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들
강항(姜沆).
시대의 비극이 낳은, 한 장의 질긴 종이 같은 사내.
그는 타고난 기록자였다.
1567년에 태어나 1618년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삶은 비극적인 역사라는 성긴 삼베옷 위에서 꼿꼿이 돋아있는 한 올의 실과 같았다. 그는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그 강직한 자세와 깊은 생각에 잠긴 눈은 학자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던 다듬지 않은 칙칙한 베옷은 이미 닳아 빛을 잃었고, 그의 손바닥은 부드러운 붓이 아닌 거친 지도 위를 짚어가며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전라남도 영광의 억양은 그의 입을 통해 맑고 정갈한 소리로 흘러나왔으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이미 무너져버린 나라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단순한 관료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그의 생애는 훗날 적국의 땅에서 쓰여질 <간양록(看羊錄)> 이라는 운명적인 기록에 의해 완성된다.
그의 이야기는 1597년, 정유재란의 불길이 다시 조선을 덮쳤던 그해의 서늘한 가을로부터 시작된다. 5년 전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은 채, 왜적들은 다시 한번 조선의 심장을 향해 잔혹한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들의 공격은 특히 호남 지역을 휩쓸었고, 백성들의 삶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당시 강항은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휘하에서 호남 지방의 군량미를 모으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군분투는 왜적의 거침없는 진격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고, 곧이어 닥칠 비극은 그의 인간다움을 아득히 압도했다.
그는 군량미 수집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그의 몸은 전라도의 마을과 논밭을 쉼 없이 오가며 곡식의 양을 기록하고 백성을 설득했다.
하지만 햇살이 무심히도 쨍한 어느 날 오후, 임무를 거의 마쳤을 무렵 적의 선봉이 남원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전령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의 귀에 닿았다. 그 소리에 이광정 참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는 먼저 서울로 가겠소"라는 짧은 말만을 남긴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텅 빈 공간에 남겨진 강항은 깊은 실망감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떠안았다. 그는 홀로 순찰사종사관 김상헌(金尙寯)을 찾아가 의병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나라를 걱정하는 몇몇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수백 명에 불과한 그들은 낡은 무기만을 든 채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어쩌고..." 누군가의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강항은 그들의 눈에서 불타는 애국심과 동시에 가족에 대한 미련을 보았고, 그러한 미련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져 갔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모여들었던 백성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떨구고 발길을 돌렸다.[1] 강항은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손에 쥐고 있던 희망의 끈이 덧없이 끊어졌다. 잠시 가졌던 희망은 길 잃은 연처럼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강항은 가족들을 배에 태우고 서해를 통해 서울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10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던 밤이었다. 배는 어둠 속에서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의 몸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사공의 작은 실수로 뱃길은 어긋났고, 배는 갯가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육지의 불빛이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대한 어둠의 그림자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 그림자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몸을 굳혔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바다에 잠복해 있던 적선들이 갑자기 횃불을 켜며 굉음을 냈다. 불빛이 어둠을 찢고, "이젠 끝났구나!" 하는 절망적인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강항은 가족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그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차가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죽음으로 비겁한 삶을 거부하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하지만 갯가는 생각보다 얕았다. 발이 닿는 순간, 그들의 몸은 물에 잠기기는커녕 끈적한 뻘에 박히고 말았다. 곧이어 다가온 왜군들의 거친 손길이 그들의 옷깃을 움켜쥐고 뭍으로 끌어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만이 다른 배를 타고 홀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강항의 눈에는 안도감, 죄책감, 두려움이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었다.
왜적들은 강항의 용모와 옷차림을 보고 그가 벼슬아치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와 그의 형제들, 아내, 처부 등 온 가족을 뱃전에 묶은 채 배를 돌려 무안현(無安縣)의 한 포구로 향했다. 무거운 쇠사슬이 그의 손목을 짓눌렀고,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은 그가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뱃길을 돌자 그의 시야에는 6, 7백 척에 달하는 적선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는 충격적인 광경이 들어왔다. 그들의 거대한 함선은 마치 바다를 집어삼키려는 괴물처럼 보였다.[2]
배 안은 이미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조선의 남녀 포로들과 왜적들이 뒤섞여 울부짖는 소리가 산을 흔들고 바다를 뒤흔들었다. 울음소리는 겹겹의 천 조각처럼 쌓여 어둠을 덮었고, 그 아래에는 오직 쇠사슬의 차가운 소리만이 들렸다. 강항은 뱃전에 묶인 채 그 참혹한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깊은 비통함에 잠겼다. 그의 눈동자는 공허한 듯 흔들렸으나, 이내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들의 배는 순천(順天) 좌수영(左水營)에 도착했다. 사도노카미(佐渡守)라 불리는 왜적의 장수가 나타났다. 그는 강항과 그의 형제들, 가족들을 다른 배에 옮겨 태웠다.[3] 순천을 떠난 배는 하루 낮밤을 달려 안골포(安骨浦)에 이르렀고, 다음날 해 질 녘에는 쓰시마(対馬)에 닿았다.
비바람 때문에 이틀을 머무른 후, 다시 이키(壱岐), 히젠(肥前), 나가토(長門)를 거쳐 슈호(周防)의 가미노세키(上関)에 닿았다.[4] 그들의 여정은 희망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절망을 향한 것이었다. 몸은 거친 나무판에 실려 한없이 흔들렸고, 뼈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귓속에서 울렸다.
그렇게 며칠을 더 항해한 끝에 배는 마침내 이요(伊予)의 오즈(大津)현에 닿았다. 그곳은 사도노카미의 개인 영지였다. 배는 멈추었으나, 그의 몸은 여전히 며칠간의 파도에 흔들리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뭍에 내딛는 발바닥의 감각. 낯선 땅의 차가운 돌멩이가 그의 발을 찔렀다. 공포가, 차가운 돌멩이처럼 그의 뱃속에 단단히 박혔다.
이곳에서 그의 삶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가족들의 운명은 또 어찌 될 것인가. 그러나 그 두려움의 뼈대 아래, 그의 정신만은 결코 포로가 될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꿈틀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밤바다의 별빛처럼,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반짝이는 빛 한 올이 깃들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그의 운명과도 같은 질긴 기록자의 혼이었다.
커버사진: Unsplash의 Tianshu Liu
사료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신호열 번역 <간양록>, 적중봉소.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80A_0010_010_0010
[1] 思漢之士聚者。僅數百人。而顧戀家屬。旋卽解散。臣不得已。"한나라를 생각하는 선비들이 모여든 자가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하였고, 가정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곧 흩어졌으니, 신이 어쩔 수 없었다." 강항이 『간양록』에서 조선 대신 '한나라'를 쓴 이유는 그가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충신이었던 소무(蘇武)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대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무는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무려 19년 동안 양을 치는 고초를 겪었으나, 끝까지 '한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간양록<看羊錄>의 제목 자체가 '양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소무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2] 賊船六七百艘。瀰滿數里許 "적의 배가 6백, 7백 척이나 되어 몇 리에 걸쳐 가득 차 있었다"
[3] 사도노카미(佐渡守): '사도(佐渡) 지역의 수장'이라는 뜻. 도쿠가와 막부 당시 은과 금의 산지로 유명했음. 현재 일본 니가타현의 섬
[4] 안골포(安骨浦): 현재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