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팔봉칠 Jun 28. 2024

B2. 담백하고 섬세한 문체

여름 빛 아래_황수영

작성일 : 2024.02.03


시작하다.

2024.02.02 서울로 가는 새마을 기차 안

첫 연합동아리 모임을 가지러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요즘 서울에 올라가는 일이 많아서 기차를 자주 타게 되었는데 기차표 가격이 만만치 않아 늘 부담이었다. 빨리 올라가려면 ktx를 타면 되지만 거의 5만원에 가까운 표를 사자니 손이 떨렸다. 안 그래도 가난한 대학생이라 방학 때라도 아끼려고 돈을 거의 안 쓰다시피 하는데 기차표만 사면 왕복 8만원 이상이니 눈물이 흐를 수밖에.. 그래서 시간이 애매한 무궁화를 포기하고 그나마 만 원정도 더 싼 새마을 기차표를 구했다. 시간은 두 배 걸리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아꼈으니 마음이 편했다. 그리하여 4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재밌고 빠르게 보내기 위해 책을 읽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정보가 많은 책을 읽자니 오래 읽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욕심부리지 않고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을 고르기로 했다. 그 결과, 언니의 짧은 에세이 한 권을 훔쳐 읽어 보았다.


아로새기다.

: 마음속에 또렷이 기억하여 두다.


1) 비유

적절하고도 섬세한 비유가 두드러졌던 문장.

13p. 어쩌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곁가지들만 사랑했던 건 아니었을까.

난 여기서 ‘여름=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사귈 때 그 사람의 곁가지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될 때가 있다. 줄기를 보지 않고 그를 감싸는 곁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의 효율을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나쁘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나는 곁가지보다 줄기를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겠다.


21p. 희망. 사랑보다 빛나고 슬픔보다 쉽게 바스러지는 게 꼭 새벽에 조금 내린 눈 같다. 새벽에 잠깐 내린 눈은 아침에 일어나면 그냥 축축한 바닥이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희망이라는 긍정의 대명사와 고문이라는 부정의 대명사가 함께 자리할 수 있다니.. 참 모순적이면서도 공감되는 단어다. 사랑보다 빛났던 희망은 금방 바스라져 녹았지만 새벽에 눈이 내린 잠깐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기에 자꾸만 갈구하는 것 같다. 마음 한 구석이 눈물로 축축해질 것을 알면서도 눈이 녹기 전까지의 행복했던 감정을 연속해서 느끼고 싶어 자꾸만 희망을 불러낸다. 끊임없이, 쉴틈없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녹으면 다시 불러내고, 또 불러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누구의 발자국도 남지 않은 뽀얀 눈들이 소복히 쌓이겠지. 그러다보면 내 마음이 축축해지는 시간이 조금은 줄어들겠지 싶어서.


32p. 사랑은 그냥 허울좋은 외로움이겠지.

외로움. 항상 내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단짝이다. 외로움은 고질병이다. 난 겨울이 외롭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떠나가고, 내가 이루었던 것들이 과거가 되고,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면서도 두려움에 휩싸이는데 기대고 싶지도 기댈사람도 없어서 그렇다. 오후 5시만 되면 깜깜해지는 하늘이 외롭고, 얼굴을 날카롭게 스쳐가는 밤공기가 외롭다. 일을 끝내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오는 나의 언니가 외롭고, 자꾸만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어머니가 외로우며, 멀리서 홀로 지내시는 아버지가 외롭다. 이들을 사랑하는 내 자신이 외롭다. 사랑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래서 자꾸만 무뚝뚝하게 변하는 것 같다. 내가 그만 외롭고 싶어서 방어기제로 성격을 바꿔버린다.


57p. 털어버린 주머니가 비었다. 돌아서서 바다로 간다. 몇 번을 털어버리더라도 다시 몇 번을 주울 것이다. 일부러 줍지 않아도 어느샌가 바짓단 안에, 양말 끝에 매달려 오는 모래알도 있을 것이다.

비우면 채우면 되지. 채워서 넘치면 다시 주워담으면 되지. 다 채웠으면 다시 비우면 되지. 사실 인생은 이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나 싶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히 행동하되 깊이가 있게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과정에서 늘 내 양말엔 모래가 묻어올 테니.

내 반수도 그렇다. 꽉 채우던 마음을 지금은 다 비웠지만 양말에 붙은 모래알이라도 남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그 시간이 아깝다고 아주 잠시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모래알 몇알 남은 것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렵게 말고 단순하게 삽시다. 어차피 복잡한 게 인생인데, 나라도 단순하면 얼마나 좋아요?


80p. 더 갖추고 싶은 마음이 운동화 속으로 들어온 모래 같다. (쉴새없이) 발밑에서 버석거린다.

‘쉴새없이’ 라는 말은 사실 책에는 없는 말인데, 이 문장을 읽으며 자연스레 이 단어를 넣어서 읽고 있었다. 그래서 임의로 넣어서 기록해봤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발밑 모래알은 꾹꾹 눌러둔 내 소망과 같다.


84p. 걷기 시작할 즘엔 큰 무지개를 보았다. 코앞만 볼 수 있던 시선의 범위가 조금 넓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반드시 먼 곳을 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코앞만 보다가 멀리 보게 되거나, 먼 곳만 보다가 바로 옆과 발밑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엔 좀 반가운 마음이 된다. 큰 무지개를 발견한 마음처럼 깨끗하게 개는 마음.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아이의 얼굴 같은 마음

반드시 먼 곳을 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좋다. 코앞에 있는 것들만 잘 어루만지며 살아가도 괜찮다. 하지만 가끔씩 고개가 아플 때 고개를 들면 더 큰 것들이 보이기도 하니 그런 반가움은 아주 소중히 맞이해야지.


85p. 무조건 다 좋을 거라는 식의 맹목적인 긍정은 부담스럽다. 좁은 복도에서 옆을 둘러보지 않고 마구 내달리는 사람같다.

사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들의 말이 사실 와닿지 않을 때가 많았다. ‘다 괜찮아 질 거야’라는 말이 고맙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무조건 다 좋아질 거라는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 신념으로 삼고 싶지 않다. ‘어떨 땐 좋아질 거고, 어떨 땐 좋지 않아지겠지만 그래도 의연히 살아가야지’라는 게 인생에 대한 나의 태도이다. 맹목적인 긍정은 곧 낙천이고 낙천은 곧 무책임과 회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역시도 친구들이 힘든 일이 있다면 다 털어놓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릴 수 있게 들어주기만 하고, 위로의 말은 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 기록한 구절에도 나와 있듯 슬픔과 괴로움 이런 것들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myself를 의미)


111p. 넘어가고 넘어갔던 파고와 같은 더 오래된 시간들도 생각한다.

‘파고’라는 말이 궁금했다. 처음엔 뜻을 몰라서 글을 쓸때 ‘초고’, ‘퇴고’를 말하듯이 ‘쓰다가 버린 글’을 파고라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파도와 같은 의미라고 한다. 정확히는 ‘물결의 높이.’ 사실 파도가 칠 때 사람들은 새로 밀려오는 파도의 파고가 얼마나 높은지에만 관심이 많지, 이미 지나간 파고에는 관심도 없고 기억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고를 인생의 굴곡이라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바다에선 지나간 파고를 생각하지도, 염두에 두지도 않는데 왜 인생을 살아갈 땐 지나간 파고를 자꾸만 돌이키고 후회하는 걸까? 물론 그 와중에 마음에 드는 파고도 있었겠지. 하지만 대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아주 작은 파고였겠지. 어느정도는 잊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파고를 기대하는 게 우리의 남은 몫일 텐데, 바다에선 자연스럽게 되는 그것이 인생을 살아갈 땐 아주 부자연스러워진다. 아이러니 하게도.


2) 묘사

글을 읽었는데 장면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생동감이 느껴졌던 문장.

18p. 바다에서 미역을 건져 올리는 사람이 있다. 어제 내가 서러움을 집어 던졌던 바다다.

관념을 시각화하는 사람들의 표현을 배우고 싶다. 나의 서러움이 담긴 바다에서 누군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식량을 건져올렸다니… 바다는 참 깊고 다양한 곳이구나 싶다. 모든 게 혼합되어 어지럽다가도 어울리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심지어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듯 나의 서러움이 그저 추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33p. 가끔씩 정말로 혼자임을 실감하면 무서웠다. 살갗이 서늘해지고 손톱 밑이 저리고 얼굴이 따갑게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혼자구나 정말로 혼자구나 온몸이 소리 낼 때. 외칠 때. 사라지고 싶었다. 그럴 때 시를 읽었다. 혼자인 사람이 혼자인 것을 소리 내 외치는 시간을 읽었다. 다른 몫의 혼자를 받아들이면서, 너무 외로운 사람들의 섬세한 마음의 굴곡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 내리면서. 아무것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나았다.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발판 삼아 내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는 것을 지향하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늘 그런 방법으로 내 자신을 위로하곤 한다. 내가 혼자라고 느껴지면 나처럼 혼자였던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그 사람은 나보다 외로웠는지부터 찾으려 하고, 나보다 더 외로웠다면 안심하고 나보다 덜 외로웠다면 기만이라고 생각하는 내 얄팍한 마음에 가끔 실망하기도 했다. 너무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 사람들보다는 덜 외롭구나 싶어서 안도감을 가질 때, 그때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도 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가장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며 합리화하곤 한다.


47p. 나는 슬픈 사람들이 겨울보다는 여름에 울었으면 좋겠다. 젖은 얼굴이 너무 빨리 마르지 않게, 급히 마른 것은 바스러지기 쉽다.

여름에 잔뜩 울어놓으면 겨울에는 좀 덜 울려나. 하지만 나는 겨울 11월부터 1월 정도까지 저녁 5시가 너무 무섭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겨울은 언제부턴가 내게 불행한 계절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안 좋은 일들은 겨울에 자주 일어났고, 더 극대화된다. 일찍 지는 해가 무섭고 어둠 속에서 빛을 내려 애쓸 것이 무섭고 애써도 혼자일 뿐인 것이 무섭다. 겨울에 울면, 그것도 한밤중에 울면 눈물은 금방 말라버려서 쉽게 바스라지고 말겠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버린 적도 없었다는 듯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말라 부스러지겠지. 나는 또 그게 억울해서 더 열심히 울려고 할지도 모른다. 내가 울고 있으니 좀 알아봐달라는 듯이.


53p. 내가 쓴 글에서도 무언가 배어 나오고 있어야 할 텐데.

잼처럼, 마치 잼처럼. 내 글이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좋겠다. 속이 꽉 찬 나의 글을 맛보며 글의 문즙을 느꼈으면 좋겠다.(문즙은 내가 만든 말입니다. 어설프지만 문체의 즙, 과즙할 때 그 말을 한 번 변형해보고 싶었습니다)


59p. 나에게 슬픔은 그냥 내 것이었다. 함께 짊어지거나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내 것.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나만의 것.

다른 이가 나의 슬픔을 알아줬으면, 그래서 위로해줬으면 할 때가 많다. 가끔 공감을 못하거나 내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친구들을 보며 서운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 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슬픔은 온전히 나의 것이니 어떻게 타인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라고 생각해야 했는데 타인에게 너무 많은 기대와 바람이 있었나보다. 타인에게 기대는 순간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다.


62p. 허공에만 떠돌다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했던 질문들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어디에도 닿지 않았을 것 같다. 영원히 돌고 도는 것이 그 질문들이 태어난 이유일지도 모른다.

허공을 떠도는 것이 이유가 된 질문들은 가치가 있는걸까 없는걸까. 누군가는 하늘 위를 지나가는 나의 질문들을 발견하고 잠시 생각에 머무르면 좋겠다. 왜 저 질문들은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했을까, 누군에게서 떨어져나온걸까 하면서. 그러면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78p. 나를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나쁘게 부풀었다. 마음을 뾰족한 바늘로 찌르기 무서워 부푸는 대로 두었던 날들, 누구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일기장들이 아프게 쌓였던 날들.

예전엔 슬픈마음을 풀어내기 위해서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슬픈 일을 일기로 쓰면 그게 영원히 잊히지 않고 기억될 것만 같아서 쓰기 두렵다. 글감은 많지만 쓰고 싶지 않은 글감이다. 그러니 나는 버릴 일기장도, 쌓아놓은 일기장도 없다. 내 안에서 나쁘게 부푼 마음은 계속 커지지 않고 매 순간 터지고 있다. 두려워서 직접 찌르겠다고 마음먹기도 전에 이미 균열이 생겨서 저절로 터져버린다. 그 충격에 나는 매순간 아파온다. 차라리 계속 부풀었으면 좋겠다. 내가 알지도 못한 사이 부풀어서 한 번에 터진다면 딱 한 번만 참으면 되니까. 매일 아플 필요가 없으니까.


87p. 어떤 착각이 정확하게 닿는 지점이 꿈으로 번진다.

피디도 하고 싶고, 디자이너도 되고 싶은 내게는 참 희망적인 말인 것 같다.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하는 것이 현실인데 나는 왜 자꾸 두 개 모두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디자인을 잘 하는 피디가 되고 싶다. 아니면 두 개가 융합된 일을 하고 싶다. 제3의 직업의 생긴다면.. 그것이 만약 허황된 착각이라면 그게 정확하게 닿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다.


3) 표현

뜻을 자세히 알아보고 싶거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단어’가 포함된 문장.

16p. 첫눈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눈물’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단어와 대비되는 ‘첫눈’이라는 산뜻하고 긍정적인 단어로 대치시킨 점이 인상깊다.


30p. 이 슬픔이 너무 거창하다. 거창해서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운 슬픔.

보통 거창하면 자랑하고 싶거나 과시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난 자신이 가진 거창한 것들을 허세있게 자랑하고 과시하는 사람들이 그리 부럽지 않다. 가끔은 관심받고 싶은 속이 너무 드러나니까 안타깝기도 하다.(물론 지인이 좋은 일 있다고 한 두번 자랑할 땐 나도 같이 기쁘다.) 아마 작가님도 슬픔을 이런 관점에서 보신 게 아닐까. 우리가 가진 거창한 것들은 사실 밖으로 드러내면 우스워지기도 한다. 내가 가진 슬픔도 너무 거창하다보니 밖으러 드러내기면 우스워질까봐 내놓질 못한다. 그러니 계속 속으로 삼키고 삼키고…


76p. ‘애처롭다’

애처롭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싶었다. ‘애처롭다’라는 말은 “가엽고 불쌍하여 마음이 슬프다”라는 뜻이다. 내가 애처로운 사람은… 우리 엄마.

우리를 낳고 기르며 희생한 엄마의 수많은 젊은 날들이 애처롭다. 그 시간을 언니와 나에게 주어 고맙고 미안하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돌려받았으면 좋겠어서 빨리 능력을 키우고 싶다. 능력을 키워서, 일자리를 잡고 엄마의 젊은 날을 조금 미루어서 누릴 수 있게 다 큰 성인이 된 나와 함께 즐길 수 있게 돕고 싶다. 낡은 신발도 바꾸고, 어울리지 않는 패딩도 바꾸고, 옷도 여러 벌 사서 아주 귀부인으로 만들고 싶다.


77p. 기다리기도 했을까. 여태 보내주는 중이었을까.

기다림은 수동, 보내줌은 능동. 단지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데, 누군가를 보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의연해 보인다. 기다림은 그리움, 보내줌은 인정과 수용.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다.


81p. ‘사람’의 자리에 ‘사이’라는 단어를 넣어본다.

사람의 자리 중간에 사이라는 단어를 넣는다면 ‘사사이람’.

농담이고, ‘사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의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예전에 중학생 시절 한 친구가 급식줄을 서다 갑자기 수학선생님께 사이라는 말에 대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말을 했었는진 기억이 안 나지만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사이’와 일상생활에서의 ‘사이’의 의미가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1과 10 사이이면 수학적으로 2부터 9까지를 의미한다. 즉 1과 10을 제외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너와 나 사이’라고 하면 수학에서와 달리 너와 나를 포함하게 된다. 당시 그 친구는 이 차이를 궁금해 했던 것 같다. 이건 아마 동음이의어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같은 말과 비슷한 뜻임에도 불구하고 [대괄호]와 (열린 괄호)의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났다.


86p. 생활의 모든 둘레를 잘 돌보고 싶다. 그래야 코앞의 삶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그래야 더 먼 곳의 내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괜찮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약하고 질긴 희망.

‘둘레’! 삶의 모든 궤적을 둘러싼 말. 이 말이 나에게 콕 박혔다. 그냥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 내가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고, 조금 더 알차게 살길 바라는 그 소망을 ‘둘레’라는 단어에 함축시킨 것 같아 쾌감이 느껴졌다. 내가 적합한 단어를 찾지못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을 때 작가님이 자 여기! 하고 주셔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88p. 유영. 방황 아닌 방랑. 야트막.

유영 :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일. | 방황 : 이리저리 헤매어 돌아다님.

방랑 :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님. | 야트막하다 : 조금 얕은 듯하다.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른 말이다. 이것과 비슷한 느낌의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낙관’과 ‘낙천’이다. ‘낙관’은 ‘인생이나 사물을 밝고 희망적인 것으로 봄, 앞으로의 일 따위가 잘 되어 갈 것으로 여김’이지만 ‘낙천’은 ‘세상과 인생을 좋은 것으로 여김.’이다. 낙관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만 무조건 긍정이 아니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느낌이라면 낙천은 무조건적으로 미래를 긍정하며 현실을 대충살아도 된다고 외면하는 느낌이다. 단어에 대한 느낌은 개인적이겠지만 그래서 나는 낙관을 지향하고 낙천을 지양한다. 대외활동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 난 늘 “현실을 비판적으로,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000입니다.”라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사실이니까. 난 항상 현실을 아주아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찾는다. 하지만 미래까지 비판적으로 보진 않는다. 미래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고, 비판적인 시선은 비관과 부정으로 흘러가기 쉽기 때문이다. 미래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듯 아주 희망차고 소중히 바라본다. 내가 가진 재산 중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비관해선 안 된다. 그러니 낙관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이는 내 현실까지 긍정적으로 바꾸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4) 기타

36p. 내가 선택한 것 중 가장 편리한 것은 다 괴로움으로 이어졌다.

이건 정말이다. 인생은 아주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해야 성장한다. 싫어하는 것을 하게 되면 어느샌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 싫은 일을 죽어도 하기 싫지마 억지로라도 해야 괴로워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편한것들을 자주 하면 평생 편해지지만(예시 : 백수)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자주 하면 그 총량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언젠가 소멸해버리고 남은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편안히 채울 수 있다. 그러니 우린 후자를 택하는 걸로…(눈물)


끝맺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에세이었지만 생각보다 울림이 컸다. 공감가는 구절이 많았는데 문장을 표현하는 방식이 굉장히 섬세했다. (그런 구절들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기차에서 간이 책상을 펴고 노트에 옮겨적기 시작했다. 그걸 본 옆자리 할머니께서는 “공부 열심히 하네~:)”라고 해주시기도 했다.ㅎㅅㅎ 책을 읽으며 기차를 타니 시간이 금방 지나서, 알찬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작가님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때 나는 그 감정을 투박하고 서투르게 표현해왔기 때문에 늘 표현방식이 다채롭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 결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님은 감정을 세밀하게 관찰한 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시되, 약간의 서정적인 느낌을 곁들여 표현하셨다. 인터넷에 널리고 널린 흔한 감성글 혹은 양산 에세이와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더 만족스러웠다. 일상에서 발견한 여러가지 사건 및 감정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내려 하신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L1. 내성발톱의 역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