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들린 것들

침묵 너머의 진심을 기다리는 일에 대하여, <고양이 카노>의 묵음의 철학

by 투유니즈맘
상대와 잘 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배워야 했던 건, 듣는다는 일의 무게였다




내 차례를 기다리느라, 너의 마음을 놓쳤다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막힘 없이 이어지는 대화, 적절한 리액션, 공감까지 더하는 사람.

그래서 늘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나도 그래', '나도 그런 적 있어' 그 말 뒤에 붙일 나의 이야기를.

상대방 경험에 맞춰 내 에피소드를 나누는 것이 진짜 소통이라 여겼다.

그것이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라는 증거라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듣는다는 건, 사실상 말할 타이밍을 노리는 일이 되었다.

언제 끼어들지, 어떤 에피소드로 공감을 표현할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나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의 말은 그저 타이밍을 재는 배경음처럼 흘러갔다.

상대가 "어제 정말 힘든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면, 나는 이미 내 힘들었던 경험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어제'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내 '그때 그 시절'을 꺼내려고 안달이었던 거다.



물론 진심은 있었다. 잘 들어주고 싶었고, 좋은 반응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제대로 들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부분 내가 뭔가를 말했을 때였다.

그러다가 가끔 타이밍을 놓칠 때가 있었다.

내가 준비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의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갑자기 조용해져버리는 순간들.

예전엔 그런 순간이 무척 아쉬웠다. 뭔가 제대로 반응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그런데 놀랍게도, 그럴 때 상대방이 오히려 더 고마워했다.

"얘기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들었을 뿐인데.

그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상대방은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꺼낼 수 있었구나.

내가 끼어들지 않고 기다려줄 때, 그 사람은 자신도 미처 몰랐던 마음까지 꺼내놓을 수 있었구나.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 '말해야 듣는 것이다'라는 내 오래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고도 관계가 깊어질 수 있다는 걸, 말을 아끼는 태도가 때로 더 많은 신뢰를 준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어렵다.

상대의 몇 마디에 반사적으로 판단하고, 머릿속에서 내 말을 굴리게 된다.

나의 침묵이 길어지면 불안해진다.

하지만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답'보다 '들음'을 선택하는 법을.



그런 내게 <다섯 번 울어야 말하는 고양이 카노>를 만났을 때, 첫 페이지부터 마음을 콕 찍었다.

다섯 번 울어야만 말할 수 있는 카노.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카노는 계속 울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울음에 귀 기울이지 않는 가족들. 모두가 저마다의 판단대로 카노를 위한다며 바쁘게 움직일 뿐.

아, 나도 그랬구나. 다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듣지 못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울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는 내 말할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울음 다섯 번, 그 안에 담긴 말들



다섯 번 울어야만 말할 수 있는 카노.

어느 날 카노가 하루종일 잠만 자자, 걱정된 가족들이 하나둘 나선다.

으쓱으쓱 아저씨는 병원에, 깜빡깜빡 할머니는 산책에, 멋쟁이 아줌마는 목욕에, 장난꾸러기 쫑이는 함께 춤을 추자고 한다.

카노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울며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그 울음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카노를 위한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카노의 마음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카노가 다섯 번째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된 카노의 이야기를, 과연 누가 진심으로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사랑은 귀를 여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는 한때 ‘잘 듣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건 결국 ‘잘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 거기에 맞는 적절한 리액션과 공감의 말들을 떠올리느라 바빴다.

대화의 목적이 ‘공감’이 아니라 ‘내 차례’를 기다리는 일이 된 셈이다.



마음을 건네는 사람보다 말을 준비하는 나에게 더 집중했던 그 수많은 순간들.

그러니 사실, 나는 듣지 않았던 거다.



아이를 키우며 그 사실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된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 나는 먼저 해석부터 했다.

‘배가 고픈가? 졸린가? 심심한 건가?’

아이의 마음을 묻기보다, 기다리기 보다, 내가 정한 원인과 해결책으로 앞서버리곤 했다.

마치 정답을 알아맞히는 것처럼.



그 순간에도 아이는 계속 울고 있는데.

그 울음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아직 단어로 풀어내지 못한 마음의 흐름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걸 끌어올릴 시간도 주지 않고 자신 있게 단정 지어버린다.

내 안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섯 번 울어야 말하는 고양이 카노>는 그렇게 내 안의 무심한 확신을 조용히 뒤흔든다.

카노는 계속 울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하지만 누구도 카노의 울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카노를 위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카노의 ‘마음’을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말 아래,

나는 얼마나 많은 관계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적이 있었을까?



아이의 마음, 친구의 고민, 혹은 내 안의 조용한 목소리까지.

나는 너무 자주,

누군가가 다섯 번 울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해버리고, 결정하고, 움직여버렸다.



그래서 <고양이카노> 속 다섯 번의 울음은 단순한 이야기 장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우리가 자주 놓치는 비언어의 말들, 들어주지 않아 침묵으로 가라앉는 목소리들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카노의 울음은 단지 말문을 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시간’이고 ‘용기’다.

그 울음 하나하나는 마음의 문턱을 하나씩 넘는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을 보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진짜 소통은 누군가의 리듬을 기다리는 데서 시작된다.

조급하게 끼어들지 않고, 상대가 자기 마음을 꺼낼 수 있는 시간을 인정해주는 일.

그건 참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답답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여백이 없으면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는 걸, 나는 점점 더 자주 실감하게 된다.

마치,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내게 다가와 포옥 안기던 그 순간들처럼.



카노는 조용히 묻는다

‘사랑’은 상대의 말을 기다려주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좋은 의도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다섯 번 울음을 지나쳐왔을까?



다섯 번의 울음이 말이 되기까지

필요한 건 대답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진짜 듣는다는 건,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다섯 번 울어야 말할 수 있는 고양이 카노> 신은숙 作을 읽고...








글쓴이 │ 투유니즈맘 (Twoyooniiz Mom)

읽음談(담)에. All rights reserved.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글을 씁니다.
7, 8월은 둘째가 잔병치레를 계속해서 하루하루가 쉴 틈 없이 흘러갔네요.

게다가 또 하고 싶은 게 많다 보니 이것저것 끄적이느라 브런치에는 손이 잘 안 가게 되었어요.
이번 달에는 다시 자주 글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사실 블로그에는 그림책 리뷰를 꾸준히 쓰고 있었어요.
브런치에 쓸 그림책들이 차곡차곡 밀려 있는 상황입니다.

9월에는, 제 인생을 박박 긁어 모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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