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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Nov 11. 2019

[서평, 리뷰]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고전에서 찾은 미학의 재발견

  거참, 생각할수록 기이하다. 지천명에  이르러 낯익은 죽음을 만나게 되었다. 짧을지 모를 장년의 황금기, 그 이후에 펼쳐지기 바라는 편안한 삶, 자신을 불태우며 밝은 빛을 내줄 유성 같은 황혼. 내 인생 끝에 놓은 최종 목적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지금, 문득 뒤돌아서서 희미하게 빛바랜 고교시절을 소환하였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린 벅찬 숨을 잠시 고르려 함인지, 아니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그간 눌려왔던 자기 번민의 고통이 이제야 터지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이 책에서 만난 죽음이 35년 전 '죽음'에 대한 나의  방랑벽을 일깨운다. "친구야, 너무 아파하지 마라. 지독한  자기 번민과 비하는 자기애(自己愛)와 다르지 않다"며 위로해주던 동기가 그리워진다.


  철학자 김 진영은 이  책에서 대표적 고전 소설 8편을 미학적 관점에서 비평한다. 그의 비평이 남다른 점은 은연중에 동질성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흔한 평론을 뒤엎으려는 데에 있다. 그는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자신이  경험한 철학 테두리 내에서 소설이 이야기하는 경험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나름 설득력 있게 풀어서 설명한다.  


  본문에 소개된 소설 8편 중 내가 읽어 본 작품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카뮈의 [이방인]이다.  개략적인 줄거리와 주제에 어느 정도 익숙한 두 작품의 비평을 자연스럽게 먼저 읽었다. 그는 '죽음'과 '부조리'를  키워드로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두 작품 모두 죽음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를 정서적 방황으로 이끈 두 사람* 중  한 명인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또 다른 한 명은 청년시절의 칼  마르크스이다.


 우리는 두 작품에서 4명의 죽음을 만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 이반  일리치,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어머니, 아랍인과 주인공 뫼르소의 죽음이다. 이들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 두 작품을 어찌 논하겠는가? 두  작품을 언급하기에 앞서 저자는 서구에서 바라보는 '죽음의 연구', '죽음의 역사'를  얘기한다. 


  그는 중세 이래로 현대까지 죽음의 역사를 '길들여진  죽음', '자신의 죽음', '타인의 죽음', '현대의 금지된 죽음'의 시대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① 길들여진 죽음이란 인간이 죽음에 친밀하고 익숙한  것을 뜻한다. 죽기 전에 무기를 버리고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을 향해 눕는 기사도,  가족뿐 아니라 공동체 일원들에 둘러싸여 죽음 앞에서 작별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② 자신의 죽음은 친숙하게 길들여진 죽음에 개인적 의미를 부여한 것을 말한다. 모두가 행하는 작별 의식에서 망자만이 천사를  바라본다고 이해하자. ③ 죽음이 타인에게만 일어난다는 인식이 타인의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그리거나 죽음을 우리네 삶에서 멀리 떨어진 사건으로 인식한다. ④ 오늘날의 '금지된 죽음'은 죽음을 터부시하고 금기시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가 집이 아닌 병원, 장례식장 등의 공공장소로 바뀐다. 더 큰 문제는 치료와 수명연장이란 미명 하에 죽을 권리조차 무시당하고 각종 의료행위의  장사를 벌이는 점이다. 죽음의 시장화이자 죽음의 소외이다.


  70년대 후반, 아니 8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수 병자들이 집에서 운명을 맞이했다. 서울 동네 곳곳마다 어렵지 않게 장의사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선친께서도 돌아가시기 전 퇴원하여 집에서 임종하셨다. 담벼락에 둘러싸인 가정이란 사적 공간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아파트가 보편화되고 공간 프라이버시와 지역 공동체가 약해짐에 따라 병원과 장례식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죽음과 장례문화가 자본주의 양식에 편입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기대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인간의 죽음이 공동체 -> 주체 -> 객체화로 변모된 데에 그치지 않고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죽음마저 상품화하고 소외되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AI가 인류 지성을 상당 부분 대체하고 로봇이 온갖 노동을 담당하게 될 미래시대에서는 금지된 죽음, 죽음의 시장화를 넘어 죽음이 다시 사회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희망을 꿈꿔 본다. 다시 공동체의 길들여진 죽음으로 되돌아 간다는 상상이 즐겁다.  


   두 소설 모두 죽음을 소재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일리치의 부고를 접한 동료들이 그의 죽음이 자신 또는 자신이 아는 이들의 자리이동이나 승진에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에 먼저  관심을 둔다. [이방인]에서는 부고를 듣고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휴가 신청을 한 뫼르소가 사장의 탐탁해하지 않는 듯한 눈길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두 장면 모두 죽음을 위로하고 애도하지 않는다는 이기적 태도를 넘어선 '타인의  죽음'을 그리는 것이다. 


  소설의 엔딩 역시 모두 죽음을  이야기한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죽음은 끝났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한차례 들이마셨다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누군가 그가 죽었다고 말은 하는데 그의 마음속은 죽음이 끝나 없어졌다고 한다.  저자는 숨을 들이마시고 스스로 숨을 멈추고 거두었다는 구절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일리치가 일종의 자살. 주체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석한다. 그가 살아온 허위가 죽음으로써 해방된 죽음을 되찾게 되는, 존재의 권리를 회복했음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을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 이방인  - 


  저자는 죽음에 반항하여 죽음이란 실재를 인정하는 순간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고 이해한다. 뫼르소는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세계에서 삶의 자유와  행복을 느끼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 느꼈던 행복을 지금도 맛볼 수 있는 축제에 기뻐한다. 부조리한 세상의 삶을 증오하여 죽음을 넘어서 축제를 즐기는 자기(뫼르소)를 사형장에 모일 구경꾼들이 맞이 해주기를 희망한다고 해석한다.  


  편안한 삶을 누린 일리치,  세상을 무기력하게 살아온 뫼르소. 두 주인공들은 살아온 삶의 궤적은  차이가 크다. 하지만 모두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잃어버린 진정한 행복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누린 편안한 삶과 무기력한 인생이 사실 자본주의에 내재된 허위와 부조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두 작품 공통적으로 소설 전반부에서 위선 가득한  허위와 부조리를 그린다. 후반부는 허위와 부조리에 맞서 행복을 되찾아가는 성찰과 죽음을 극복하는 자아를 묘사한다. 모두 '타인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허위와 부조리를  죽임으로써 해방된 '자신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작품에서 죽음의 미학이 면면히 이어져 내린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일리치가 병이 들어 고통을 느끼게 되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병이 들기 전 그의 인생은 즐겁고 편안하며 법도에 맞는 삶이었다. 톨스토이는 편안함 삶을 쁘티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으로 그렸다. 당시 러시아를 지배했던 차르, 귀족, 성직자, 경제적 특권층이 누린 삶을 은연중에 비판했다. 윤택한 삶에 취해 하류층이 겪는 엄청난 질곡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연상된다. 병이 심해지면서 기도를 해도 고통을 참기 힘들게 되자 주인공은 푸념과 항의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죽어가는 자신을 정성스레 돌보는 게라심에게서 깨달음을 얻어 어렸을 때 행복했던 것을 떠올린다. 점차 기억이 되살아 나자 고통받는 가족을 이해하게 되어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스스로 숨을 멈춘다. 


  [이방인]은 누구나 인정하듯 부조리를 그린다.  부조리란 불합리, 모순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들어 인간은 신을 떠나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자유스러운 삶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을 피하고자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근대의 모순. 카뮈는 이러한 삶과 죽음이 정합되지 않는 이 세상을 부조리한 상태로 보았다. 저자는 태양 살인을 하기 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뫼르소의 모습에서 부조리에 좌절하여 무목적한 삶으로 적응하는 인간을 비유한다고 설명한다. 어머니 죽음마저도 무덤덤했던 이유이다. 이런 주인공을 죽음에서 해방시킨 결정적 사건이  태양 살인이다. 태양 살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 문단에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칼날에 비친 태양빛이 눈을 가려 아랍인을 살해한 장면에서 저자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예를 들어 태양의 이동에 주목한다. 주인공이 움직일 수 있는 한 태양은 축복이고 자유를 준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상을 피하게 해 줄 서늘한 바위로 가는 길을 막아 선 아랍인에 의해 태양이 정지하고 칼날에 반사된 정지된 태양은 죽음의 태양일뿐이라는 주장이다. 아랍인을 쏘면서 뫼르소는 부조리에서 벗어날 그늘을 찾게 되었지만 또 다른 부조리한 세상인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방인]의 2부는 감옥에서 그가 잊고 있던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 냄새, 소금 냄새, 흙냄새'와 어린 시절의 행복을 만나게는 과정을 그린다. 태양 살인이 주는 해방 죽음의 미학이다.  


  내가 '미학'이란 용어를 처음 접한 시기는 고등학교 2년 때였다. 김민기 노래를 좋아하여 그가 미학을 전공했음을 알게 되었다. 미학이 전공이라 이리도 아름다운 가사를 쓰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곧 미학은 철학이나 문학보다 다가서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미와 미적 존재, 예술의 근원을 철학적 체계로 설명하는 게 왠지 난해해 보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진중권처럼 현학적인 잘난 체하는 미학에 대한 설명이 미학에 더 거부감을 갖게 하였다. 다행히 저자를 통해 미학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미학의 대상인 모든 아름다움과  추함이 차안(此岸)이자 카오스라면, 미학은 피안(彼岸)과 코스모스다. 김진영 작가의 강의나 저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학의  아름다움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때늦은 만남이 후회스럽다.


  대학교 2학년 지리산 뱀사골,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까지 산행을 한 적이 있다. 노고단에 올라서면 닿지 못할 듯이 천왕봉이 어렴풋하게 저 멀리에 보인다. 내가 감히 다가서지 못할 존재로 천왕봉이 각인된 게 그때였다. 이런 선입견으로 인해 30년간 천왕봉 일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재작년에서야 오랜 소원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미학은 그간 내게 있어 범접하기 힘든 천왕봉, 금단의 영역이었다. 요즘 100세 인생을 심심치 않게 논한다. 벌써 반 백을 넘겼지만 아직 절반이나 남은 인생이다. 김진영 작가에 힘입어 미학의 천왕봉에 오르려 조금씩 몸을 풀려고 한다. 


   문학은 편견과 도그마에 저항하는  도전이다. 카뮈가 부조리에  저항하듯 말이다. 저자 역시 자신의 비평이 정답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독자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시선으로 비평하기를 권한다. 나머지 6편은 아직 원전을 읽지 않았다. 재료조차 준비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저자 비평만을 읽고 리뷰를 할까 머리가 복잡했다. 고민 끝에 나머지 작품들의 저자 비평은 우선 원전을 읽은 후에 들여다보는 걸로 결정했다. 나만의 시선으로 온전히 소설 작가와 저자가 설정한 도그마에 저항하고 싶다. 아직 인생이  반절이나 남아 있는데 애써 서두르지 않을 일이다. 다만 쉬지 않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소걸음(牛步)을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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