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도 함께하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 <방괴물>의 가르침
이 글은 신앙 안에서 경험한 내면의 여정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종교적 언어로 풀어냈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두려움과 동행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둠은 언제나 곁에 있다.
문제는, 내가 그 어둠 속에서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것이다.
2006년 12월 나는 드디어 미사보를 쓸 수 있게 되었고, 라파엘라가 되었다.
내 신앙의 첫 시작은 단순했다.
우리집을 제외하고 외갓집 모든 식구들이 모두 카톨릭 신자였던 덕에 외할머니네 가면 가끔 성당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미사보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 예뻐 보였다.
그 하얀 레이스가 햇살에 반짝이며 얼굴을 감싸는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다.
‘나도 써보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세례를 받았다.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도, 신앙적인 고민도 없었다.
처음 성당에 발을 들였을 때의 어색함은 아직도 기억난다.
무겁게 느껴지는 분위기,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교중 미사, 따라가기 바빴던 미사 전례들.
하지만 그런 낯설음 속에서도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종교를 가지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
좋은 일들이 많아지고, 하느님이 내 삶의 고비를 다 치워주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 말이다.
그 기대는 유학 시절 영국에서 산산이 무너졌다. 첫 연애는 참혹하게 끝났고, 학업에서는 자꾸만 낙오했다.
매일 기도했는데, 매주 성당에 나갔는데, 왜 내 삶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지는 걸까?
나는 하느님 앞에서 울분을 토했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나는 기도라는 것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일이고, 하느님은 그걸 들어주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도 내 뜻만 고집했고, 응답이 없으면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미래를 직접 조작하고 싶어졌다.
타로카드를 자주 뽑았고, 신점도 봤다.
미래가 보이면 두려움이 줄어들 것 같았고, 내 뜻대로 움직이면 덜 외로울 줄 알았다.
변화는 청년성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찾아왔다.
창세기를 공부할 때는 10주 이상의 공부 기간과 3박 4일 연수기간 동안 불신 가득, 이걸 왜 시작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탈출기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뭔가가 달랐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며 불평하고 원망하던 이야기.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그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맴돌았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도 하느님을 끊임없이 원망했으니까.
그 순간부터, 신앙이란 단어가 조금 다른 빛깔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깨달음과 함께 내 안에서 무언가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타로카드를 더 이상 뽑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찾아다니던 신점도 끊었다.
미래를 미리 알고 싶어 하고 내 뜻대로 조작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마르코복음을 공부할 때는 더욱 확실해졌다.
예수님조차, 십자가를 앞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라며 두려움을 고백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셨다.
그 구절을 읽고 난 후 많은 생각 끝에, 나는 신년운세나 토정비결 같은 것들을 완전히 끊어냈다.
미래를 알려고 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요근래, 망태할아버지가 무섭다고 잠을 거부하던 첫째에게 읽어주기 위해 그림책 <방괴물>을 빌렸다.
아이의 무서움을 없애기보다, 그 무서움 속에 함께 머물러주는 이야기였다.
솔이와 괴물의 관계를 따라가다 보니, 내가 지나온 신앙의 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솔이는 혼자 방에서 자는 것이 무서워한다.
문틈으로 보이는 괴물의 손가락과 "사사 삭" 소리 때문이다.
엄마는 "마법의 가루가 들어있는 책"을 읽어주며 토토, 토리, 토모가 솔이를 지켜줄 거라고 말해준다.
솔이가 잠들자 정말로 토토, 토리, 토모가 나타나 솔이를 지켜준다.
하지만 보라색 괴물, 오렌지색 괴물들도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괴물들이 사실은 솔이를 해치려 한 게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어서" 온 거였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괴물들이 솔이의 친구가 되어 밤을 조용히 지켜주기로 약속한다.
아침이 되자 모두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그림책 속 솔이는 혼자 방에서 자는 것이 무서웠다.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괴물의 손가락, 밤마다 들려오는 "사사 삭" 소리는 아이의 상상 속에서 점점 더 커져갔다.
엄마는 그런 솔이를 위해 괴물을 없애주지 않았다.
대신 마법의 가루가 들어 있는 책을 읽어주며, 그 무서움과 함께 머무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솔이는 곧 깨닫는다.
괴물은 해치러 온 존재가 아니라, 친구과 되고 싶어 다가온 것들이었다는 걸.
이야기의 배경은 어린아이가 느끼는 무서움이지만,
나는 그 공포의 매커니즘이 어른이 된 지금의 나와도 닮아있다는걸 느꼈다.
이 단순한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이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엄마의 방식이, 내가 지나온 신앙의 길과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나 역시 살아오며 여러 번 '괴물'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괴물들은 과한 욕심이 불러온 선택들의 결과들이었고, 블랙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의 소용돌이였으며,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던 무력감의 시간들이었다.
처음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도망쳤고, 외면했고, 기도하며 애원했다.
이 괴물들을 없애달라고.
하지만 신앙이란, 누군가 대신 괴물을 물리쳐주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괴물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나를 조심스레 이끄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나를 지켜보며, 때로는 말없이 머물러 주는 어떤 존재의 숨결을 느끼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괴물들을 피하려 할수록 그 괴물은 더 거대해졌고, 괴물을 마주할수록 그것의 진짜 모습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나쁜 일'이라고 부르는 것들, '시련'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거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나도 광야를 지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무너진 기대들, 더딘 걸음으로 이어진 나의 시간을 곧 내 신앙의 광야였다.
하지만 그 광야를 지나며 나는 조금씩 바뀌어갔다.
응답을 받지 못해도 여전히 기도하게 되었고, 해결되지 않아도 여전히 기대하게 되었다.
광야가 끝나기를 바라기보다, 그 광야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자주 묻고 듣게 되었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광야를 빨리 지나가야 할 시간으로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광야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걸을.
우리는 늘 '이 힘든 시간이 지나야 좋은 일이 생길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지금 이 힘든 순간에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고통을 성장을 위한 재료로만 보려 하지 말고, 그 고통 자체 안에서도 만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괴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문틈 너머 어둠은 존재했고, 나의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배웠다.
괴물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괴물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을 갖는 법을.
그것이 아이가 성장하는 방식이듯, 믿음도 그렇게 자라는 것 아닐까.
솔이가 괴물과 친구가 되는 순간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는 단순한 화해를 넘어선다.
이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괴물이 변한 것도 아니고, 솔이가 변한 것도 아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그리고 그 관계를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이 가져다 주는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변하는 것.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내 마음가짐이 변하는 것.
이제 기도는 더 이상, 내가 바라는 걸 얻기 위한 주문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조율하는 시간도 아니다.
오히려 그 기도 안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얻게 된다면,
그건 이미 충분한 응답 아닐까.
기도의 본질은 변화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바라는 마음 자체가 변화하는 것.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변화하는 것.
솔이가 괴물을 더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는 마음까지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변화는 느리게, 마치 속삭이듯 내 안에서 자라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둠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어떤 밤은, 그 어둠 속에 함께 머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견딜 수 있다.
신앙이란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라기 보다, 그 어둠 속에서도 나를 붙들어주는 현존을 믿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과정을 돌아보며 생각해본다.
내가 만났던 괴물들 '실패, 상실, 외로움, 불안'은 나를 해치려 온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둠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함께 머무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제, 나는 그 어둠조차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방괴물> 조상미 作을 읽고...
글쓴이 │ 투유니즈맘 (Twoyooniiz 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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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주 금요일부터 10박 11일간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여행 전에 미리 예약만 걸어두면 되지!"
"나는 여행중에도 글을 쓸 수 있어!"
라고 자신했지만...
영유아 둘을 데리고 여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더라구요.
결국 지난 한주는 브런치 글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다시 차분히,
쌓여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자주 인사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