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운설 Nov 07. 2019

[서평, 리뷰] 양들의 침묵

영원히 멈추지 않을 양들의 비명소리

  [양들의 침묵]. 원작 소설도 명작이다. 그러나 동명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색상 5관왕의 그랜드 슬램에 등극하여 원작보다 더 유명세를 얻은 바 있다. 특히 스릴러 장르로는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평단과 박스 오피스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꽤 많이 관람했다. 이미 읽었던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 작품들을 감상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대부분은 원작을 읽지 않은 채 영화를 본 경우이다. 하지만 원작이 있는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원전을 찾은 사례는 거의 없다. 뒤늦게 소설을 펼쳐든 사례는 [반지의 제왕]이 유일하나 아쉽게도 끝까지 마무리 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양들의 침묵]은 내가 영화를 먼저 감상한 다음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들춰 본 최초의 원작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자 한 이유는 극 중 가장 강렬하고 쇼킹한 장면에 있었다. 주인공 한니발 렉터가 보일 경사의 내장을 도려낸 후 양팔을 천으로 묶어 천장에 천사처럼 높이 매달아 놓은 장면이다. 아마도 [양들의 침묵]의 인상적 을 하나만 택하라고 하면 누구나 대부분 이 장면을 택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원작 소설에서 어떻게 묘사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원작 소설과 이를 각색한 동명 영화가 너무나 유명해서 줄거리를 따로 소개하지 않겠다. 작품 곳곳에 장치된 복선과 갈등요인, 영화와 원작의 차이점을 위주로 리뷰하려고 한다.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 역할을 맡은 앤서니 홉킨스의 열연이 인상적이다. 그가 출연한 시간을 실제로 재봤다. 한니발은 주로 스탈링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출연한다. 한니발이 스탈링(어쩌면 관객)을 바라보는 시점인, 그의 뒷모습이 나오는 장면까지 포함하여 대략 18분 전후 분량으로 등장한다. 정확히 측정하지 아니지만 전체 러닝타임 118분 중 1/6이 채 되지 않는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출연했음에도 한니발 출연 분량이 많다고 착각하는 것은 그만큼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에서 제시된 몇 가지 복선을 소개한다.
 
  첫째, 렉터의 손가락이다. 영화에서는 렉터 손가락에 대한 언급이 없다. 소설에서 렉터의 왼손가락은 6개로 묘사된다. 중지가 두 개이다. 기형적인 육손은 경찰관의 시선을 6개 손가락에 머물게 하여 그가 만든 사제 열쇠를 오른손에 숨기는 데 결정적 역햘을 한다.
 
  둘째, 존 브리검 사격교관의 격발 테스트와 조언도 중요하다. 분당 80회 이상 양손으로 격발하도록 스탈링을 독려한다. 또한 총을 핸드백에 두지 말고 늘 권총집에 차라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쏴야 할 땐 망설이지 말고 주저 없이 쏘라고 강조한다. 브리검의 조언으로 스탈링은 버펄로 빌에게 희생당하지 않고 그를 사살하게 된다.
 
  셋째, 피해자들의 목에서 발견된 나방 번데기는 범인의 신원을 밝히고 스탈링이 리처즈 패션의 의류 수선을 담당했던 리프먼 부인 집에서 만난 남성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양들의 침묵]은 작품이 전개되는 속도가 빠르다. 루스 마틴 상원의원의 딸 캐서린 마틴이 납치되고 칠턴 박사가 범인에 대한 정보를 렉터에게 받는 조건으로 시설이 좀 더 나은 교도소로 이송되는 장면이 전체 분량의 절반이 지날 때 나온다. 작품이 본격적으로 갈등구조에 진입하기 전에 이미 진범이 누구인지, 렉터가 어떻게 진범을 알게 되었는지가 서술되어 있다. 어찌 보면 맥이 빠질 수 있는 빠른 전개이지만 생각지 못한 갈등 구조가 이어지면서 예상 밖의 긴장감이 이어진다.
 
  대부분 독자들은 클라이맥스에서 벌어지는 갈등 서사가 한니발 렉터와 스탈링, 그리고 범인 버펄로 빌 사이에서 이루어지리라 여길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예상했다. 그러나 원작은 의외 인물들로부터 갈등을 던진다.
 
  스탈링이 범인을 쫓는 데 있어 걸림돌 역할을 하는 루스 마틴과 법무부 장관 보좌관 렌들러의 등장이다. 칠턴 박사의 모략 덕분에 루스 마틴은 이미 잭 크로포드 부장과 스탈링에게 부정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링이 자신의 딸인 캐서린의 은밀한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발견하자 더욱 못마땅히 여겼다. 설상가상으로 렌들러는 스탈링에게 더 이상 수사에 참여하지 말고 연수원에 복귀한 후에 이후 소집될 청문회에 출석할 것을 지시한다. 렉터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스탈링이 실수를 범했다는 오해까지 더해져 연수원을 졸업한 이후 FBI에서의 미래가 암울해진다.
 
   유급에 처할 위험도 스탈링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그녀가 렉터를 만나고 버펄로 빌을 뒤쫓게 된 것은 연수생 신분으로 잭 크로포드 부장을 도왔던 데서 시작되었다. 임무 수행 중 임시 FBI 직원 신분증을 발부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연수생 신분에 불과했기 때문에 수업과 시험을 빼먹을 수 밖에 없어 계속 수사를 진행하면 유급이 불가피해진다. 마틴 상원의원과 렌들러와의 마찰에 이어 유급마저 당한다면 그녀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질 텐데 유급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과감히 범인을 찾아 나선다.
 
  잭 크로포드에게도 어려운 상황이 이어진다. 그에게는 죽어가는 아내가 있다. 영화에서는 깔끔하고 냉정한 리더로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위중한 아내를 장기간 간호하면서 병구완에 찌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힘든 와중에도 스탈링이 성장할 수 있도록 무덤덤히 도와준다. 사랑하는 벨라가 끝내 세상을 뜨자 남모르게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자신마저 마틴의 견제에서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스탈링에게 유급되지 않도록 수사에서 손을 떼라고 얘기하는 한편 언제나 마음의 쓸데없는 감정은 얼리고 목표만을 보라고 조언한다.
 
  한니발 렉터와 스탈링의 만남에는 의외로 긴장감이 높지 않다. 오히려 한니발 렉터의 집요한 질문에 돌직구나 화제 돌리기의 화법으로 페이스를 잃지 않는 스탈링의 대답이 귀엽게 느껴진다. 한니발 렉터가 스탈링을 마음에 들어했던 이유는 지적이면서도 자신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돌하게 화제를 바꾸어 대화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그녀의 열망에 있지 않았을까 한다.
 
  스탈링은 렉터의 말대로 값비싼 향수에 싸구려 신발을 신은 촌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한 연수생이다. 그녀는 보안관이었던 아버지를 어려서 잃고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성공의 희망을 간직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다. 한치 여유 없이 살아온 만큼 그녀가 과거를 회상할 때는 왠지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묘사된다. 그녀에게 과거는 되돌아 가고 싶지 않은 아픈 추억이다. 보안관인 아버지와 행복했던 시절은 잠시, 아버지가 강도에 살해당한 후 생활고에 지친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을 위해 그녀를 사촌에게 맡기게 된 것은 내내 트라우마가 된 듯하다.
 
  그녀는 종종 양들이 비명 지르는 악몽에 시달리다 깬다. 그녀에게 양들이 내지르는 울음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스탈링은 양들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깨어 사촌 이모 내외가 그것들을 도살하는 장면에 놀라 자신이 아끼던 한나(말)와 함께 사촌 이모 목장에서 도망친다. 말과 양을 도살하는 목장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새벽녘 울음소리에 무의식적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녀에게 양들의 울음소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게 하는 계기이자 원동력이다. 어린 소녀에게 희망 없는 질곡 어린 환경에서 나도 모르게 용기를 내어 헤쳐 나가려는 성공의지를 일깨우는 단초일 것이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얻어 내기 위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녀는 늘 양들이 울부짖는 꿈을 꾸고 문제가 해결되면 잠시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그래서 렉터는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들의 울음소리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성공에 대한 갈망이 언제나 이어질 것이기에. 그러나 스탈링의 활약으로 그녀의 양들은 당분간 울부짖지 않고 침묵하리라.  
 
  영화 포스터 이미지 덕분에 [양들의 침묵]하면 나방이 떠오른다. 조디 포스터 입을 대신해 그려진 나방은 해골박각시나방이다. 클라우스 목에서 발견되어 스탈링이 진범을 알아보게 해 준 나방이다. 번데기는 변신을 의미한다. 버펄로 빌, 빌리로 불린 연쇄 살인범 제임 검은 성전환 수술이 거부당한 인물이다. 자신이 가진 성 정체성으로 변신하지 못하자 자신의 갈망을 이루기 위해 비슷한 체형을 가진 여성들을 납치하여 살해한 후 그녀들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꾸미려 한다. 이루지 못한 변신을 하기 위해서다. 제임 검과 마찬가지로 스탈링은 곤궁과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갈구하는 성공에 다다르기 위해 양들의 울음소리라는 변신의 기폭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다른 점이 꽤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하여 소설 흐름을 따를 필요는 없다. 영화가 각색상을 수상할 정도라면 대본이 나름대로 탄탄하게 구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면 가끔씩 뭔가 앞뒤 맥락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원래 러닝타임보다  20분가량 단축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감독판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중에 필자가 중요하다고 본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라스페일의 자동차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원작은 차량 등록부를 조회하고 자산관리인의 도움을 얻어 클라우스 신체 일부가 있는 자동차를 발견하는 반면 영화에서는 전화번호부를 검색하여 발견한다고 설정되었다. 더욱이 자동차를 발견한 후 원작에서는 방송국 기자들과 실랑이 끝에 스탈링이 곤궁에 몰리는 장면이 묘사된 반면 영화는 이 부분이 생략되었다.
 
  둘째, 피해자들의 목에서 발견된 나방이다. 원작은 킴벌리와 클라우스의 목에서 발견된 나방이 각각 검은마녀나방과 해골박각시나방 2종류라고 시차를 달리하여 밝힌다. 영화에서는 킴벌리 목에서 발견한 나방을 해골박각시나방 한 종류로 설정한다.
 
  셋째, 렉터 박사가 사제 수갑 열쇠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전자에서는 정신의학 연구원이 볼펜을, 보호사가 클립을 실수로 렉터에게 유출하였다. 한편 후자는 칠턴 박사가 부주의하여 볼펜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넷째, 전술한 바 대로 렉터 박사의 탈옥 장면이다. 소설은 펨브리와 보일이 교도관으로 설정되었다. 렉터는 보일을 탁자 다리에 수갑을 채운 후 그를 살해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영화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창조한 장면인 보일 경사의 사체를 천장에 천사의 모습처럼 매달아 놓았다. 살해당한 두 명은 교도관이 아닌 경사이다.
 
  다섯째, 렉터가 루스 마틴 상원의원에게 알려준 범인 이름이 다르다. 사실 렉터는 거짓으로 이름을 지어 상원의원을 농락하였다. 원작은 빌리 루빈으로 알려줬다. 빌리 루빈은 일종의 아나그램이다. 철자를 재조합하면 대변을 이루는 색소이자 칠턴 박사 머리 색깔을 의미한다. 영화는 로이스 프렌드로 알려 준다. 이 역시 아나그램으로 재배열하면 황철광을 뜻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는 앤서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가 열연한 덕에 힘입어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5개 부문을 석권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여 원작 이상의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플롯이 전개되는 흐름이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 구조와 주변 인물들이 극 중 차지하는 역할을 고려하면 원작이 훨씬 탄탄하고 입체적으로 그려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이 있다.영화가 꼭 원작 소설대로 그려질 필요는 없지만 한니발 렉터와 스탈링, 잭 크로포드가 풀어 나가는 재미는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소설에 비할 바가 못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