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자렛, 피아노 그리고 여름
고장 났나.
그 정도로 조명을 잘 켜지 않았지 넌,
나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는다. 스탠드 하나만이 공간을 밝힌다. 비워지기 전에 채워진다. 잔 바닥에 빛이 닿으면 이 시간이 끝나버릴 것처럼. 키스자렛의 음악이 흐른다. 그는 우리에게 형님으로 불린다. 그가 피아노를 치며 ‘아’하고 추임새를 넣는다. 그에 맞춰 우린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 하얀 커튼을 바라보고 늘 공부만 하는 건너 집 청년들을 바라본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마실 때 그들은 공부한다. 죄책감을 닮은 감정을 마음 밖으로 슬쩍 밀어내려 눈을 돌린다.
스모그처럼 깔려 있는 불빛을 바라본다. 빛은 언제부터 우릴 보고 있었을까. 우리보다 먼저였을까. 밤과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에 시선과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끌리듯 그 모습을 담으려 휴대폰을 꺼낸다. 보지도 않을 사진을 찍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언젠간 볼 거라는 믿음으로 덮는다. 그 모습을 작게도 크게도 담아본다. 너도 그렇게 한다. 같은 모습을 다르게 담는다. 너 역시 보지도 않을 거면서.
사진은 메모리칩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저장되는 것인지 모른다. 과거의 사진들이 수도 없이 올라오니까. 방송국 모니터 실의 수많은 티브이에서 끊임없이 영상이 나오듯, 우리 이야기도 우리 모르게 흐른다. 우리가 만나지 않는 순간에도. 너를 떠올리고 있고, 나를 떠올리고 있을 너의 마음속에서도 나는 흐르고 있을 테기에.
서울로 향하던 내 마음이 어땠는지 너는 알까. 아마도 알 거다. 너도 용인에 오는 길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으니.
빛은 빈 잔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 여름, 충주의 별장에 갔다. 창을 통과해 어딘가 닿은 시선만으로도 더위를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너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오래된 피아노를 연주했다. 전진희의 8월이었다. 두 번의 레 플렛. 차분한 울림으로 시작을 알리는 곡은 우리에게 여름의 음악이 되었다.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로 너는 그 곡을 정성스레 연주했다. 한음, 한음. 피아니스트 같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나는 말이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름과 8월 그리고 자연. 음악은 자연에서 온 것일까. 그게 자연에서 듣는 음악이 자연스레 들리는 이유일까.
상대의 좋은 점만이 보이다 상처로 돌아오는 것. 문득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웃다가도 뒤따라오는 불편한 마음. 함께 했던 시간이 더는 의미 없게 여겨져서였는지 모른다.
피아니스트 전진희의 음악이 흐른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우리를 깨운다. 지금에 머물지 않던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한다. 우리가 함께 음악을 들을 때 그의 피아노 곡을 틀지 않은 적은 없다. 언제쯤 그의 '피아노' 공연에 갈 수 있을까, 내가 말한다. 그는 공연에서 주로 피아노를 치며 노래한다. 그의 피아노 연주에 목소리가 더해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다른 사람의 음악처럼 들린다. 무엇 때문일까. 오래전 그는 피아노만을 연주했다. 네게 알려준 그 피아노 공연을 너는 갔고 나는 가지 못했다. 그 피아노 공연은 정말이지 최고였다고, 그런 공연은 앞으로 없을지 모른다고, 너는 말한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내가 미워진다. 그 공연을 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낸 건 아니라고 지금에서야 느낀다. 그 해 여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꼭 갈 텐데.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붙잡으려 한다. 연락이 닿지 않는 널 떠올리다 이내 마음을 미루는 일처럼. 힘없는 목소리의 음색도 좋고 잔잔한 피아노 반주도 차분한데, 그의 목소리가 얹히면 왜 피아노 곡에서 느끼던 감동은 사라져 버릴까. 그를 좋아하는 이들은 그의 노래도 노랫말도 좋아한다. 공연이 열리면 표를 구하기 쉽지 않을 정도다. 우리의 문제일까. 우리의 취향이 노래가 아닌 단지 피아노로 한정되어 있는 걸까. 적절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저 그는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밖에는. 그렇게 '피아노' 공연에 대한 목마름을 서로에게 뱉는다.
엽서에는 쾰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프랑스에서 샀지만 쾰른은 독일의 도시였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엽서를 사지 않았다. 쾰른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이었다. 그곳에서 자렛형님이 라이브를 했었다. 그의 라이브를 즐겨 듣던 넌 삿포로나 쾰른 라이브 실황 틀곤 했다. 곡이 끝난다. 너는 말없이 휴대폰으로 다음 곡을 고른다. 곡이 흐른다. 처음 듣는 곡이다. 키스자렛 같기는 하다. 생소하다. 그걸 티 내지 않으려는 듯 잠잠히 듣는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흘러나오는 귀로 들어왔는데 가슴을 파고드는 모르는 곡 제목을 알고 싶어 한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바로 찾아주는 기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시절, 노량진역 9호선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는 육교 내부 붕어빵 노점에서 흐르는 팝송에 꽂혀 제목을 찾으려 곡을 일단 녹음한 뒤 듣기평가 하듯 들리는 영단어를 하나하나 받아쓰고 그 단어들을 조합하여 검색해 그 팝송을 결국 찾아낼 정도로 나는 이 일에 집착하는 편이다. 다행이다. 해답지를 가진 네가 앞에 있어서. 한계에 다다른 난 묻는다. 이곡 뭐야. 너는 여전히 말이 없다. 너는 이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선곡할 때부터 그랬는지도.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을 짓는 네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그 엽서 만났을 때 이미 그것은 네 것이 될 터였다. 처음 네게 쓰는 글이 어색했지만 진지하게 써내려 갔다. 망설임 없이, 키스자렛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너는 해마다 준비하는 시험이 있었다. 그것을 응원하는 마음도 담았다. 너는 앞면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그 엽서를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너의 집에 갈 때면 그 엽서가 눈에 띄곤 했다. 마음을 담은 어떤 것이 소중하게 대해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을 종종 초대하는 너였다. 그중 누군가는 그 엽서를 보았겠지. 그리곤 엽서를 돌려 뒷장의 글을 읽은 사람도 있을 테지. 모르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는 것에 기대를 느꼈다. 너의 집에 방문하는 이는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겠으나, 그 엽서를 보고 너를 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너와 연락이 닿았다. 거의 매일 통화를 했던 것에 비하면 오랜만이었다. 직접 메시지를 나눈 것도 전화를 한 것도 아니었다. 단체 채팅방에서였다. 너는 설악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공유했다. 죽을 뻔했다는 농담도 건네며. 회색 빛 하늘을 배경으로 비바람이 날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 웃지 않는 건 드문 일이다. 사진 속 누군가는 희미하게 웃었고 너는 찡그렸다. 그걸 본 나는 네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진 속에는 여자도 남자도 셋 씩이었다. 사진 속 내려앉아 있던 네 입가가 슬며시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잘 지내고 있을까. 네게 연락을 하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자존심일까. 우리 사이의 우정이란 게 그 정도인 걸까. 네게 거는 기대가 커서일까. 먼저 연락해 주길 바라는 연인 사이에나 있을 법한 사랑싸움 비슷한 걸 나는 너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걸까. 아침에 집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침에 걸맞은 대화를 하려고 애를 쓴 걸 너는 눈치챘을까. 미래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싶게 만든 건 나의 마음일까, 너의 마음일까. 춘천에서 돌아오는 길, 눈만 감으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던 날,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피곤함도 이겨내도록 한다는 걸, 닭갈비를 맛있게 먹고 모자라 통밀 파스타 면을 넣어 거하게 먹은 날,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은 아니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 조차도 추억의 추억이 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