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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Jan 21. 2021

우리가 꿈꾸는 미래 사회

과연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디스토피아일까?

  이 글은 '스마트 시티, 유토피아의 시작' 리뷰를 다시 다듬어 쓴 글입니다.


  2025 년. 지금부터 4 년 뒤, 인류의 삶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완전한 자율주행이 가능하리라 추측되는 2030 년대에는 또 얼마나 획기적으로 진보되었을까요? 미래학자들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전망한다기보다는 앞으로 인류가 나갈 트렌드를 짚어주는 정도일 겁니다. 현재 시점에서 누구나 예상하기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트랜지스터, 스마트 로봇, IoT 기기 등 인간의 지능과 노동을 대체할 자동화 기기 보급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궁극적으로 인류의  전체 인구수를 훨씬 능가하리라는 전망이 보편적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지능이 높았던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차르트, 아인슈타인 등을 꼽습니다. 이들의 IQ는 200을 상회했을 거라 추정됩니다. 그런데 2040 년 경 인공지능의 IQ는 무려 10,000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림 - 미래 인공지능, 트랜지스터, 스마트로봇, IoT 기기 전망]  

  자료원 : 소프트뱅크 2016 년 투자자 미팅 자료. 동사는 2040 년 AI의 IQ 10,000, 트랜지스터 3천조 셀, 스마트로봇 100억 대, 1인당 IoT 1,000 개에 달할 것으로 전망.


  미래 기반기술이 지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한다면 당연히 인간이 누리게 될 일상생활 역시 현재에 비해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단지 현재 예상컨대 그 시점이 2025 년 정도에 본격화될지 아니면 2030 년대에서야 이루어질지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없을 뿐입니다. 한 번쯤은 2025 년 혹은 2030 년대에 우리 일상생활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공상의 나래를 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2010 년대에 4차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4.0이 글로벌 화두였습니다. 모두가 열광했고 관련 기업들이 무차별적으로 대세 상승하였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디지털 혁명이란 점에서 3차 산업혁명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양자는 커다란 차이가 있죠. 3차 산업혁명이 PC, 인터넷,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한다면 4차 산업혁명은 디지털 기술이 사회와 인간에 내재되는 새로운 단계를 강조합니다. 로봇, 인공지능, IoT, 자율 차량, 5G, VR과 AR, 공유경제, 나노기술, 양자컴퓨팅, 3D 프린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꿈을 꾸지 못했던 기술 혁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이 파격적인 이유는 수십억 명의 인류가 무수한 기기들과 서로 연결되면서도 중앙 집중형 서버가 아닌 분산 컴퓨팅을 매개로 탈 중앙화, 공유, 개방을 통한 개인별 맞춤 시대의 지능화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 이끄는 주요 기반 기술 중에서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이슈가 있습니다. 첫째 스마트 공간의 탄생입니다. 우리가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생활공간인 가정과 도시가 스마트해져야 합니다. 스마트 홈과 스마트 시티에서 개인들의 생활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지 않나요? 둘째 친환경 전기차, 자율주행, 공유경제, 로봇 등의 발달도 인류의 생활양식을 탈바꿈시킬 것입니다. 노동에서 자유로워지고 여유 시간이 많아질 미래에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즐길까요? 아마도 짧고 단순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즐기는 스낵 컬처 시대에 어울릴 캐릭터(IP), 미디어 매체(OTT),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등이 보편화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기한 기술들의 기반이 되어줄 5G는 모든 사물을 연결시키고 딜레이 없이 정보교환을 가능케 해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무한 데이터를 수집할 센서, 모아진 데이터들로부터 필연적으로 태동할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하기 부정할 수 없습니다.


[동영상 -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홀로렌즈 시연장면]                    

유튜브 : "증강현실로 산업환경을 바꾼다."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 동영상 발췌

  

  많은 이들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불러일으킬지 모를 예상 가능한 부정적 영향을 우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스마트시티에서 벌어질 혁신 기술들이 인류의 삶을 편하고 여유 있고 행복하도록 해주리라고 낙관적인 미래를 그립니다. 브런치 회원님들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하이테크놀로지들이 대체로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습니까? 제 쓸데없는 기우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소 비관적인 성향을 가진 저는 왠지 스마트 사회를 도래시킨 기술 변화가 가져올지 모를 부정적 영향을 몹시 우려합니다.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인류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쓸데없는 고민을 합니다.


   먼저 화두를 던질 동영상을  보시기를 권합니다. 유튜브에서 발췌한 일본 만화영화 '메트로폴리스' 리뷰입니다. 인공지능이 극한으로 발달한 메트로폴리스. 로봇때문에 직업을 잃은 하층민들은 불만이 폭발하기 직전에 이릅니다. 지구를 지배하려는 야심가 레드 공은 첨단 과학이 집결한 지구라트를 만들고는 지구라트와 결합하여 세계를 정복할 인공지능 로봇을 창조할 것을 로튼 박사에게 강요합니다. 로봇 티마를 창조한 그는 티마와 함께 도망가지만 이내 죽임을 당하고 티마는 아슬아슬하게 주인공 켄이치에게 구출됩니다. 켄이치에게 글을 배우며 인간적 감정을 갖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 티마. 로봇 쿠데타에 휩싸인 티마가 레드 공에게 발각되고 자신이 로봇임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절망감에 빠진 티마. 지구라트의 모든 컴퓨터를 가동하여 인간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한꺼번에 폭발시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켄이치가 티마를 중지시키지만 지구라트가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 티마를 놓쳐 안타깝게도 티마는 파괴됩니다.


[동영상 - 메트로폴리스(2003)]

  - 데즈카 오사무가 1949년에 출판한 동명 만화를 원작. '은하철도 999'의 린 타로가 감독.


  '메트로폴리스'. 이 애니메이션은 AI와 로봇이 가져다 줄 행복이 아닌 인간과 대립하여 인류를 핍박에 몰아넣을 수 있는 암울한 미래를 그립니다. 1980 년대 아이들에게 엄청난 인기였던 '미래소년 코난' 역시 미래도시 인더스트리아를 환상적으로만 그리지 않았죠. 소수 지배계층들이 인더스트리아 상층 건물에서 호가 호식하는 사이에 대다수 하층 계층민들은 지하 세계에서 우울한 생을 이어갑니다. 1950~60 년대 일본 공상과학 만화들은 대개 인공 지능, 사이보그와 미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했습니다. 아마도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사회에 내재되었던 무기력함, 패배감들이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공 지능과 로봇이 인간과 충돌 없이 어울려 살 수 있을 지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가졌던 때문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오늘날 산업용 로봇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해 일자리를 없애고 있는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인간 형태를 닮은 휴머노이드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였는지를 감상하겠습니다. 휴머노이드를 제작하는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로봇들입니다. 참고로 이 회사는 구글에서 소프트뱅크로 인수되었다가 다시 2020년 현대차 그룹이 인수하였습니다.


[동영상 - 보스턴 다이나믹스 로봇들]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아틀라스의 2020년 버전(위)과 18년 버전(아래)의 차이


  2 년 사이에 자연스럽게 장애물을 뛰어넘는 동작을 넘어 앙증맞게 춤을 추는 로봇  발전 속도가 경이롭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가까운 장래에 정해진 동작을 단순 반복하는 산업용 로봇을 뛰어넘어 인간형태의 휴머노이드가 공장, 각종 서비스 업체, 가정에서 인간이 담당할 노동을 대체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산업용 로봇이 일자리를 축소시킨 과거 사례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만일 로봇이 모든 인간의 노동을, 심지어 가사 노동까지 대체한다고 가정해보죠.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먼저 긍정적 측면을 짚어 보겠습니다. 와우~. 마침내 우리가 노동에서 해방됩니다. 노동을 하지 않는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는 여유 시간을 독서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콘텐츠를 감상해도 되고 이 모든 게 귀찮으면 그냥 유유자적, 시간을 소일해도 됩니다. 공상영화에 나옴직한 환상의 유토피아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월급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여가를 즐기며 먹고 살아갈 돈은 어디서 나오죠? 자본주의에서는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임금을 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산을 충분히 축적한 계층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구태여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재산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는 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에 누구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야 할까요? 정부가 소득 분배를 해주면 간단히 풀릴 일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무슨 재원으로 이들에게 기본소득을 대체해줄까요? 아~. 정부에게는 세금이 있었죠. 세금을 거두어서 나눠 주면 됩니다. 한시름 놨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할 질문이 바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세금을 낼 소득이 없는데 세금을 누구에게 거둡니까?


  누구에게 걷지? 갑자기 좀 멍해집니다. 대부분이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기댈 곳은 자산가 계층과 로봇이라는 생산수단을 가진 기업가, 로봇으로 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영업자들일 것입니다. 이들마저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생산된 재화를 소비하고 다시 확대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작동원리는 순식간에 마비될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시장경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부를 독과점한 소수의 계층들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순수한 자비심'으로 세금을 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이러한 미덕이 미래 사회에 의심의 여지없이 작동될 수 있다면 지금은 왜 기능하지 않아 글로벌하게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빈부격차가 더 극심해지는지 반문해야 할 일입니다.


  현대 국가를 이끄는 정치 시스템은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이 의회 권력을 잡으려는 정당에게 정치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규제하는 각종 법률을 개정하는 게 핵심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을 들 수 있습니다. 이념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이나 분배를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민주당이 서로 정권을 주고받아 왔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빈부격차는 지속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1929년 대공황 수준을 한창 뛰어넘었을 정도로 극심해졌습니다. 민주당 정권 시절에서도 이런 기류를 막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정권창출과 분배 균형이란 정강보다 자신의 의원직에 더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선거 캠페인 비용이 필요한데요, 바로 기업들이 이 자금을 대주었습니다. 2008 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선거 캠페인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이러한 비밀스러운 커낵션이 미국 중산층을 몰락시키는 주범이라는 분석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구조를 이해하고 인간의 선함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소수 부를 가진 계층은 엄청난 세금을 요구하는 정부에 저항할 공산이 매우 높겠죠. 그렇다고 이들이 굳이 폭력을 써서 반정부 활동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의원들에게 집중 지원하거나 극단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해줄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국가권력을 대체하면 됩니다. 기업이 국가를 경영하는 현실이 일어날 개연성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마존과 구글, 그리고 누가 될지 모르지만 전 세계를 아우를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the One Company'. 전 세계를 석권하는 독과점적 기업이 지금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로 성장한다고 가정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나요? 기업이 국가를 대체, 경영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국가 형태는 지금과 매우 다른 모습일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국가 형식은 유지할 지라도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지금처럼 현재의 영토를 근거로 나뉘어 있으리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지구는 하나의 국가, 인류 모두가 단일국가의 시민인 코스모폴리탄이 될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하나의 국가로 이루어진 코스모폴리스 사회를 지배하는 소수의 계층. 그들의 선의를 기대할 수 없다면 대다수 인류는 로봇에게 일자리를 뺏긴 하층민, 인더스트리아 지하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계층으로 전락할게 자명합니다. 이런 가정이라면 매우 글루미 한 디스토피아입니다.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논리적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의 입장을 대변할 국가 체제가 존재하여 소수계층에게 로봇세를 징수하고 시민들에게는 기본소득을 지급함으로써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가정입니다. 이 논리의 결점은 디스토피아로 가는 전제, 즉 선의를 베풀지 않는 소수계층이 국가권력을 잡는다는 가정과 맞물려 있는 모순입니다. 둘째, 선의를 베풀지 않는 소수계층을 다수가 압박하는 시나리오입니다. 생산 수단을 독점한 국가 기업을 무력한 다수가 압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불행스럽게도 어쩌면 물리적 충돌이 유일한 해결 방안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소수가 독점한 생산력과 생산수단을 다수가 분점하게 되는 상황을 그린다면 우리가 앞으로도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본주의 체제가 미래에 지금의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는 추론에 이르게 됩니다. 자본주의 속성이 소멸되거나 지금보다 약해지는 대가로 인류는 공동번영의 길이자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미래소년 코난에서 인더스트리아를 되찾는 결말과 비슷합니다. 미래소년 코난에는 어쩌면 1960 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유행하였던 일본 사회 분위기가 미래 공상과학 만화에 정서적으로 투영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겠네요. 어쩌면 회원님들이 우려할 이런 시나리오가 사실 2008 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 전개되던 당시 유럽에서 회자되었던 자본주의의 미래입니다.


  인간에게 사회적 윤리가 요구되듯이 로봇에게도 나름의 윤리 강령이 있습니다. 재밌죠?


로봇의 3원칙.
1.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2. 원칙 1)이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인간 명령에 복종한다.
3. 원칙 1)과 2)가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로봇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한다.


  로봇 3원칙에 의하면 논리적으로 로봇을 해하려는 인간이 있는 한 로봇이 펼칠 유일한 자구 수단은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도망치는 일 밖에 없습니다. SF 영화에서 인간에게 핍박받는 안드로이드의 애처로운 모습을 묘사했던 장면들이 선뜻 이해됩니다.


  한편 '자율주행 차량의 역설' 또한 로봇 3원칙과 공리주의로 풀 수밖에 없습니다. 자율주행 차량이 질주하는 앞에 갑자기 어린아이가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 아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반대편에 있는 노인과 성인 2명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저도 피하려면 차에 동승한 운전자의 아들이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합니다. 자율주행차량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합니까? 제 소견으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대전제로 자율주행차량이 존재할 근거를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이 희생된다면 누구도 자율주행 차량을 구입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구입하지 않는 이 기술은 사장될 수밖에 없겠죠. 따라서 운전자와 운전자의 가족을 보호하는 일. 즉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되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최우선 당사자를 보호하는 게 자율주행 차량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합리적이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불가피하게 쳐야 합니까? 사람 목숨은 모두가 중요합니다. 다수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어린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이는 선뜻 답하기 어려운 윤리적 영역이기도 합니다. 윤리 영역이라면 공리주의가 한 가지 대안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나이, 성별, 인종, 장애유무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우받는다는 전제에서는 제겐 공리주의가 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제 결론은 안타깝지만 어린아이를 희생시켜야 한다입니다.


  어딘가 찜찜합니다. 다행히도 이 질문과 대답에 결정적인 가정상의 논리적 하자가 있습니다. 자율주행이 가능한 단계에 이른다면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존재를 미리 탐지할 수 있는 라이더 장치가 자동차에만 탑재될 것이라는 가정의 편협함이에요. 즉 보행자들도 자기가 소지한 다양한 웨어러블 기기에 자신의 위치를 알려 자기 튀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시그널을 자동차와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가능함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율주행이 가능해져 자동차 충돌사고가 완전하게 제어될 환경에서는 보행자에게도 엇비슷한 수준의 안전 수단이 충분히 확보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역설은 애당초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아이를 치지 않아도 되니 천만다행입니다.


  머신러닝과 딥러닝으로 이해되는 인공지능은 스스로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심. 소멸되지 않고 생존하려는 생명 의지를 갖지 않는 한 인간의 창의성을 뛰어넘을 수 없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아무리 AI의 IQ가 10,000이 된다 해도 말입니다. 뇌의 전기적 신호를 디지털화하여 뇌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뇌과학이 상기한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디지털화지 못하는 한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무궁무진한 뇌의 비밀을 조금씩 풀어가는 뇌과학의 발전 속도에 비춰볼 때 인공지능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인간만이 품는 고유한 감정들이 야기시키는 뇌 활동의 변화를 식별하여 이를 디지털 신호로 100% 치환한다고 가정하면 AI가 인간의 욕망과 의지 마자도 프로그램화하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조차 소름 돋는 끔찍한 상상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유토피아적 삶과 관련된 주제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미래사회가 던지는 근원적 화두는 결국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류가 지녀야 할 이상과 덕목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과 윤리 문제로 귀결하게 됩니다. 앨론 머스크,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와 같은 실리콘 리더들이 자신들의 2세 교육에 윤리와 인문학적 교양을 최우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을 이해하지 않는 기술이 가져다 줄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 하는 바람에서 일 겁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로서 덕성을 쌓아 교화가 가능하다는 성선설에 기반을 두면 미래 사회는 유사 이래 전쟁 없는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영원히 펼쳐질 것입니다. 반면 성악설이나 기독교적 원죄론에 입각할 경우 스마트 시티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지름길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미래사회가 가져다 줄 꿈같은 희망을 구태여 도외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희망을 기대하고 이를 즐겨야만 기술은 더욱 혁신되어 인류가 번영할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유토피아로 가는 여정의 끝자락에 필연적으로 노정되어 있을지 모를 불행만은 모두가 경계했으면 합니다. 인류 사회를 건전하게 이끌 마지막 보루, 각성하는 시민들에 내재된 이성의 힘이 언제나 펼쳐지기 바랍니다.


 '행복은 희생 없이 얻을 수 없는가, 시대는 불행 없이 넘을 수 없는가'

 일본 애니메이션 자이언트 로보의 극 중 대사가 글 쓰는 내내 머리에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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