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리뷰]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고전에서 찾은 미학의 재발견

by 여운설

지천명에 이르러, 낯익은 죽음을 새삼스럽게 마주했다.

짧게 느껴질지도 모를 장년의 황금기, 그 뒤를 이어 펼쳐지길 바라는 평온한 나날들, 그리고 언젠가 스스로를 불태워 찬란한 꼬리를 남길 유성 같은 황혼까지. 나는 삶의 끝자락에 놓인 그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면서도, 문득 뒤돌아 고등학교 시절의 희미하게 빛바랜 풍경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것이 단지 벅찬 숨을 잠시 고르기 위함인지, 아니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오랫동안 눌려 있던 자기 번민의 고통이 이제야 새어나오려는 것인지 나조차 확신할 수 없다.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 이 책에서 마주한 ‘죽음’이라는 주제가 내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35년 전의 방황을 불시에 깨운다.
“친구야, 너무 아파하지 마라. 지독한 자기 번민과 비하는 결국 자기애(自己愛)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시절, 그렇게 나를 다독여주던 동기가 문득 그리워진다.

철학자 김진영은 이 책에서 대표적인 고전 소설 8편을 미학적 시선으로 다시 읽는다. 그의 비평은 익숙한 해석을 반복하기보다, 한국 사회에 은근히 스며든 동질성 강박을 거슬러, 스스로의 사고를 전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걸어온 철학의 경계 안에서, 소설이 던지는 질문에 독자가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결코 단정 짓지 않고, 조심스레 설득한다.

본문에 소개된 여덟 편의 작품 중, 내가 이미 읽었던 것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카뮈의 이방인』이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주제에 익숙한 두 작품이기에, 가장 먼저 비평을 훑어보았다.
저자는 이 두 작품을 ‘죽음’과 ‘부조리’라는 키워드로 함께 풀어낸다. 그러나 내 시선은 자연스레 두 작품 모두에서 결국 ‘죽음’이라는 주제에 머물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 마음을 정서적 방황으로 몰아넣었던 두 사상가 — 그중 하나인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와 카뮈의 작품 속에는 네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제목 그대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이방인』에서는 뫼르소의 어머니, 아랍인, 그리고 결국 주인공 뫼르소 자신의 죽음이 있다. 이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는 두 소설을 온전히 이야기할 수 없다.

저자 역시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서구에서 바라본 ‘죽음의 연구’와 ‘죽음의 역사’를 간략히 짚고 넘어간다. 그 덕분에 나 또한 오래전 내 안에 숨어 있던 죽음의 철학과 방랑벽을 다시금 더듬어보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죽음. 그러나 그 낯익음이 우리를 늘 전복시킨다. 그것이 바로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가 내게 안겨준 작지만 깊은 충격이었다.


김진영은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에서 ‘죽음의 역사’를 중세부터 현대까지 네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는 이를 각각 ‘길들여진 죽음’, ‘자신의 죽음’, ‘타인의 죽음’, 그리고 ‘현대의 금지된 죽음’이라 부른다.

첫째, 길들여진 죽음은 죽음이 인간에게 친숙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무기를 내려놓고 동쪽 예루살렘을 향해 누운 기사,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둘째, 자신의 죽음은 이러한 죽음에 개인적 의미가 덧붙여진 시기다. 같은 작별의식 속에서도 죽음을 맞는 이는 천사를 바라보며 스스로의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죽음은 여전히 공동체 안에 있지만, 점차 개인화된다.

셋째, 타인의 죽음은 죽음을 더 이상 나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로 여기게 되는 태도를 말한다. 죽음은 미화되거나 멀리 밀쳐지고, 현실에서 점점 더 소외된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금지된 죽음은 죽음이 터부시되고, 금기시되는 시대다. 죽음은 더 이상 집 안에서 가족과 함께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나 장례식장이라는 제도적 공간으로 옮겨갔다. 치료와 수명 연장이라는 명분 아래, 인간은 죽을 권리마저 잃고, 죽음은 의료 산업 속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불과 70~8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동네 곳곳에 장의사 간판이 있었고, 내 선친께서도 대학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품에서 임종하셨으며, 이웃사촌이 장례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일상이 되면서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담벼락 안의 사적인 죽음은 병원과 장례식장으로 옮겨갔다. 죽음은 자연스레 산업화의 논리에 편입되어 버렸다. 생산력이 높아지고 수명이 길어질수록, 인간의 죽음은 공동체의 것이었다가 개인의 것으로, 그리고 이제는 의료 시장의 대상으로 변해왔다. 그렇다면 미래의 죽음은 어떨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상당 부분 대체하고, 로봇이 대부분의 노동을 떠맡게 되는 어느 날, 우리는 다시 공동체가 돌보는 길들여진 죽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언젠가 죽음이 상품이 아닌 관계의 일부로 회복되기를, 조심스레 꿈꿔본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카뮈의 『이방인』은 모두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리치의 부고를 들은 동료들은 그의 죽음보다 자신의 자리 이동과 승진에 더 관심을 보인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휴가를 신청하면서도, 상사의 불쾌한 눈치를 피하려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 이 두 장면은 모두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 이기적 태도를 넘어, 오늘날의 ‘타인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두 소설의 마지막 장면 또한 죽음으로 끝난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끝내 그것을 낯설어한다.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는 그 익숙한 죽음을 다시 낯설게 만들며, 나로 하여금 내 삶과 죽음에 대해 새삼 질문하게 만든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죽음은 끝났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한차례 들이마셨다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누군가는 그가 죽었다고 전하지만, 정작 그의 내면에서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다. 그것은 허위로 가득 찬 삶에서 벗어나, 존재의 권리를 되찾는 해방으로 그려진다. 김진영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특히 “숨을 들이마시고 스스로 숨을 멈추었다”는 구절에 주목한다. 그는 이 장면을 단순한 임종이 아닌, 일리치가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 죽음’ — 다시 말해 일종의 자살로 해석한다. 평생 거짓과 허위로 점철된 삶. 그 삶은 오직 죽음을 맞이해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에 이른다.

김진영은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이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역설적 해방을 읽어낸다.

죽음을 통해 되찾은 존엄. 그것이야말로 일리치가 마지막으로 손에 넣은, 단 하나의 진실한 권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을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 이방인 -


김진영은, 죽음에 반항할 때 비로소 삶이 정직한 얼굴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죽음을 외면한 자가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정면으로 마주한 자만이 삶을 거슬러 올라가 볼 용기를 얻는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그러하다. 그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야 비로소 잃어버렸던 세계 — 어린 시절의 바닷바람과 별빛, 흙내음 속에서 느꼈던 순결한 기쁨을 되찾는다. 삶은 여전히 부조리하지만, 죽음을 껴안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축제가 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일리치 또한 다르지 않다. 세속적 성공과 안락한 부르주아적 삶은 그에게 달콤한 보호막처럼 느껴졌지만, 병이 찾아오자 그 보호막은 오히려 고통의 벽으로 돌변한다. 고통 속에서 그는 평생 애써 외면해왔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 그의 죽음을 선고하지만, 정작 그는 그 순간 스스로 숨을 멈추며 허위로 점철된 삶을 끝낸다. 주체적인 죽음을 택함으로써, 그는 죽음을 통해 마침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이 두 인물의 출발점은 서로 다르다. 일리치는 지위와 안락함 속에 안주한 삶을 살았고, 뫼르소는 무기력하게 떠밀리듯 삶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선 순간, 두 사람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어린 날의 기억이 마지막 순간에 되살아나고, 잃어버렸던 진정한 행복이 허위와 부조리를 무너뜨린다.
두 소설 모두 삶의 초반에는 거짓과 위선으로 질식해 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죽음을 통해 다시 아이가 된다. 톨스토이는 일리치라는 인물을 통해, 당대 러시아 상류층의 위선을 해부한다. 차르와 귀족, 교회와 법정이 만들어낸 도덕의 틀은 실상 허위에 불과하다. 병이 깊어질수록 기도는 무의미해지고, 고통은 신의 이름조차 부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끝까지 곁에서 인간적으로 일리치를 돌봐준 하인 게라심은, 신보다 더 큰 진실을 일깨워준다. 결국 일리치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에 기대어 고통을 거두고, 진정한 평화를 맞이한다.

한편, 카뮈의 『이방인』은 모순으로 가득한 근대인의 자유를 그려낸다. 신을 떠난 자유는 결국 죽음 앞에서 다시 신을 찾게 만들며, 부조리의 굴레 속에 인간을 가둔다. 그 속에서 뫼르소는 한낮의 태양빛 아래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러나 '태양 살인'은 역설적으로 그를 잠시나마 부조리로부터 해방시킨다. 비록 살인은 새로운 감옥을 불러오지만, 감옥 안에서 뫼르소는 잊고 있던 별빛과 밤공기, 바닷소리를 다시 만나게 된다.“태양은 움직일 때 축복이었고, 멈춘 순간 죽음이었다”는 김진영의 해석은,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게 하며 뫼르소의 자아를 더욱 깊이 조명한다.

두 작품은 모두 타인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결말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허위와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의 진실에 닿는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삶의 회복이다. 일리치가 그랬고, 뫼르소도 그러했다.

그들의 마지막 숨결에는, 부조리를 넘어선 미학이 깃들어 있다. 죽음이 삶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해방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역설. 두 소설은 이 오래된 진실을 각기 다른 언어로 노래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노래를 듣는 찰나, 잠시나마 허위와 부조리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꿈꾸게 된다.


‘미학(美學)’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시절, 김민기의 노래를 좋아하며 미학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그림을 사랑해서 그의 노랫말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걸까?’ — 막연히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곧 미학은 철학이나 문학보다 훨씬 낯설고,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다. 미(美), 미적 존재, 예술의 본질을 철학의 언어로 풀어낸다는 것. 나에겐 까마득한 일처럼 여겨졌다. 설상가상으로, 진중권 같은 이들이 현학적으로 풀어놓는 미학의 담론은 오히려 미학을 더 멀고 딱딱한 세계로 밀어냈다.

그런 내게, 이번에 만난 김진영의 책은 조금 달랐다. 덕분에 미학이 다시, 조금은 부드럽고 따뜻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름다움과 추함 — 미학의 객체인 그 모든 카오스를 차안(此岸)에 남겨두고, 미학을 피안(彼岸)의 코스모스로 이끄는 그의 사유는 내 마음 한구석을 조용히 맑게 했다. 김진영의 강의도, 책도 이번이 처음이다. 미학의 숨은 아름다움을 이렇게나 늦게 알게 된 것이 아쉽고, 어쩐지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지리산 뱀사골을 지나 노고단에 올랐던 기억이 있다. 노고단에 서면 저 멀리 천왕봉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부터, 내게 천왕봉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각인되었다. 그 선입견 탓에, 30년 가까이 지리산의 새벽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재작년, 마침내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마주했다. 그 벅찬 순간을 떠올리면, 내게 ‘미학’이란 것도 그동안 천왕봉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득하고, 금단의 봉우리 같았다.
하지만 이제야 조금씩 숨을 고르며 다시 오를 준비를 한다. 아직 내 삶은 반절이나 남아 있으니까. 김진영 덕분에 나는 내 안의 ‘미학의 천왕봉’을 향해 소걸음(牛步)으로 한 발, 또 한 발 내딛어보려 한다.문학은 결국, 편견과 도그마에 맞서는 끊임없는 도전이라 믿는다. 카뮈가 부조리에 저항했듯이.

김진영 역시 자신의 비평이 정답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그는 독자 각자가 자기만의 시선으로 읽고, 해석하며, 저항하기를 바란다. 그래서일까. 아직 원전을 읽지 않은 나머지 여섯 편의 소설은, 감히 서둘러 저자의 해설로만 읽고 싶지 않았다. 먼저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원전을 읽은 뒤에야 김진영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의 비평이 나를 이끌기보다, 내가 내 방식대로 부조리와 허위에 맞설 수 있도록 말이다.

아직 내게는 반절이나 남은 인생이 있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쉼 없이,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소처럼 묵묵히 걷겠다.

그리고 언젠가, 나만의 미학의 봉우리에 서는 날이 온다면—
지금 이 첫걸음을, 기꺼이 떠올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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