학교는 성적 장학금, 상위 10% 특별 수업, 독서실 운영.나를 붙들 조건을 제시했다.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여학생들은 안정적인 곳을 좋아하더라고요. 여고 2기라.. 그게 가장 큰 변수긴 합니다만. “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짐했다. 이 학교를 선택하기로.


나는 기집아이로 불리던 집에서 자랐다.
나는 기집아이들만 모인 곳을 골랐다.

남이 만든 기준에 들어가는 대신
나는, 내가 기준이 되는 쪽을 선택했다.


바닥을 기는 뱀. 혈통을 가진 뱀이 될지 잠시 고민했다. 대부분 혈통을 고른다. 역사와 시스템이 갖춰진, 기존 세력의 줄기에 따라 흘러가는 것. 하지만 난 흘러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모난 돌이라서 그런 걸까. 다른 이들처럼 사랑받으며 동글동글하게 살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었을까. 기존 체제에 순응하기엔 내가 버텨온 나날이 아까웠다. 혈통이 있는 길 대신, 나는 내 스스로가 혈통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여자라서 안정적인 곳이 적합하다는 말도 듣기 싫었다. 의지한 적 없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덕분에 스쿨버스로 2시간을 다니는 삶이 시작되었다.

등하교 시간은 참 길었다. 한 시간을 걸려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신경은 예민해져 있었다. 급식을 한 숟갈 뜨면, 그 국물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거리도, 급식도 맞지 않았다. 엄마는 고민하다, 고등학교 3년간 도시락을 책임져주기로 했다.


엄마는 끝내

나를 지켜주진 못했지만,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내가 버티는 길에 늘 끼어 있었다.


엄마도 아빠 못지않았다.

며칠 전 일 년 만에 엄마아빠를 보러 갔다. 아빠는 모처럼 보는 내게 “기집아이,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소리질렀다. 그 말은 평생, 나의 문을 세우고, 닫게 만든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이제 나는 돌아갈 내 집이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보겠다. ’


나는 말했다. 방금 푼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이 사람에게 버티는 것은 오늘로 끝내겠다.

캐리어를 다시 열고 옷가지들을 욱여넣었다.

정리할 시간은 없었다.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여러 번 무너졌던 날들도 같이 담았다.

이 방에 붙들려있던 나를 하나하나 뜯어내어 담았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손을 잡고 물었다.

이제 이렇게 가면 평생 인연 끊을 거냐고.

그럴 것이다 대답했다. 엄마는 한 템포 쉬고 물었다.

엄마도, 이제 안 볼 거가?

말문이 막혔다. 컥하고.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도 똑같이 했는데, 와. ”


대답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엄마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내 도시락을 쌌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밥솥에 쌀을 올렸다.

계란말이에 새우를 굽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물 반찬을 했다. 국 없이는 밥을 넘기지 못하는 나 때문에,

매일 다른 국을 끓였다.

순두부찌개, 바지락 된장국, 꽃게 된장찌개, 시래깃국.

친구들이 밥 하나 계란프라이 하나 들고 올 때.

나는 밥, 국, 반찬 4종이 늘 들어갔다.

반찬은 겹치지 않았고, 국은 늘 뜨거웠다.

친구들은 기대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매일 먹었다.

“야~ 오늘 반장 반찬은 뭘까나~.”


늘 새벽 6시 반 내가 집을 나설 때면, 엄마는 3단 도시락과 미피 보온통을 챙겨주었다. 전날 엄마가 아무리 맞든, 소리를 지르고 싸우든, 새벽 내내 잠을 못 들더라도. 엄마가 일어나지 않는 날은 없었다. 1,000일간 계속되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엄마는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나보다 늦게 일어난 날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못했다.
그걸 버리지도 못했다.
그 감정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하나로 부를 수 없었다.




엄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미워하지만은 않기로 했다.
엄마를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겨둔 자리였다.

그리고 그 모든 기준은
아빠 앞에서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


엄마도 똑같이 소리 지르고, 때리고, 집어던졌다. 특히 아빠에게 당하고 나면, 동생과 내게 화풀이했다.

하루는 얼굴에 직각으로 날아온 나무 막대기를 맞았다. 눈을 가까스로 비껴나가 눈썹에 맞았다. 아, 조금 따끔하네. 내 방에 걸어왔다. 문득 화장실 거울에 바라본 내가 조금 이상했다. 이마에서 눈, 코, 입까지. 검붉은 액체가 뒤덮고 있었다. 어느 초여름에 나오는 공포 영화 포스터 같았다.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마 살점이 없다. 어디 갔지. 뚝뚝 액체를 떨어뜨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날아온 회초리가 생각났다. 부얶에 걸어가니 던져진 회초리에, 뜯겨나간 내 살점이 붙어있었다.


차가운 얼음이 동글동글 담긴 컵 위로

검-붉은 액체가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피가 좀 나는데.”

내가 말했다. 동생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고, 엄마는 귀신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날 엄마, 아빠는 또 시끄러웠다. 주제는 ‘계집아이는 얼굴이 생명인데, 어떻게 얼굴을 건드냐’ 라는 것. 아빠만의 철칙 1순위. 남들이 알아보는 부위 및 얼굴은 손대지 않는다. 본인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아빠는 의사 인맥을 총동원했다. “최대한 줄여보겠지만, 성장할수록 얼굴 크기에 따라, 흉터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는 말했다.


눈을 뜨니 엄마는 내 옆에서 울고 있었다.

“엄마가 너무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행히 얼굴이 크지 않아,

흉터도 크지 않다. 자세히 보면 뭉툭하게 튀어나온 정도.

물론 엄마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그날 이후에도

엄마는 도시락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때린 날에도 다음날 도시락을 쌌다.

그건 매일 반복되는 약속 같은 것이었다.

새벽 4시면 고3도 누워있는 시각이다. 어느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국이 보글보글 끓고, 착착착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 6시 반. 교복 옷매무새를 마무리할 때면 여김 없이 건네주던 엄마의 도시락.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과 동그랗게 앉아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뜨거운 시래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을 한 숟갈 뜰 때면 마음이 이상해졌다. 늘 고심했던 것 같다. 나는 그걸 받아먹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는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2년이 넘게 지속된, 깊은 마음을 누군가에게 받아본 적 없었기에.



엄마는
끝내, 하나의 말로 불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며

한 학기 동안 친해진 친구들에게 문득 궁금해졌다.

“너희는 보통 얼마나 자주 맞아?”

그 순간, 수다쟁이 내 친구 네 명이 조용해졌다.

“야~ 반장 무슨 말이야. 뭘 맞아 요즘 세상에. “

한 친구가 대답했다. 다들 각자 한 번쯤 맞아본 이야기를 꾸역꾸역 뱉어냈다. 살면서 폭력을 당했던 순간을.

가출을 해서, 아버지에게 회초리 5대를 맞았다.

유치원 시절, 부모가 싸우다 접시가 깨졌다.

사람들은 그걸 가정폭력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가정폭력을, 하나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하루, 내 삶 전체였다.
그리고
그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무슨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연두색 새싹 같은 애호박 반찬 앞에서,

나는 젓가락을 놓을 수도 들 수도 없었다.


엄마는 유치원 때부터 나한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산다고. 다 똑같이 산다고.

내가 너무 힘든 날이면, 꼭 살아야 하냐고 물어볼 때.

엄마는 말했다. 모든 가족은 이렇게 산다고. 모두 맞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또 맞고 그렇게 산다고. 다 말을 안 할 뿐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겪는 줄 알았다. 가족이기에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날 나는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에 접속해 가정폭력을 검색해 보았다.

신체적 폭력 정신적 학대 경제적인 위협

각각의 예시를. 어느 한쪽에도 빠짐이 없었다.

동그라미가, 쳐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네가 맞을 일이 어디 있냐고 친구 한 명이 되물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더러운 성격에 내가 맞고 살겠어?”

그때 말했으면, 나는 달라졌을까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때의 나는 관계에서도 같은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나에게 사람은 문과 비슷했다.
나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눠놓고 살았다.
남겨둘 사람
끝낼 사람.


3년간 멈추지 않은 도시락은

둘 사이에서

끝까지 한쪽으로 정의되지 않았다.




그렇게 고2가 되었고, 어느날. 자습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날 조심스레 톡톡 치셨다. 잠시만 나와보라고.

아빠가 암에 걸렸다고 한다.

기출문제집과 급한 책 몇 개 챙겨 가방을 메고, 교복 매무새를 다듬었다. 선생님 차를 탔다.


놀라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은 알았다.

선생님이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차밖으로 지나가는

나무들과 작은 풀잎들을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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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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