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러운
부린다. 길을 내 마음대로 가기 위해. 불안하고 불투명하지만, 마음먹었으니 그렇게 해보기로 한다.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 지 오래되지 않은 건 아니다. 성과도 없다. 세상이 정해줄 법한 삶으로 돌아가 사는 걸 상상했다. 언젠가 삶을 정리해야 하는 때를 떠올리자 드는 감정은 후회였다. 그 길은 가지 않기로 한다.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책을 읽는 것. 요즘 내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을 잘하는 친구들이 가장 부럽고 멋져 보였던 나는 이제 그 한을 풀어보기라도 하려는 듯하다. 도서관에는 남은 모든 시간을 쏟아내어도 다 읽지 못할 만큼의 책이 쌓여 있다. 중요치 않다. 지금 내 눈앞 매력적인 자태의 책과 그 몸 위에 새겨진 문신에 집중하는 것만이 내가 할 유일한 일이다. 알아차림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바라보면 머지않아 흘러가 버리는 그런 것. 내 안에 화가 많다는 걸 알아차린다. 부모님께 얹혀살면서도 내게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의 한마디가 내겐 간섭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면 화가 올라온다. 무슨 상관이냐, 역정을 냈던 내가 이제는 가만히 바라본다. 수없는 가시나무 숲의 나를 바라보듯. 그러다 보면 화는 누그러진다. 감정은 내 안에서 수없이 일고 또 사라진다. 이를 배우는 게 삶의 일부인지 모른다.
도서관은 책을 읽기에 적절한 장소다. 책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도시와는 독립된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소음에서 멀어져 몰입하기 쉽다. 고요함의 대명사가 도서관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지만 도서관에서도 여러 소리가 들린다. 중학생 친구들의 속삭임부터 책이라는 보물을 찾는 누군가의 발걸음, 그리고 책의 목소리. 어쩌면 도서관은 도시보다 시끄럽지 않을까. 책장에 꽂혀 등을 보이는 수많은 책은 제각각 자신을 한 줄로 드러낸다. 서가에 꽂힌 셀 수 없는 책들은 잠깐이라도 자신을 데려갈 주인을 기다린다. 광고에 혹한 주인이 책을 집어 들면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표지를 들려준다. 펼쳐보지 않을 수 없다.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책. 서문을 읊는 목소리에 비장함이 묻어있다. 서문 중 한 페이지 아니, 5줄만으로도 예비 주인의 귀를 매료시킬지 판가름 나기에.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달아나 도서관에 왔으나 이곳 또한 만만치 않다. 제목에 끌려 대충 훑고 제자리에 꽂아 놓을 심산으로 집어 든 책의 이야기는 부드럽다. 한 손엔 책을 들고 의식하지 못한 채 책상으로 다가가 남은 한 손으로 의자를 절반쯤 빼어 비스듬히 앉는다. 세상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책이 들려주는 '고요한 소음'은 여러 가지를 가라앉힌다. 실은 나도 소음을 즐기는 사람 아니었을까. 도서관에서의 소음 샤워는 분명 따뜻한 물이다.
두 번째로 하는 일은 글쓰기다. 책을 읽는 건 글을 쓰기 위한 바탕이다.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저)의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어쩌면 나도 글을 잘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3페이지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어느새 세 페이지까지 쓰곤 했다. 일주일 그리고 한 달. 내면의 목소리가 손을 타고 종이 위에 새겨졌다. 내면의 목소리를 어떠한 필터를 거치지 않고 온전히 표현하는 것은 새로웠다. 나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글을 써야겠다는 씨앗이 심기자, 내 안에서 무엇인가 나가길 원하는 듯했다. 에세이 글방을 거쳐 시모임에 나간다. 각자 글을 써서 만나 서로의 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멋모르고 시를 끄적일 땐 시처럼 쉬운 게 없다고 여겼다. 배울수록 어려운 게 글이었다. 오만을 알아차리면 자만이 자라나는 게 마음이었다. 자만함을 눈치채 겸손해지려는 찰나를 비집고 욕심이 든다. 더 잘 쓰고 싶은 욕심. 인정을 원하는 마음. 나아가 사랑도.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건 채울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열쇠 없는 자물쇠를 채울 수 없듯. 어쩌겠는가. 채울 수 없는 걸 감히 채우려 드는 게 인생인 것을.
세 번째 일은 음악이다. 음악은 수학과 닮아 있다고 추측한다. 국어와는 다르게 수학은 즐겼다. 중학교 3학년 때 수학 선생님을 잘 만나 수학에 재미를 들인 이후부터는 다음 3년 동안 수학은 놀이와도 같았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늘 수학 문제만 풀었다. 수학에 집중이 잘되는 날에는 야자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어린 시절 아파트 사이를 걸어 슈퍼에 가는 길에는 멜로디를 지어내며 작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연에서 만나는 여러 악기를 머릿속에서 연주해 보다 피아노로 결정했다. 밴드에도 클래식과 재즈에서도 피아노는 주인공으로도, 조연으로도 연주되어서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한 곡을 가득 채우는 풍성함을 가진 악기라는 점에 매료됐다. 어린 시절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건반을 누른다. 이어지는 멜로디가 떠오르면 한음 한음 찾아가며 멜로디를 만들고 어울리는 코드도 입혀 곡을 만든다. 천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도 모르는 천재. 혹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이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역주행하지 않을까. 언젠가 피아노 연주곡이 담긴 앨범을 냈으나 세상에게서 외면받은 내 새끼들 같은 CD 재고가 내방 구석에 쌓여 있는 걸 바라봤을 때, 천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깊은 한숨으로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것이다.
네 번째 일은 달리기다. 달려야 하루를 살아갈 체력이 생긴다. 달리기는 에너지를 쓰는 행위 아닌가. 그게 동력이 된다니 놀랍다. 달리기는 자연스럽다. 인간이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 동물의 위협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달렸다는 옛날이야기를 이미 했지만 하고자는 건 아니다. 천을 따라 달리며 물속에서 자라난 풀과 천을 향해 기울어진 나무, 하늘 위 흐르는 구름을 본다. 과장해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달리는 나와 함께 심장박동도 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살던 세상이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몸이 있고 정신이 있는 게.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을 의식 통제하고 있지 않나 같은 생각. 어느 날,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의식이라는 건 뭘까. 나도 너도 가지고 있는 영혼.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 몸 안에 있지만 몸 밖으로 아니 우주까지도 단번에 도달하는 것. 그걸로 인사를 나누고 생각을 하고 내가 하는 모든 것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우리가 각각 가지고 있는 의식이 말할 수 없게 귀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혼을 지닌 생명이란 그 무엇도 해 해서는 안될 것이었다.
흔하지 않다. 같은 일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간은. 눈을 크게 뜬들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는 몰랐던 걸 발견할 때면 점점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하고 잠도 푹 자고 유튜브도 멀리하면서 얻은 귀한 시간이다. 건강함은 주변에 나누고 싶어진다. 누군가 삶에 지쳐있다고 하면 정신과 몸을 충전할 수 있는 활동을 한 가지씩 해보도록 권유한다. 내게는 달리기가 몸에 활력을 주었다. 의식하고 있는 듯 하나 의식하지 않고 있는 이 의식과 정신은 어떻게 하면 깨울 수 있을까.
다섯 번째 일은 명상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겪어보지 못한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난 도망을 선택했다. 힘들면 대안을 세우거나 다음 직장을 알아보기는커녕 빛의 속도로 퇴사했다. 회피하는 선택은 나를 깊은 수렁으로 인도했다.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갈 곳 없는 한 성인을 거두어 준 안식처는 도서관이었다. 그토록 평화로운 곳에서 난 다시 한번 도망을 선택했다. 세상과 나로부터의 회피를. 매일 공들여 찾아갔던 도서관에서 유튜브를 봤다. 유튜브를 보면 나를 미워하는 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따금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 방해되지 않을까’, ‘유튜브만 보고 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하는 마음. 한창 일할 나이에 직업 없이 도서관에 다니고 있다는 생각은 마음을 조였다. 작아진 마음을 지니고는 어찌할 바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언가 필요했다. 이 불안복잡한 마음만 해결된다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웅크리고 있는 이 마음 하나만. 그러다 명상을 발견했다. 검색하다가 ‘마보’라는 앱을 발견했다. 7일 동안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벌이 없어서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니. 기대에 찼다. 10분 정도의 명상을 7일 동안 했다. 큰 변화는 없었지만 변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명상을 하고 나면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던 내가 보였다. 마음먹고 꾸준히 해보기로 했다. 살아갈 작은 힘이 생겼다. 새로운 목표가 눈에 들었다.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필기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10분 동안 명상했고 1시간마다 3분씩 호흡에 집중했다. 긴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2주 동안 틈틈이 하는 명상은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공부에 집중도 훨씬 잘 되었다. 하루를 명상과 공부로만 채운 시기, 나는 삶을 처음 사랑했다.
요즘도 명상을 한다. 아침엔 떠오르는 생각을 적으며 3페이지를 채우는 모닝 페이지로 글명상을 하고, 오후에 15분 동안 호흡, 바디스캔(몸의 각 부위에 의식을 두는) 명상을 한다. 피곤할 때는 한 번 더 한다. 10%밖에 남아있지 않던 체력이 60%까지 충전된다.
직장에 출근하지 않아 자유로운 만큼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다 흘려보내는 시간도 많다. 계획적이지 않기에 결과도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 같아 걱정의 마음이 인다. 그럴 때면 이런 마음도 알아차려 준다. 바쁘게 산다고 열심히 한다고 되지 않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벌어둔, 무엇하기에도 애매하게 남은 돈을 나에게 쓰기로 한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나야 하기에. 생활비 쓰기에도 빠듯하지만 밀어붙여 보기로 한다. 한 푼 없이 태어났으며 내 것이라 하는 모든 게 실은 내 것이 아니지 않나. 흘러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다. 그렇지만 잘 살고 싶다. 이렇게 살아도, 내 길을 걸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직업과 꿈과 돈이 먼저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라는 것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