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페미아

니케아의 수도원

by HJ


"제가 이곳에 온 건 겨우 열두 살 때였어요. 처음엔 정말 싫었어요. 도시의 냄새, 소음, 그 모든 북적거림이 그리웠죠. 어머니께서는 열병으로 거의 죽어가던 저를 보고 서약했다고 하시더군요. 늘 저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셨데요.


수녀원에 들어온 지 여러 해가 지나고, 저는 이곳에 익숙해지면서 신앙을 찾을 수 있었어요. 매일 저는 이 도시의 사람들과, 황제, 그리고 도시의 성문을 위해 기도해요. 다른 수많은 것들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하죠. 흑사병이 왔을 때는, 장례식이 너무 많아 정말 끔찍했어요. 우리 자매들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옷을 만들고, 약을 만들기 위해 텃밭에서 약초를 키우고 있어요. 수도원 안에 작은 도서관도 있어서 때로 오래된 책들도 읽을 수 있고요.


이곳의 삶은 소박하지만 매일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느껴요. 거창한 꿈같은 건 없어요. 그저 그분을 섬기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뿐이죠. 제 가장 큰 희망은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도시에 작은 평화라도 가져다주시길 바라는 거예요.


가끔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을 생각해요. 어릴 때 저는 왜 엄마가 저를 떠나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혼자 원망도 많이 했고요. 이제 알아요. 사랑하는 딸을 병으로 잃고 싶지 않았던,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절박했던 어머니의 선택이었다는 것을요.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수도원에 찾아오세요. 하지만 이제는 어렸을 때와 달리 이해할 수 있어요.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어머니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은 우리가 하는 기도만큼이나 변치 않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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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1] 그녀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좋은 평판을 가진' 또는 '좋은 말을 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 단어 eu(εὖ, '좋은' 또는 '잘')와 phēmē(φήμη, '말' 또는 '평판')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특히 6세기 비잔틴 시대에 이런 이름이 성행했던 이유는 당시 기독교의 성인인 '성녀 에우페미아(Saint Euphemia)'와의 깊은 연관성 때문입니다. 그녀는 3세기 후반에 순교한 성인으로,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 교리를 확인하는 데 그녀의 도움이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그녀의 이름은 매우 존경받았으며, 6세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자녀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실제로 6세기 초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누스 1세'의 황후도 '에우페미아'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2] 당시 부모는 자녀의 삶을 결정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습니다. 반면 자녀가 부모에게 적절한 이유나 존경을 표하지 않고 떠나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3] 수녀들은 주로 직물 제작 활동에 참여했으며, 모든 수도자들은 도시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성벽'과 '성문'을 위한 기도는 도시의 물리적 방어 시설이 주민들의 일상적 평화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4] 그녀의 수도원 활동은 당시 수도원의 전형적인 역할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40–604년경, 재위 590–604년)가 활동하던 때입니다. 그는 수도원의 관조적 삶을 중시했으며, '깊은 고요함의 기쁨'을 잃고 현세적 업무의 폭풍에 휩쓸리는 현상을 한탄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원 개혁과 영국 선교에 힘썼고, 그레고리안 성가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로마 시장까지 지낸 뛰어난 행정가였으나, 30대 중반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모토는 당시 수도원의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성 판텔레이몬 교회, 북마케도니아

[5] 중세 수도원 도서관은 종교적 텍스트와 세속적 지식을 보존하는 지식의 창고였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는 수도원 도서관이 작품의 핵심 배경이자 주요 사건들이 벌어지는 무대로 그려집니다.


[6] 비잔티움 사회에서는 질병의 치유에 있어 종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당시 의학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해부학적 지식이 제한적이고 효과적인 약재가 부족했습니다. 이러한 의료 현실에서 일반 사람들은 종종 의사보다 성인의 기적적 치유력에 의존했습니다. 성 아르테미오스의 기적으로 치유된 환자의 어머니가 그리스도 성화 앞에서 감사를 표했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학자들은 또한 어머니와 딸 사이의 관계가 초기 여성 수도원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참고문헌

Judith Herrin, Unrivalled Influence: Women and Empire in Byzantiu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Michael Maas, Readings in Late Antiquity: A Source Book (Second edition, Routledge 2010).

Alexander Olson, ‘Between the Oak and the Olive: Environment and Society in Byzantium, 650-1150’ (PhD Thesis,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2016)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 번역, 열린책들 2006).

사진: UnsplashGunnar Kap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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