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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Dec 24. 2019

[서평, 리뷰] 초판본 징비록

물망재거(勿忘在莒)의 교훈

  '물망재거'. 전국시대 제나라는 연나라 침략에 한 때 ‘거나라 쫓겨 갔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국토를 수복했다. 어려웠던 때를 잊지 말고 경계하자는 의미에서 ‘거나라’에 있었음을 잊지 말자는 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5천 년 한민족 전쟁사에서 임진전쟁은 역사상 유례없는 총체적 난국의 전란이었다. 이미 400 년 이상된 古事이지만 물망임진을 되새겨 임진전쟁의 교훈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초판본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임진전쟁 개전 전부터 종전까지 과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 수필집이다. 서애 선생은 잘못을 징계하여 미래 후환을 삼가는 기록이라는 취지에서 [징비록]이라 명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합병을 제안할 정도로 무기력했던 개전 초기 졸전을 철저히 반성하였다. 오랜 전란으로 말미암아 굶주림을 면하고자 가족의 인육에 의존할 정도로 아비규환에 시달렸던 백성들에 대한 애민정신을 시종일관 담담하고 진솔하게 밝혔다.


  [징비록]을 읽으면서 ‘어찌하면 이토록 처참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전란 발발 후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여 명나라와 합병을 염두에 둘 만큼 개전 3개월 동안의 전쟁 양상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暗將과 오합지졸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는 형세였다. 단언컨대, 한민족 전쟁사에서 임진전쟁에 비할 수 있을 만큼 낯 부끄러운 전쟁은 없을 것이다. 국지적 전투에 한정할 경우 참혹한 패배를 겪은 사례는 꽤 있다. 고구려 동천왕의 기병 2만 명이 위나라 관구검이 이끄는 보병 1만 명에 거의 전멸당한 패전이 그 중 하나다. 위나라 병력이 과소평가되었을 개연성이 있지만 개전 후 두 차례 전투에서 위병 6천 명을 살상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역대급 반전이 일어난다.  마지막 전투에서 4천 명 보병에 기병 1.8만 명이 몰살당한 것이다. 이처럼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특정한 전투가 적지 않지만 일방적이고 낯 뜨거울 정도로 밀린 경우손꼽기 어렵다. 하물며 조선왕조 500 년에 걸쳐 임진난 중에 일어난 칠천량 해전과 용인 전투처럼 황망하게 패배한 전투를 찾기는 더욱 힘들다. 병자호란 쌍령 전투 이에 비견할 만하다. 한마디로 임진전쟁은 전쟁준비부터 장수 선발과 국지적 전투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누구나 개전 초기 조선이 일방적으로 패주를 거듭해야 했던 원인 능짐작할 것이다. 개국 후 200년 동안 나라의 명운을 걸만한 강력한 외침이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오직 文을 숭상하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구조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지우고 싶 부끄러운 오래된 민낯으로부터 서애 선생의 징비록에 근거하여 뒷날의 근심을 잊지 않고 삼가위해 되새겨야 할 사항정리해 본다.


  첫째, 임진전쟁은 일본이 전격적으로 기습한 전쟁이 결코 아니다. 조선이 사전에 충분히 예측했으며 어느 정도 방비를 했다.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황윤성과 김성일의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의견이 야기한 혼란은 임진전쟁 발발에서 지엽적인 이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찍이 조선이 무릎 꿇어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동참하라는 ‘정명항도’ 국서를 보냈다. 조선의 극심한 반발을 예견한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가 명나라를 정벌하는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로 순화하여 이미 조선에 전달했다. 진의를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이내 침공 의사가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쟁 초기 특히 엄청난 위력을 뽐냈던 조총의 존재 또한 대마도주를 통해 사전에 파악할 정도였다. 50여 보의 짧은 유효 사거리와 재장전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당시 화승총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한 게 문제였다. 일찍이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최강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기마부대를 조총부대로 전멸시킨 최적의 전술을 완성한 사실을 조선이 몰랐다는 게 불행이었다. 당시 조선은 중신들의 격론 끝에 일본이 명을 치기 위해 조선 침공 계획이 있음을 명나라에 보고할 정도였다. 삼도 지방 주요 군사거점 지역에 성을 개보수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기간이 다소 부족했을 지언정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둘째, 예측불허 기습에 허를 찔린 게 아니라면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패배를 거듭한 원인은 무엇 때문인가?  군사 전략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주제이다. 서애 유성룡은 저서에서 군사 편제를 진관 체제로 전환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진전쟁을 연구한 다수 학자들 역시 제승방략의 전략적 결함을 지적한다. 제승방략은 지방 군현 단위별로 산재된 병력을 일정한 군사거점에 대규모로 집결시킨 후 중앙군과 함께 파견된 사령관이 현지에서 지휘하는 편제이다. 이 편제는 대규모 전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건곤일척의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2선 방어를 구축할 전력이 부재하고 위급한 시기에 사령관이 부재할 경우 대부대를 통솔할 대안 마련이 쉽지 않다는 결함을 갖는다. 실제로 임진전쟁에서 신립 장군의 정예 부대가 탄금대에서 몰살당하고 선조를 호위하기 위해 모인 삼도 지방군 5만 명이 용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동안 지리멸렬한 것에서 제승방략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진관 체제 또한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전쟁의 성격을 띤 임진전쟁에 적합하다고 보기에 부족함이 많다. 진관 체제는 지방 현단위 이하 군사들을 지방의 여러 거점별로 조직화하여 인접한 진관 군사조직이 연계하여 쳐들어오는 적과 맞서는 체제이다. 진관 단위 병력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에 상륙한 각각 2~3만에 육박하는 왜군의 1, 2 ,3군 정예 대군에 역부족이다. 제승방략과 진관 모두 각기 장점과 결함을 가지고 있어 무엇보다 장수의 능력과 병사들의 반복 훈련을 통한 전술 구사능력이 한층 중요했을 것이다. 특히 원정군에 비해 전투가 벌어지는 지형을 충분히 이해하는 현장 적응력이 조선군이 내세울 유일한 강점이었음에도 정작 조정은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야 지휘관들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그 결과 지형지물과 병사들에 대해 숙지하지 못하여 전력 최적화를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점에서 그나마 각 진관 별로 현지 부대 지휘관이 주둔하는 진관 체제가 그나마 나을 수 있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임진전쟁 당시 조·일 양국의 병력 규모을 비교해 보자. 조선군은 중앙군 2.5만 명, 정군 12.5만 명, 수군 3만 명 등 총 18만 명이었다.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 1.9만 명, 가토 기요마사의 2군 2.3만 명, 시마즈 요시히로의 4군 1.7만 명, 수군 1만 명 등 총 17만 명이 전장에 동원되었다. 전체 병력 규모만 보면 조선군의 병력이 뒤처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했음은 조총의 위력 말고도 병력이 전략적으로 운용되지 않았고 훈련마저 부족하여 정예화되지 않았던 탓이겠다.


  조정의 군사적 무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전쟁 중 군대를 운용함에 있어 신상필벌 원칙으로 군대 기강과 규율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아군을 반란군으로 몰아세워 몰살시킨 우복룡을 안동부사로 승진시키거나 패전을 거듭하던 차에 적군 60여 명을 베어 사기를 드높인 신각을 군율을 어겼다는 허위보고에 속아 사형시킨 웃지 못할 일마저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무책임하게 도망가거나 졸전을 벌인 인물들을 재 등용하거나 중용하는 등 문신을 우대한 사회 풍토에서 역량 있는 무신이 흔치 않았던 인물난까지 겹쳐 제대로 전략적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무기력한 패배의 원인은 문약하고 무능력한 조정에 있었다고 단정할 만하다.


   셋째, 탄금대에서 전멸한 신립 장군의 전술적 오판이다. 신립을 지지하는 이들은 일찍이 북방에서 강력한 기병술로 오랑캐를 섬멸하여 조선 제일 명장으로 떠오른 신립이 궁기병 위주로 편성된 경군 8천 명의 특성을 감안하여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고 옹호한다. 조령에서 방어선을 펼쳤을 경우 기병대를 활용하기 어렵고 우회로로 진격하는 일본군이 배후를 칠 경우 포위될 위험도 고려했어야 한다는 응원도 덧붙인다. 그러나 중앙군이 기병으로 구성되었다손 치더라도 지원 온 지방 정군 8천 보병을 감안했다면 적어도 험준한 조령에서 1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후방 부대로 기병이 주둔하는 게 더 유효한 전략 전개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특히나 전투가 벌어진 당일 비가 내려 탄금대 벌판이 진창으로 변했다는 사실에서 신속하게 기동하는 속도전이 생명인 기병 위주로 결사항전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신립의 부대가 궤멸된 다음에는 이렇다 할 방어선이 없어 왜병들은 무주공산인 한양에 이어 평양성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하기에 이른다.


   넷째, 왜군이 선조가 있는 의주를 향해 진격하지 않고 평양성에 수개월간 머무르는 동안 전세가 서서히 변화했다. 왜군이 평양성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배경은 우선 심유경의 강화 협상에 있었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심유경이 평양성에 진주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본국과 조율한 다음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2개월 동안에 양국이 전투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심유경이 약조한 날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일본군은 여전히 평양성에 머물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개전하자마자 도망치는 통에 1만 명의 병사와 전선과 화포가 유실되는 어처구니없는 전력 약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수군이 이순신의 지휘 아래 남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은 수륙병진 전략과 보급물자 조달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또한 6 월 이후로 지방군과 의병이 승전보를 올리며 후방을 교란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무사했고 명나라 군대가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황이 일방적 수세에서 대등하게 바뀌었다. 여기서 평양성 탈환 과정이 매우 아쉽다. 도주하는 적을 제 때에 추격했더라면 자연스럽게 한양을 점거하던 4군까지 패퇴시켜 적의 주력부대를 경상도 이남으로 밀어낼 수 있었는데 자신의 안위를 우선한 명나라 장수의 용렬함으로 인해 실기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이여송 제독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평양으로 되돌아 간 후 강화 협상에 나서,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사실상 끝낼 수 있는 천재일우 기회마저 놓치게 되었다.


  다섯째, 임진전쟁을 생생한 기록한 [징비록]은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전쟁의 참화 속에 죄 없는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왜군이 피해가 컸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 성안에 있는 민간인들을 남김없이 학살하곤 했다. 식량이 부족하여 노약자들은 도처에서 아사했고 병자들이 지척에 깔렸으며 먹을 것이 모자라자 가족의 인육을 먹는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나라가 부강하여 외적이 침입하지 않았던들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장면이겠는가. 원군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대 중 일부가 점령군처럼 약탈을 자행하는 일은 다반사요, 국지 전투에서 몇 번의 패배를 빌미로 전투에는 소극적이었다. 원군은 외국 군대일뿐이다. 아무리 우방의 戰禍를 돕는다고 하지만 그들이 전력을 다해 구원해 주리라 막연히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이 가능하려면 시의적절한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유능한 전략지휘 체제하에 훈련되고 조직화된 정예부대와 충분한 보급물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현대전은 제공권과 제해권 장악이 핵심이다. 우수한 성능의 첨단 전략무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방위사업이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이다. 몇 년 전 국방비리 뉴스가 줄을 이었다.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 사업인 KFX는 F35 스텔스 전투기 직도입 대비 비효율적이라 평가되고 수리온 헬기, K2 전차 등 대표적 한국형 무기가 개발과정에서 치명적 결함이 발견되곤 했다. 막대한 국방예산이 각종 스캔들과 비리로 낭비되는 정황이 뚜렷했다. 한때 인터넷에서 군대 내무반 교체사업 관련 비리 가능성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1,150개 대대급 부대 내무반 교체사업에 6조 9,700억 원이 집행된다는 뉴스가 화제였다. 1개 대대를 대략 600명으로 잡으면 대략 인당 1천만 원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인당 점유면적이 대략 2평 정도로 제공된다 하니 평당 500만 원 단가이다. 막대한 예산이 설마 침대 교체에만 한정했겠냐마는 사업이 진행되던 시기에 평당 5백만 원이면 어지간한 아파트 건축비에 맞먹는 금액이다. 군 내부반 시설이 중급 이상의  아파트 수준이라고 하면 군필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부정이 없다 해도 적절한 산 통제가 이루어지는지 의심이 들 만한 사안이다. 국방비리와 방위사업 부정은 만의 하나 전쟁이 일어날 때 국방전력을 크게 훼손하는 치명타이다. 국방비리야말로 내란죄에 준하도록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징비록]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라 하겠다.


  미국과 중국, G2의 패권 다툼이 끝나지 않을 듯이 치열하다. 북한 비핵화를 중심축으로 동북아 정세마저 복잡하다. 이 와중에 일본은 과거사를 빌미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기는커녕 한국에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하는 경제보복을 도발하고 있다.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 정치권은 타협 없는 극한의 소모적인 정쟁만을 일삼는다. 냉정한 정세분석과 주변국의 이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외교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파적 사익에 앞서 국익을 헤아리는 지혜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지성을 가진 사상가로 재평가받고 있는 서애 유성룡이 후대에 남긴 국가와 민생을 헤아리는 21세기 懲毖일 것이다.


오탈자

pp. 80.  도순변사가께서는 -> 도순변사께서는

pp. 86.  탄했하고 -> 탄핵하고

pp. 132  알리 위해 -> 알리기 위해

pp. 189. 날마다 내고 -> 날마다 내리고

pp. 191. 제독 이여송이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 본문이 아닌 대표문장으로 글자크기 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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