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까만 새가 이사 왔대>
아무도 본 적 없는 '까만새'를 둘러싼 숲의 웅성거림
그 안에서 드러나는 말의 힘과 마음의 진짜 모습
20대의 나는 '선택적 가십걸'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그 얘기를 나누는 것이 흥미로웠다.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재미없는 것은 없었다. 단순한 연애 이야기부터 복잡한 감정의 얽힘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흥미진진한 서사였다. 나는 이야기의 수집가였고, 동시에 유통업자였다.
규칙은 간단했다. 나만 처신 똑바로 하고, 뒷말 나올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래동화도 아니고 실제 일어난 일들이고, 내가 창작해낸 것도 아니며, '신뢰할 만한 측근'에게서 직접 들은 팩트니까.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들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내가 아니니까. 나는 단지 이미 흘러 다니는 정보의 강에 발을 담그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처음엔 특별한 비밀을 공유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경로로 들었을 때, 그 특별함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어? 이거 비밀이 아니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얘도 알고 쟤도 아는, 이미 공공재가 된 정보라면... 나라고 입을 다물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 모두가 소비하고 있는 이야기에서 나만 빠져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며, 언어라는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을 멈추게 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이러했다. 나는 A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B에게 전했다. 단지 재미있는 안주거리 정도로 여기며.
그런데 B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B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너는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됐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A한테 들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더라고."
알고 보니 B는 이미 그 이야기를 당사자로부터 직접 들어 알고 있었다. 비밀로.
하지만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이미 여러 사람에게 퍼져있었던 것이다.
B는 당사자에게 이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을 것이다.
자신이 비밀로 털어놓은 이야기가 이미 여러 경로로 돌고 있다는 소식을.
소문은 계속 퍼졌고, 결국 내 이름까지 거론되며 또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소문을 퍼뜨리던 가해자에서 소문의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당사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런데 그는, 그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와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 나를 원망하는 기색도, 어색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의 일상적인 만남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때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가 나를 탓했다면, 화를 냈다면, 심지어 무시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하고, 어떻게든 사과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태연함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침묵은 어떤 비난보다 무거웠다.
그는 어른이었고, 나는 철없는 20대였다. 그 순간 누가 더 성숙한지는 분명했다.
그는 나에게 분노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으로 나를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 침묵이 나를 바꿨다. 어떤 훈계나 비난보다도 강력하게.
나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여겼던 그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는 것을. 내가 정보의 유통업자 역할을 할 때, 그 정보의 중심에는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무엇보다 나는 이런 질문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그 정보들은 정말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여러 사람을 거쳐 변형된, 또 다른 창작물이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언제 누군가를 말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했을까?
결국 그는 그 모든 속세를 떠났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그의 침묵이 나를 바꾼 후였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혹시 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그때의 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시 내 침묵이 누군가에게는 공범의 증거가 되고 있지는 않을까.
말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때로는 침묵이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된다.
20대의 내가 생각난 <까만 새가 이사 왔대>의 멧돼지. 영락없는 과거의 나다.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질투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말로써 규정하고 배제하려 했던 그 어리석음. 멧돼지가 "얘들아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라며 소문을 퍼뜨리는 모습에서 나는 내가 휘둘렀던 언어의 무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멧돼지가 되기로, 까만새가 되기도 한다. 말하는 자의 자리에서, 때로는 말해지는 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나는 그림책 속 멧돼지를, 내 과거의 그림자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간밤에 숲에 '까만새'가 이사 왔다는 소문이 돈다.
아무도 본 적은 없지만, 동물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까만 열매만 먹겠네", "까만 똥만 누겠네" 하며 수근거린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멧돼지는 기분이 나쁘다. 자신이 이사 왔을 때는 조용했는데 지금은 온 숲이 까만새 이야기뿐이니까. 멧돼지는 악의적인 험담을 지어낸다. "까만새는 냄새가 고약하고 나쁜 소식만 몰고 온다"며 숲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며칠간 계속되는 험담에 지친 동물들. 마침내 호랑이가 "이제 그만해!"라고 소리치자 멧돼지는 놀라 나자빠진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멧돼지는 여전히 구석에서 소곤소곤 혼잣말한다. "얘들아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 까만새는 말이야..."
나의 20대 경험을 돌이켜보면, 《까만 새가 이사 왔대》가 던지는 질문들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소문은 누가 만들며, 왜 퍼지는가?"
"우리는 누구를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를 침묵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나는 과거의 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림책 속 까만새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존재는 있지만 목소리는 없고,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의 추측과 상상으로만 규정된다.
내가 겪은 사건의 당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이야기는 A에게서 시작해 나를 거쳐 B에게, 그리고 다시 여러 경로를 통해 퍼져나갔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모든 담론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말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해석의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정보'로 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멧돼지가 "얘들아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라며 이야기를 퍼뜨리는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본다.
내가 A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B에게 전할 때, 나는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었다.
"A한테 들었는데, C도 알고 D도 알더라고"라며 소문의 생태계를 정교하게 분석하는 관찰자였다.
멧돼지의 질투는 단순한 정서가 아니다. 그것은 말의 힘,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려는 권력 행위다. 나 역시 그랬다.
'재미있는 안주거리'라는 명목으로 누군가의 사생활을 소비하면서, 그 정보를 가진 자로서의 우월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가진 언어를 통해 사회적 지형을 재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책에서 다른 동물들은 처음엔 웃고, 나중엔 지겨워하며, 마지막엔 침묵한다. 이 침묵이야말로 구조를 지속시키는 무언의 공범이다.
내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와 F가 나에게 "A랑 당사자가 독대했는데 네 이름이 계속 나왔다더라"고 전해줄 때, 그들도 이 소문의 생태계에 참여하고 있었다. 듣고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것 자체가 공범 행위였다. 우리는 모두 멧돼지의 말에 귀 기울이는 동물들이었고, 침묵으로 그 구조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나는 언제 누군가를 말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당사자가 내게 보여준 침묵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무언의 대답이었다.
그는 나에게 분노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으로 나를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그 정보들이 정말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여러 사람을 거쳐 변형된 또 다른 창작물이었는지 의문스러웠다. 무엇보다 나는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책의 마지막에서 멧돼지는 여전히 소곤소곤 험담을 이어간다. 호랑이의 제재에도 말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모두가 언제든 위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소문을 퍼뜨리던 가해자에서 소문의 소재가 되었듯이, 오늘 말하는 자가 내일은 말해지는 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피해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내가 만든 소문의 구조 안에서 또 다른 화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진짜 피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당사자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언제 타자에 대해 침묵했고, 그 침묵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나는 내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준 적은 없었는가?"
"혹은 나 자신이 까만 새였던 적은?"
이런 질문들이 지금도 나를 따라다닌다.
말은 돌이킬 수 없고, 침묵 역시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당사자는 모든 속세를 떠났지만, 그의 침묵이 내게 남긴 무게는 어떤 말보다도 강력했다.
결국 이 그림책이 보여주는 것은 '이야기 권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 말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가는가이다.
누군가를 말할 때, 말하지 않기로 할 때, 그 모든 순간 우리는 이미 '사회'를 만들고 있는 존재들이다.
누군가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그 말에 힘을 부여하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이다.
그 권력의 고를 스스로 끼워온 나는, 그 무게를 자각하게 되었고,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말은 때로 칼보다 깊다.
침묵은 때로, 가장 큰 대답이다.
나는 이제, 말과 침묵 사이에서
조금씩 멈춰 서는 법을 배운다.
<까만 새가 이사 왔대> 정영감 作을 읽고...
글쓴이 │ 투유니즈맘 (Twoyooniiz 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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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그림책이었어요.
아이들에게 읽어주면서도 계속 생각했어요.
이건 정말 아이들만을 위한 책일까?
어떻게 읽어줘야 할지, 어떤 마음으로 마주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던 책이었어요.
결국 이 책은 제 브런치 글감이 되었고,
저는 그 속에서 저를 아주 적나라하게 꺼내게 되었네요.
30대 중반이 된 지금,
저는 점점 더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더디게 배운 침묵 끝에 남긴,
저만의 고해성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