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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Dec 27. 2019

[서평, 리뷰] 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

전설들이 깨어나는 시간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누구일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논쟁적인 질문이다. 펠레, 마라도나, 메시, 호나우두, 호날두. 모두 기라성 같은 위대한 선수들이다. 아마도 질문에 답하는 이들이 선호하는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최고로 꼽는 답이 달라질 것이다. 피지컬, 테크닉, 카리스마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A급 대표팀을 영광의 자리로 이끈 리더십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나는 펠레를 1순위로 꼽고 싶다. 사상 최초로 월드컵 3회 우승을 이끌며 줄리메컵을 영원히 조국 브라질에 안긴 업적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을 읽는 내내 떠올린 질문은 바로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는 누구?'처럼 각 분야에서 누가 최고인가였다. 특정 시대에 최고 선수를 꼽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시대를 아우르는 최고 선수를 꼽자면 활동 시기가 달라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어찌 보면 굳이 최고의 선수를 가릴 필요가 있는가 싶기도 하다. 한 명 한 명 그들이 남긴 위대한 족적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은 음악이란 예술 영역에서 최고를 다툰, 저자의 표현대로 '전설 속의 거장' 25명의 생애를 다룬다. 익숙한 이름도 있고 처음 접한 대가도 있다. 본문에는 나와 같은 클래식 입문자뿐 아니라 클래식에 정통한 마니아들까지 클래식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흥미로울 내용들이 가득하다.  '프리츠 분덜리히'. 최고의 독일 가곡, 리트 테너이다. 서재에 꽂혀 있는 그의 베스트 앨범 표지에 이렇게 쓰여있다. '대체할 수 없는 목소리'라고. 슈베르트 가곡을 노래하는 미성. 가슴을 울리는 잔잔한 표현력. 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분덜리히가 전설의 3 테너라는 엔리코 카루소, 유시 비욜링, 요제프 슈미트와 어깨를 견줄만한 테너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접하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이 독자들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일까? 주저 없이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공연과 레코딩의 주역인 전설적인 지휘자, 연주자, 성악가와 같은 마에스트로들의 삶과 에피소드와 거장들의 레퍼토리를 다룬다는 점이다. 이 것이 수많은 클래식 서적과 다른 가장 큰 차별성이다. 이 책은 흔한 클래식 작품과 작곡가 위주의 해설서가 아니다. 대개의 클래식 서적들은 음악가의 일생을 다루면서 그가 남긴 작품을 소개한다. 또한 작품과 관련한 명연주를 소개하거나 감명 깊게 들은 작품과 관련된 저자의 경험담과 감상을 풀어내며 명음반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클래식 역사에서 서로 비교되는 위대한 거장들 간의 라이벌 구도이다. 특히 동시대를 살며 직접적으로 비교되거나 경쟁을 하였던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 아바도와 카라얀,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 하이페츠와 밀스타인, 칼라스와 테발디 등이 대표적이다. 서로 경쟁하는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감과 작품 해석과 연주를 대하는 스타일의 차이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를 들어 토스카니니는 작곡가가 남긴 악보와 의도를 그대로 재연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푸루트뱅글러는 악보 뒤에 숨은 음표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악보에 충실한 연주는 상상력의 결핍이고 지휘란 자유로운 창조행위라고 주장했다.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 동일한 작품을 둘이 어떻게 해석하고 연주했는지 비교하는 일이 무척 즐겁다.  


  둘째, 명연주, 명음반을 남긴 거장들의 진면목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20세기 초중반 당시 공연장의 무대, 음향시설과 레코딩 기술은 오늘날에 비할 바 못된다. 하드웨어 수준도 그렇거니와 당시 비평가와 청중들이 선호하는 스타일 같은 소프트웨어적 성격도 지금과 매우 상이하다. 그리하여 직접 비교를 하기 몹시 어렵다. 그러나 거장들이 남긴 음원을 감상하다 보면 그들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최근 유튜브에서 하우저와 캠벨의 협연 영상이 화제이다. 캠벨의 바이올린과 하우저의 첼로가 멋지게 협주된다. 둘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시선과 연주 동작이 매우 육감적으로 다가온다. 현대 음악가들은 연주뿐 아니라 이처럼 퍼포먼스 역시 중요시한다. 반면 유튜브에서 거장들의 공연을 보자면 뭔가 결이 다른 느낌이다. 나탄 밀스타인과 테발디의 견해처럼 그들은 연주기교보다 해석을 더 중시했는지 모른다. 말스타인에게 퍼포먼스란 작품을 해석하여 연주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Sk2yoOY8CTU
하우저와 캠벨의 협연,  Czardas


https://youtu.be/6pOfAv9gQzs
나탄 밀스타인,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셋째, 본문에서 소개되는 25인의 주요 추천작품을 접할 기회가 있다. 저자는 한 명당 2장의 추천앨범과 유튜브 음원 3곡을 추천한다. 주옥같은 연주곡들 중에서도 저자가 권하는 음원들은 거장들이 남긴 정수이다. 하지만 이 음원이 더욱 값진 것은 이 음원들을 유튜브에서 검색하는 순간 꼬리에 꼬리를 물며 거장을 소개하는 채널과 각종 음원들을 추가로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내가 애호하는 오페라 아리아 중 하나가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다. 이 노래는 거의 대부분 루치아노 파바로티 버전으로 감상했다. 그의 미성과 폭발적인 음량으로 듣는 재미가 그만이다. 저자가 추천한 엔리코 카루소 버전을 들었다. 1904년에 녹음된 것을 리마스터링 한 음원이다. 리마스터링 하였다지만 레코딩 수준이 떨어졌는지 왠지 빈티지한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카루소의 기교와 표현력, 찰진 고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오디오 마니아들은 오디오 기기에 집착한다. 미세한 음질차이를 얻기 위해 앰프는 차치하고 선재 하나에 수백만 원 이상을 소비한다. 정작 감상할 음원에는 신경을 덜 쓴다. 멋진 앰프와 스피커를 뽐내는 마니아가 모은 음원들 중에 모노반 하나 없어 겉멋만 든 듯하여 안타까웠다는 어느 오디오 애호가의 푸념이 새삼 떠올랐다. 이 책에 소개된 다수의 거장들이 남긴 작품 중에 오리지널 버전이 모노반이 꽤 많다. 스테레오반에 비해 선명하고 깨끗한 소리를 들려주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명반이란 점에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치를 절감하였다. 흔하디 흔한 오천 원, 만 원하는 음원 수십 장을 장만하려는 욕심에 앞서 구하기 힘든 모노반 한 장을 소장하려고 애써야겠다.


  [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나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20세기를 대표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능가할 수 있는 천재, 엔리코 카루소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자클린느 뒤 프레에 못지않게 불행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칼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 카라얀을 최고의 지휘자라 여겼던 나의 무지와 편견이 시원하게 깨지기도 하였다. 카라얀이 굴지의 이전 선배들에 비해 탁월했던 능력은 지휘가 아니라 레코딩과 비디오를 빼놓을 수 없는 시대에서 이를 적절하게 활용한 시대감각일 것이다. 19세기 청중들은 파가니니를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20세기 우리들 곁에는 하이페츠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절대 완전한 연주가는 없다는 클래식 역사에서 완벽에 가까운 유일한 연주자라 일컬어졌기 때문이다.  


  요즘 음원차트는 아이돌 그룹이 장악하고 있다. 장년의 중견가수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20대들에게 7080 가요는 흘러간 옛 노래일 뿐이다. 클래식에 있어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음악가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이다. 가요에 비유하자면 핫한 아이돌이 아니라 오래전에 은퇴한 장년 가수이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서 만날 수 없는 전설들이다. 그들이 남긴 음원을 감상하면서 읽어 내려가는 전설들의 삶과 에피소드가 가슴에 하나하나 새겨진다. 여기에 저자의 필력이 더해져 오랜만에 읽는 내내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고 편안하게 독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주 가끔 선친께서 들으시던 원로가수 김희갑 씨의 LP를 걸곤 한다. 올드하게 들리는 소리가 그리운 어린 시절을 일깨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통해 잔잔한 여운이 떠올랐다. 소장하고 있는 클래식 LP들을 정리한다고 하고선 차일피일 미루기 어느새 반년이 지나고 있다. 지금의 여운을 잊지 않기 위해 겨울이 가기 전에 한 장씩 꺼내 들으면서 작곡가, 지휘자/연주자 별로 분류하고 재킷 앨범 비닐커버를 새 단장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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