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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의 문] 7살, 기집아이는 법학과를 가기로 결심했다.(1)

by 일라

달 월, 달 워어얼, 달 월’

삐뚤빼뚤하지 않게 써야지.

최대한 반듯하게, 나는 모범생이니까.


“내가 니 같은 기집년이랑 산다고. 어?!”

나는 한일 국민학교 1학년 9반 23번이다. 매일 학교를 다녀오면 11시 잠을 들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구몬수학 4장, 장원한자 3장 그리고 윤선생 영어를 끝내고 시험을 친다. 순서는 늘 동일하다. 하기 싫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영어는 좋아한다. 특히 리스닝을 하고 발음을 녹음해야 하는데, 그게 참 재밌다. 테이프에 멋들어지게 녹음을 하고 다시 들어오면, 개그맨이 따로 없다. 목소리도 억양도 너무 웃긴다. 그런데 한자는 다르다. 한국인인데 왜 한자를 해야 하지? 재미없다. 그냥 암기다. 글자마다 어원과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단순 외우는 것 그뿐이다. 엄마가 국민학교 들어가면 친구들이 다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하긴 초록반 가은이는 예전부터 한다고 했다. 그럼 질 수 없다.


‘달 월, 달 워어얼, 워어얼, 달 월…’

열 번을 써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 전에 엄마 시험을 쳐야 한다. 엄마가 총 분량 중에 몇 단어를 선택해서 낸다. 그리고 틀리면 엄마는 돌고래처럼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울그락부르락 원숭이처럼 소리를 지른다. 하필 나는 머리가 안 좋다. 하지만 해야 한다. 엄마가 소리 지르면 아빠는 더 화내니까. 587-129.. 정말 뺄셈은 말이야. 1 자릿수에 꼭 9를 넣는단 말이지.. 8 그리고.. 뭐지. 구몬수학 두 번째 장을 덮었다. 아빠는 손으로 엄마를 때리고 있었고, 3살 내 동생은 엄마옆에서 울고 있었다. 참 익숙한 풍경이지만 오늘은 유독 조금 더 심하다.


아빠는 청소기에 연결된 앞부분 막대기 부분을 분리했다. 그건 이제까지 때리던 손과 몽둥이와 달랐다. 어린 내 머릿속에도 ‘아 이건 아니다. 엄마가 죽겠다.’ 란 생각이 들었다. 그 몽둥이를 휘두르는 순간 나는 미친 듯이 거실마루를 달려 인터폰을 들고 112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며 아빠에게 소리쳤다. 내 작은 머릿속에는 아빠가 그러면 무서워하며 흠칫 놀라고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아빠는 씨익 웃었다. 정말 무서웠다. 소름 끼칠 만큼 무서웠다.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전화해 봐라. 그래 어디 해봐 계집년. 국민학생 니 말을 들을지, 대학교수인 내 말을 들을지.”


수화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2를 누르려던 난 버튼을 끝까지 누르지 못했다. 멈춘 이유는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경찰아저씨가 어린 내 말이 아니라, 대학교수 말을 들을 것 같았다. 고작 7살 말을 누가 듣겠는가. 그리고 결국은 지금보다 두배로 엄마가 더 맞을까 봐 그게 걱정되었다. 결국 끝까지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지금도 위급한 순간이 오면 무언가를 누르기 직전에서 멈춘다. 일곱 살의 나는, 끝까지 누르지 않고 버티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웠다.


삐…………..”

끝내 전화를 걸지도, 왼손의 전화기를 차마 놓지도 못한채로 멈추었다. 목덜미가 잡힌채 질질끌려갔다. 엄마가 쓰러져있는 부엌으로. 느지막이 오른쪽 거실 창문으로 해가 지고, 검붉은 햇빛이 거실바닥을 감싸 안았다. 그 색은 내가 처음으로 버티는 법을 배웠던 날의 색이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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