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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Oct 12. 2020

해파랑길을 걷다. 내 앞에 놓인 길을 보다.

해파랑길 종주기 (1) 1~3코스

 '우리나라 도보여행도 제대로 경험하지 않고서 무슨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엇비슷한 길이의 해파랑길 750km를 먼저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조급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일상에 무기력해진 나를 돌아보자는 심정으로 급작스레 해파랑길 트레일 계획을 세웠다. 하루 25km씩 걸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리. 직장인이라면 한 번에 종주하기란 불가능한 시간이다. 어쩔 수 없이 구간별로 나눠 틈틈이 걷기로 했다.


 추석이 지난 10월 9일부터의 가을 황금연휴. 코로나 19 확산이 한 풀 꺾인 틈을 타 부산 코스를 종주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산 구간은 1코스 오륙도를 출발점으로 하여 4코스 진하해변 종점다. 서울 출발을 감안하여 첫째 날은 2구간 중간쯤인 송정해수욕장, 둘째 날은 3코스 마지막인 임랑해수욕장에서 각각 민박하고 셋째 날 진하해변에서 울산을 거쳐 귀경하기로 대략적인 일정을 짰다. 귀경길이 편하자면 5코스 끝 울주군 덕하역까지 가야 하지만 첫째, 셋째 날 이동시간을 고려할 경우 상당히 무리를 해야 한다. 트레일링 하면서 상황에 따라 5코스까지 도전해보기로 했다. 일정의 가변성 때문에 첫째 날 민박집만 예약했다. 첫째 날을 2코스를 완주하더라도 대중교통으로 예약한 민박집으로 되돌아올 요량이었다.

 

 10월 9일, 해파랑길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날. 오는 날이 장날이란 옛 말이 틀림없다. 일본으로 향한 태풍 탓에 부산지역에 강풍 경보가 발동되었다. 1코스 출발점인 오륙도에 도착하니 거센 바람에 몸 가누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안내소 주변 건물 주위로 옷차림새로 보아 해파랑길을 걸을 듯한 산행객들이 돌풍을 피해 흩어져 있다. 예보로는 오후에 풍속이 더 거세질 전망. 바람 잦아들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날을 골라도 하필이면 하는 낭패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건 너무 허탈하고 트레일링을 포기하고 예정대로 송정에서 하루를 묵는다면 하릴없이 시간이 너무 남는다. 일단 고지대인 오륙도에서 내려와 해운대를 향해 도심을 걷기로 했다. 부경대, 경성대가 나온다.  31년 만에 찾은 경성대 사거리가 낯설다. 기억에 익숙하게 남은 건 오르막길이 펼쳐진 경성대 정문뿐이다. 하긴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시간이니 변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할 일이다.


 해안가 바람이 하도 거세어 너울이 넘칠까 걱정이 컸다. 겁 많은 성격에 더 조바심이 낫지만 오른쪽 멀리 해변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해안도로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행히 오목하게 육지에 접한 지역이라 그런지 강풍에도 파도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오륙도를 우회하여 해파랑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난관이 앞에 있다면 이를 뚫고 이겨내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간혹 한 발 물러서 판세를 조망하고 적절하게 대안을 마련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 갈맷길 광안리 가는 길]


 길은 평탄했고 트레킹은 순조로웠다. 긴장했던 기분이 조금씩 나아진다. 야간 행군을 염두에 두고 충분히 준비까지 한 터라 내심 2코스 종착지까지 내리 걷기로 작정했다. 송정 민박집에 짐만 내려놓고 걸으면 더욱 손쉬울 거란 마음에 더 유쾌해진다. 해운대에 연휴 맞이한 상추객들이 가득하다. 저마다 마스크를 둘러쓴 채 바다를 바라보거나 야외 테이블에서 한가로이 앉아 연인과 여담을 즐긴다.

[동백섬에서 바라본 해운대]


 해운대를 벗어나자 마린시티와 해운대 호화빌딩이 갑작스레 사라진다. 이제야 해파랑길을 걷는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옛 동해선이 다니던 철길을 보수하여 관광열차와 트레킹 보도가 설치되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당초 첫날 목적지인 송정 해변이 닿는다. 관광객들이 관광열차를 타려고 줄지어 서있다. 철길 옆의 보도에는 가을바다를 감상하며 걷는 시민들이 한가로이 걷고 있다. 해안 절벽과 산기슭을 관통하는 동해 철길을 걷자니 문득 이탈리아 친퀘테레(5개의 마을)가 떠오른다. 해안가 절벽에 들어선 지중해 마을이 운치 있고 참 예뻤다. 동해 철길과 삼포(미포, 청랑포, 구덕포) 항구마을을 친퀘테레에 비견할만하다면 나만의 과찬일까?

[해운대 - 송정을 잇는 옛 동해선 철길]


 구덕포 해안가에 진입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평소 꽉 낀 느낌으로 자주 신지 않던 머렐 중등산화가 말썽이다. 발등과 양쪽 발목 인대 부근에 경미한 통증이 일었다. 노르딕 지팡이질로 빠르게 걷던 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걷는 모양새마저 통증 탓에 다리를 펴지 못해 부자연스럽다. 인생은 역시 호사다마인가 보다. 2코스 완주 후 쉬려던 부푼 계획을 접고 당초 숙박지인 송정 민박으로 향했다. 민박집 도착해서 샤워를 하는데 더운물이 안 나온다. 3만 원짜리 방이라지만 아쉽다. 저녁을 '영변' 횟집 세꼬시로 해결헀다. 혼자인 줄 알고 단체석 자리밖에 없다던 여사장님이 서울 분점 단골이라는 말에 서둘러 자리 하나 마련해 준다. 평소 이런 넉살과 임기응변이 없던 차에 신기하다.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요, 도전에 대한 응전이다. 제 풀에 포기하면 기회는 오지 않는다. 다음 날은 당초 목표했던 3코스 완주에 더하여 최소한 4코스 중빈부 이상 가자는 절치부심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첫째 날 머물 송정 해변]


둘째 날, 4코스를 염두에 두어  7시 반에 길을 나섰다. 민박집으로부터 300미터를 걷는 중에 신발 고쳐 신기를 3차례. 어제 아팠던 부위가 도진 건지 발목 인대 주변 통증이 너무 심해 숙소로 되돌아왔다. 발목과 맞닿는 부분의 신발 안쪽 접합부위를 뜯어내 딱딱한 접착면을 박리해 모두 제거했다. 포기하자는 좌절감을 애써 추슬러 3코스 방향으로 걷다가 정 안되면 되돌아 오자는 작정으로 마음을 반쯤 비우고 힘없이 길을 나선다. 오전 9시 반. 4코스까지를 고려하면 정말 소중한 2시간을 신발 선택을 잘못하여 쓸데없이 허비했다. 53년. 내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허비한 시간 얼마만큼일까?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일 게다.

[거센 파도가 바위에 부서져 포말로 흩어지듯 바늘같은 고통에 하루만에 무력해지는 각오]

 

내 인생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적어도 학업성취라는 기준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대학원 시절을 꼽을 만하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였으나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아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집중력이 대단했을 뿐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전성기라 부를 수 있을지 애매하다. 인생의 정점이라면 성취 그 자체보다 이를 이루려는 의지와 열정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난 30~40년 전에 비해 집중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마저 감퇴되었다. 읽으면 기억이 나던 시절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돌아서면 잊는다. 이제 예전에 비해 능력이 쳐진다손 치더라도 청춘의 마음과 깊어진 연륜으로 만사 사물에 매진한다면 내 인생의 진정한 화려한 날을 이제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황혼의 장려한 낙일을 넋넣고 감상하기아직 남은 시간이 상당하고 소중하다.


 강풍 예보와 힘든 발목 컨디션에 걱정이 앞섰으나 의외로 대변항까지 무리 없이 걸었다. 미미한 통증을 애써 무시한다면 평소 걷는 것과 별다를 바 없었다. 의욕이 충만하여 최소한 4코스 중반 이상 걷자는 호기를 다졌다. 잠시 해변을 벗어나 산기슭이 나온다. 봉대산 정상가는 오르막길에 오른다. 300미터 남짓 높이라도 해발 제로에서 시작하니 숨이 차오르고 구슬땀이 범벅이다. 정상에서 숨을 고른 후 3코스를 본격 걸어본다.

[봉대산 정상 쉼터]


짧은 업힐에 나도 모르게 무리했는지  발목 상태가 조금씩 악화되었다. 평탄한 길에 들어섰으면서도 발목에 자꾸 신경이 간다. 속도가 마음먹은 대로 나지 않는다. 어느새 뒤따르던 트레일러들이  한 명, 두 명 나를 제치고 앞서 나간다. 절로 맥이 빠진다. 3코스 12km 남았는데 이 속도면 4시 넘어 도착할 거 같다. 짧아진 해를 감안하면 4코스 절반 걷기 만만치 않다. 걸을수록 발목이 더 아파올 텐데. 기분마저 쳐진다. 인생은 언제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나 보다. life goes up & down. 매사 일희일비하지 말 일이다. 일체 유심조! 이것이 인생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나도 모르게 시를 읊조린다.

[가끔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자면 풍경이 새로이 펼쳐진다]


 결국 마지막 5km를 어기적 어기적 걸어 당초 예정대로 3코스 종착점인 임랑에서 숙소를 잡았다. 힘들지만 당초 최소한의 목표라도 달성하고 싶었다. 몸상태가 걱정이 되어 서둘러 끼니 해결하고 파스를 여기저기 붙이고 이른 잠자리에 든다. 이틀 동안 펼쳐진 해파랑길에 어쩌면 내 인생 경험이 온전히 담겨 있는 듯하다. 자신감이 뿜어져 나온 시절도 있었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좌절에 의기소침하여 어쩔 수 없이 세월을 보내던 영욕이 이 길에 투영되어 있다.

[수평선 건너 이번 일정의 종착지인 임랑마을이 있다. 그 오른 편 끝에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보인다]


 셋째 날 잠 못 이루고 밤새 전전반측하다 이른 새벽, 이 번 트레일링을 더 이상 도전하는 것이 과욕이라는 마음에 동트기 전에 숙소를 나섰다. 오늘이 아니어도 해파랑길은 언제나 내 앞에 놓여 있을 것이니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나? 마음이 떠나자 귀경길이 순조롭다. 동해선과 KTX 시간대가 아귀가 맞아 오전 11시 좀 넘어 서울역에 도착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출에  누군가는 마무리를 한다. 새벽 조업을 끝내는 어선을 보며 귀경의 아쉬움을 달랜다]


 어제 해변길을 걷는 내내 입가를 맴돈 시구절이 있다. 내 인생의 길은 젊을 때나 중년의 지금이나 말없이 놓여 있다. 우공이산, 우보만리로 묵묵히 걷자면 그 길을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해파랑길에서 찾고자 했던 조그마한 무언가를 시인이 진즉에 노래했는지 모르겠다.


길 2     -  김남주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그 길 어디메쯤 가면

---- 중략 ----

이 길 어디메쯤 가면

---- 중략 ----

“여기가 너의 장소 너의 시간이다.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

행동의 결단을 요구하는 역사의 목소리가 있다.


그래 가자 아니 가고 내가 누구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랴.

가고 또 가면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되느니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멀다 하지 말자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험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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