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4. 언제나 외톨이 맘에 문을 닫고

-알베르 카뮈, <이방인>, 민음사

by 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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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바보"(아웃사이더, [외톨이], 2009)는 언제나 바보인가?


여기 외톨이가 있다. 빠른 랩으로 유명한 이 노래에는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을 찾는 동시에 ‘사랑도 사람도 너무나도 겁나’는 화자가 등장한다. 혼자인 것도, 잊혀지는 것이 무서우면서도 사람과의 감정과 관계가 무섭기에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은 ‘외톨이’이다.


다른 한 곳에는 이방인이 있다. 소설 <이방인>은 그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13p)” 화자 뫼르소는 자기 주변을 통틀어 자신에게까지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이런 무관심함은 뫼르소뿐만이 아니다. 전보를 살펴보면 ‘모친 사망’이 어제인지 오늘인지도 모르겠는 채 도착해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우리에게 이렇게나 무관심하다.


뫼르소는 이런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게,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도 솔직히 대응한다. 뫼르소는 후덥지근하고 피곤한 장례식을 마친 후, 꿀 같은 잠을 자고 애인을 만들고 해변가에서 논다. 뫼르소의 무관심함은 솔직하게 드러나 그의 매력이 되어 애인과의 결혼을 약속하고 노인과 이야기하며 친구를 사귄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러나 태양의 사건 이후 이런 솔직함은 독이 된다. “나는 좀 빠르게,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중략) 그러자 법정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126p)”

뫼르소가 위기의 장소에서도 무관심하고 법정에서조차 솔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무심한 성격이기에 그러는 것이라면 이 작품이 신화라 불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어 재판은 살인이 아닌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이동한다. 재판장과 검사, 배심원들은 살인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것에 더 분노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실재적인 범죄보다 슬픔-으로 대표되는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 이는 사회가 사건의 진실보다 사회라는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한 감정이라는 표현 방식에 더 주목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재판은 결국 뫼르소가 살인을 해서가 아닌, 그가 슬퍼할 때 슬퍼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일상이 아닌 비일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무관심함은 일종의 비수행성이다. “세상은 하나의 무대며, 모든 사람은 한낱 배우일 뿐이니.”(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 사람들은 모두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부모의 역할, 학생의 역할, 직장인의 역할, 혹은 죄수의 역할에. 직장인은 직장인이 되어 야망을 품어야 하며, 죄수는 죄수가 되어 용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146p)”라며 ‘기쁨과 분노’로 독백한다. 뫼르소의 삶은 뫼르소 그 자체와 관련이 없다. 그렇기에 뫼르소는 ‘이방인’인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나 자신의 행동이 어찌되도 상관 없다는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뫼르소는 자신이 저지른 사건의 중요성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뫼르소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모든 것은 별개의 사건이며 그것들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한낮의 살인 사건도. 그것은 그저 ‘그것’일 뿐이다. 삶이 부조리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어서-뫼르소의 재판과 같이 왜곡해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회라는 이 연극은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의 삶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당신은 내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라는 겁니까? 그가 외쳤다.(88p)” 그렇기 때문에 그를 이 연극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힘쓴다. 그 역할을 예심 판사와 신부가 맡는다. 판사는 말한다. “‘그것 봐, 그것 보라고, 너도 믿잖아? 그리고 하느님께 너를 맡기려 하잖아?’하고 말했다. 물론 나는 다시 한번 더 아니라고 말했다.(88p)”, 그리고 신부도 말한다.“그는 화제를 바꾸려고, 왜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냐고 물었다. (중략) ‘나는 당신 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마음의 눈이 멀어서 그것을 모르는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드리겠어요.’ (중략)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다.(144-145p)” 그리고 그들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한다. 왜냐하면 뫼르소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145p)”


마지막까지 연극의 수행을 거부하자 뫼르소는 그들에 의해 영혼을 박탈 당한다. “사실상 나에게는 영혼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고, 인간다운 점도, 인간들의 마음을 지켜 주는 그 어떤 도덕적 원리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중략) ‘...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적 공허가 어떤 구렁텅이가 되어 사회 전체를 삼켜 버릴 수도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123p)” 타자에 의해 사형수라는 ‘이방인’마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뫼르소의 비수행성을 확신이자 진리로 만드는 것이다.


[외톨이]가 지치고 무서워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이라면, <이방인>은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147p)” 있는 사람이다. 혹은 타자로 인해, 또는 스스로를 비수행적인 삶으로 이끄는 인물들이다. 외톨이와 이방인이 어째서 사회라는 연극에 동참하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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