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형이 토론토로 돌아간 지 일주일 되었다. 작년 10월 중순에 귀국했으니 3개월 남짓 지났다.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장남이 떠난다는 사실에 어머니가 서운하셨나 보다. 밤잠을 설치셨는지 지난주 출국날 이른 새벽임에도 일찍 일어나셔서 공항으로 나서는 형을 배웅하셨다.
"잘 가고~ 아프지 않게 건사 잘해. 왔다 가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같이 와~" 약간 울먹이신다.
"예. 그럴게요. 크리스마스 때 봬요."
"에휴~. 서울도 아니고. 거기까지 이사를 가 가지고." 살짝 투정까지 부리신다.
그렇게 형이 떠나면 어머니 속은 어떠실까? 열 손가락 중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지만 오랜 내 추측으론 당신께 장남이 언제나 최우선이었고 큰 누나가 두 번째였을 거라 여겨진다.
어제가 선친 기일이었다. 소천하신 지 어느덧 44 년이 되었다. 선친 생전 연세보다 막내 동생 나이가 더 많아진 세월이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뜬 남편을 놓지 않으시려는 듯 언제나 제사, 차례를 공들여 직접 준비하셨다. 몇 해 전에 누나, 형과 상의를 한 끝에 전통적인 제사, 차례를 모시지 않고 선친을 추모하는 가족 모임으로 지내기로 했다. 내심 서운해하실 당신께는 아버지도 이제 괜찮다 하실 거라며 설득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음식 장만을 하는 노력과 정성으로 선친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 이내 익숙해졌는데 어제는 코로나 19 분위기 탓인지 추도 모임을 생략했다. 둘째, 셋째 누나와 막내가 어머니와 점심때 모이는 걸로 갈음했다.
네이버 밴드 앱이 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 밴드를 만들었다. 밴드 명칭은 '황여사네 6남매'. 그렇다. 어머니께서 슬하에 6남매를 두셨다. 형이 토론토에 도착한 날, 가족 모임 밴드에서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런저런 덕담이 오가던 끝에 토론토에 계신 큰 누나가 사진을 하나 올렸다. 어머니가 딸, 아들과 손주들을 만나시겠다고 여든 넘은 노구를 이끄시고 캐나다 가셨을 당시 찍은 사진이다. 큰 아들 손잡고 한 걸음 뒤로 따르는 큰 누나를 이끄시듯 보무도 당당히 걸으시며 훤히 웃으시는 모습. 요즘 보기 어려운 어머니 활력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 언제 사진이에요? 어머니도 그러시고 다들 훨씬 더 젊으셨어요."
" 2015 년인가? 오타와에서 찍은 걸 거야?"
6년 전 일이다. 더 나이 들면 다시는 캐나다에 있는 누나, 형과 손주들 못 볼 거라며 방캐나다를 주장하신 끝에 막내 매형과 누나가 동생과 함께 어머니 모시고 북미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밴쿠버, 토론토, 오타와, 퀘벡을 거쳐 뉴욕까지. 연세에 비해 동선이 무척 길었지만 연배에 비해 기력 넘치는 어머니에 4남매 가족이 총출동했으니 시끌벅적 호사스러운 여행이었을 게다. 뉴욕에 있는 손녀 만나기 위해 트럼프 인터내셔널 뉴욕에 투숙한 덕분에 내가 트럼프 초상이 새겨진 초콜릿을 얻는 횡재를 누렸다. 당시엔 트럼프가 대통령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진을 보며 아쉬움 반 걱정이 반이다. 불과 6 년 전인데, 지금 당신 기력이 그때와 너무 차이 난다. 큰 누나에게 보내줄 동영상을 카톡으로 보내며 묻는다.
"밖에 거의 안 나가시니 기력이 많이 쇠하셨어요. 어머니가 걱정이에요."
"엄마는 지금 행복한 생활을 하시는 거야. 우리는 최대한 성심성의껏 하면 돼.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꾸나. 누나도 얼른 들어가도록 노력 하마!"
업무시간 중이라 서둘러 카톡 대화를 마쳤다. 그런데 어머니가 지금 행복하시다는 누나의 말이 자꾸 곱씹어진다. 행복하시다는 건 몹시 기쁜 일인데 시리도록 아픈 감정이 이는 건 왜일까? 김 소월 시인 '진달래'의 애이불비가 이런 느낌 인지.
어머니는 1934 년생, 올해로 여든여덟이시다. 팔순 때 남해 힐튼 리조트에서 조촐하게 가족 모임을 했다. 다들 의기투합하여 어머니 여든다섯 되시는 해에 지중해 크루즈 가족 여행을 가기로 정했다. 5 년 넘게 매월 경비를 거둬 상당한 금액을 모았다. 그러나 결국 크루즈 여행을 가지 못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십여 일 크루즈 여행을 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여행가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께서 당신의 용돈을 헐어 6 남매 내외 모두에게 금반지 하나씩 해주셨다. 여유 없이 키운 자식들과 제대로 해준 게 없었을 사위, 며느리들에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선물을 직접 내려주시고 싶은 심정이셨을 거다.
몇 년 전에 어머니께서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 기억이 예전 같지 않으신 듯한 경우가 간혹 있었어도 가족 어느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 모 대학 병원 정기 진료차 간 김에 별생각 없이 신청한 검사에서 당혹스런 판정을 받았다. 놀랄 법한 일임에도 다들 담담했던 걸로 기억난다. 다행히 이제 치매가 막 시작하는 초기였고 약물 치료로 진행을 상당히 막을 수 있다는 진단었다. 어쩌면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병, 그러나 현대 의학으로는 완치가 안될 증상. 캐나다에 계신 형을 제외한 나머지 남매들이 어머니를 돌 볼 계획을 서둘러 짰다.
처음에는 형편이 닿는 대로 번갈아 어머니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또 알츠하이머 요양 돌봄 서비스도 신청했다. 큰 누나, 둘째 누나, 내가 주중 5일을 나눠 자고 셋째 누나가 주말을 맡기로 정했다. 막내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니 혹시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막내가 형제들에게 연락을 하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고 요양 돌봄 서비스 관련하여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이제는 셋째 누나 내외가 어머니 댁, 옆 동으로 이사 와서 사돈 어르신과 어머니를 격주로 모신다. 당초 예정보다 서둘러 교직에서 명퇴한 둘째 누나도 주 2~3일을 어머니 댁에서 보내신다. 큰 누나는 토론토와 한국을 오가시는데 서울에 머물 때면 주중 이틀 정도를 어머니와 함께 하신다. 형은 토론토에 계시고 막내야 언제나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니, 정작 어머니를 가장 자주 뵙지 못하고 공양을 못하는 이가 바로 다섯째인 나다.
아무리 약의 효능이 뛰어나더라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듯, 진행되는 치매를 막을 수는 없다. 그렇게 어머니는 기억을 조금씩 잃어 가신다. 지나고 보면 모래시계가 아래 편에 쌓이는 것처럼 당신의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씩 희미해지시는 것 같다. 손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 이름을 헷갈려하시거나 누가 몇 째의 아들, 딸인지 가끔씩 가물가물하신다. 이제는 당신이 손수 낳으신 6남매가 사는 곳마저 돌아서면 잊어버리시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겐 5촌 당숙과 시계 유리 공장을 동업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조금씩 집안 형편이 기울었다. 이를 만회하려던 어머니가 두어 번 사기까지 당하신 다음, 평생 보험 모집을 하며 6남매를 키우셨다. 80 년대부터 2천 년 초반까지의 금융 인프라 환경은 지금과 격세지감이다. 유달리 정이 많으신 어머니는 굳이 보험을 가입한 지인이 지로로 입금을 하겠다고 해도 한사코 손을 저으시며 매월 보험료를 부어주는 정성에 보답키 위해서라도 일일이 만나 인사하고 수금을 하셨다. 우리가 등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셔서 저녁 늦게 귀가하셨다. 서울 온갖 곳을 걸어 다니셨으니 모르는 지리가 없으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내가 사는 집을 찾기가 어려우실 정도이니 당신 기억의 소실이 참으로 무섭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내 또래 친구 엄마들에 비해 나이가 많으신 걸 신경 썼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난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걸 더 질색했다. 지금도 촌지가 있을까?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을 텐데 나로 인해 홀로 되신 어머니가 담임교사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여유 있지 못한 형편에 괜한 촌지라도 드릴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내 스스로만 잘하면 촌지 따위 없어도 얼마든지 학교생활 잘할 수 있으리란 세상 물정 어두운 가당찮은 자신감이었으리라. 누나, 형 초등학교생, 중학생 때 선생님들에게 인사드리며 친밀한 관계를 지내셨던 어머니가 나 모르게 선생님들을 만나셨을지 모르겠다. 학교에 오는 걸 그리 싫어해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거의 매일같이 대놓고 학교에 들리셨다. 식은 도시락을 먹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보험영업소 출근 길에 갓 지은 밥으로 마련한 도시락을 수위실에 맡겨놓으신 거다. 수위 아저씨는 이런 어머니 없다며 꼭 효도하라고 하셨다.
어릴 때 어머니 나이에 민감했던 것처럼 평생 어머니와 내 사이엔 뭐라고 말하기 힘든 무언가의 틈이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밤늦도록 일하시고 들어오시는 어머니께 진심으로 따뜻한 인사를 드린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정작 다른 이를 보면 늘 속 쓰리도록 아파했다. 대학가 즐겨 찾던 단골 주점에서 초콜릿이나 껌 같은 주전부리를 행상하시는 분 중에 어머니 인상과 흡사하신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내게 사 줄 돈이 없을 땐 일행들에게 내가 강매를 하곤 했다. 웃으며 술을 마시다가도 그 분만 보면 가슴이 아려와 쓴 소주를 삼키기 일쑤였다. 그렇게 40여 년 이상을 당신에게 냉정하게 대해 왔다. 친구 분들과 동유럽 여행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누나에게 들었을 때 보내드리고 싶었으면서도 어머니께 내 얘기하지 말라며 큰 누나가 드린 걸로 하자고 부탁한 적까지 있었다. 당신에겐 허물없이 소담을 나누거나 싸울 듯이 언성을 높여도 이내 풀어지는 누나들이나 무뚝뚝하지만 속마음을 전해주는 형과 달리 차가운 표정이 다반사인 나란 존재가 무척 서운하실 일이었을 거라 여겨왔다. 와이프에게도 사랑한다는 표현에 인색하지만 살면서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2, 3 년 전부터 가족들이 모일 때면 어머니께서 빼먹지 않으시는 단골 레퍼토리가 있다.
"내가 다섯째를 낳고 아버지에게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몰라. 또 딸 낳는다고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 떡하니 다섯째를 낳으니 아버지가 '당신 고집도 쓸만한데!' 하시며 기뻐하셨어. 다섯째 낳고 나서 아버지에게 큰 소리 칠 수 있었어."
"다섯째. 너는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해. 나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어" 은근히 자랑스럽게 말씀하신다.
태몽도 그렇게 길몽일 수 없었다나! 옆에 있는 막내 태몽 얘기는 거의 하신 적이 없는 게 생각날 때면 내가 서둘러 어머니 레퍼토리를 가로막는다. "막내 얘기도 좀 해주세요"라며.
형이 캐나다로 들어가기 얼마 전, 출국을 환송할 겸 누나들과 어머니 댁에서 식사를 했다. 어머니께서 평생 간직한 속내를 처음으로 밝히셨다. 평소 친척 어른들에게 내가 분단 전 황해도 개성에 남으신 둘째 숙부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보고 둘째 숙부와 많이 닮았다 하시면서 그분이 그렇게 경우 바르고 함부로 얘기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대하기 어려운 분이었다며 나를 대하기가 다른 형제들과는 좀 달랐다 하신다. 나를 낳으시고 아버지께 면이 섰다며 그렇게 기뻐하신 어머니가 정작 나를 기를 때는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 거란 생각에 내색은 안 했으나 죄송스럽기도 하고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난 왜 감정 표현에 인색한 걸까? 친구나 지인들에겐 그나마 낫다. 가끔 실없는 농담이나 객쩍은 소리라도 던지니까. 정작 지근거리 내 식구들에게 표현 결핍증이 심한데 어머니께는 유별나다. 어머니가 가계를 책임져야 한 탓에 밖으로 돌아다니셔야 하는 현실에서 어렸던 나는 동생과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물론 누나들이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을 차려주긴 했지만 늦은 오후는 늘상 동생과 둘만 집에 남아 있었다. 나와 내 동생, 둘이 세상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한 발만 헛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다시는 내가 꿈꾸는 걸 가질 수 없을 거란 공포에 시달렸다. 어떻게든 동생과 낙오되지 않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투의지가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나는 목석같은 인간으로 자라왔던 듯하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날 무렵, 어머니께서 집에 오겠다고 연락하셨다. 며느리 불편할 거라며 우리가 모시지 않으면 절대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는데. 무슨 일 있냐고 여쭤도 집에서 보자고만 하신다. 퇴근하자마자 귀가해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아내가 마련한 저녁을 드시면서도 별말씀이 없으셨다. 막연히 삼 년 만에 부부 명의로 마련하여 집들이를 하였는데 또 와보고 싶으신 건가 여겼다. 이윽고 어머니께서 입을 여셨다.
"결혼할 때나 집 마련할 때 해준 게 하나도 없구나"하시며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열어 보니 오만 원 신권으로 5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뜻밖에 상황에 놀라서 고맙다는 말씀도 못 드렸다. 볼 일을 다 보셨다는 듯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제 집에 간다고 하신다. 이미 어두워진 밤거리, 이대로 대중교통편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릴 수 없었다.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서둘러 차로 어머니를 모시고 길을 나서며 한 말씀드렸다.
"고마워요. 그래도 담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어머니 쓸 돈도 없으실 텐데."
모집인을 그만두시고 어머니께서 버시는 수입이 마땅치 않았을 시기였다. 틈틈이 지인의 식당 주방일을 거들거나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모으신 비상금일 게 분명했다. 애써 모으셨을 그 정성을 또 받을 수는 없었다. 그리곤 어머니 댁으로 가는 내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500만 원! 당시 어머니께는 매우 큰 자금이었을 것이다. 이걸 내게 마련해 주시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까? 또 내게 주시고 나서는 한시름 놓았다고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기셨을지 궁금하다. 과연 어머니는 큰 누나 형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셨을까?
어쩌면 그동안 큰 누나에게 특히 신경을 더 쓰신 건 아버지 돌아가시고 대학 가려던 누나에게 대학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그냥 은행에 다니라는, 큰 딸에게 차마 하지 못할 말을 하셨다는 자책 때문이진 않았을까? 집안의 기둥인 장남, 형에게는 세상 떠난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셨을 법하고 그만큼 형을 의지했을 게다. 어머니는 "너는 교사가 천직이야"라며 둘째 누나에게 교대를 권하셨다. 6남매 중 가장 이성적이고 무던한 둘째 누나가 안정된 삶을 누리기 원하셨을 것이고 그만큼 당신의 짐을 덜으셨는지 모른다. 지금도 살갑게 어머니와 티격태격하는 막내 누나에겐 "너 아니었으면 늘그막 내가 어쩔 뻔했냐?"며 매번 고마워하신다. 막내! 당신께 막내는 가슴 한편에 언제고 묻어 놓을 존재이다.
다시금 곱씹어 보건대 당신께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애당초 없었다.
아내가 어머니를 존경하는 부분이 있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껏 한 번도 어느 누구에게 상스런 표현을 하신 적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기분 나쁠 일도 있고 하다 못해 뉴스에라도 인간말종 같은 이가 있을 법한데 거친 언사를 단 한 번 듣지 못했다고 한다. 언제나 늘 예쁘게 말씀하신다며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할 거라고 얘기한다. 어느 누군가에게도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가 어머니의 삶을 이렇게 곱게 가꾸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살면서 스트레스받을 일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6남매를 힘든 형편에 키우고 일가를 이루게 하신 40여 년 동안 어머니에게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있었을까? 자식들에게 풀지 못할 스트레스, 내가 드린 불편함이 당신에게 치매로써 돌아온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린다.
지난여름 어느 날 같이 사는 친 큰 손주 이름도 헷갈려하시면서 선친 함자는 또렷이 기억하셨단다. 이를 듣고 신기해하던 둘째 누나에게 이렇게 얘기하셨다
"이다음에 하늘나라에서 아버지가 딴 여자 만나 모른척하면 어떡하지?"
"아버지 만나면 뭐라고 하고 싶은데요?" 누나가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사랑해요. 나만 혼자 잘 살아서 미안해요. 잘 살펴줘서 고마워요." 아버지 얼굴은 이제 생각도 안 나고 꿈에도 한 번 안 나온다고 하시면서도 아버지 함자를 들으면 여전히 그 옛날 연인의 심정으로 돌아가시나 보다.
어린 소녀 같은 어머니의 사랑고백에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는지 어머니가 그토록 듣고 싶으셨을지 모를 고백을 했다. 전화로나마 사랑한다는 말에 무척 즐거워하셨다.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다고 막내 누나에게 얘기했더니 누나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머니께 꽃 한 다발을 안겨드렸다. 내 사랑고백에 꽃까지 선물 받아 무척 구름을 걷는 것 같다며 행복해 하셨다.
치매 판정을 받으신 다음으로 몇 년째 외출을 자제하시는 중이다. 누나들과 일 년에 예닐곱 번 가량 동해로, 남해로 며칠 여행을 다녀오시는 게 유일한 낙이 된 지 꽤 오래다. 평생을 걸으시고 팔순이 지나셔도 인근 경동시장에서 파는 김칫거리로 담가야 제 맛이라며 누나들이 난리를 쳐도 손수 양손에 한 짐으로 시장을 보신 게 이젠 까마득한 옛 일이 되었다. 기력은 점차 쇠하고 먼 기억도 부지불식 잊히는 중이시다. 그럼에도 아직도 튼튼하다며 손자들 장가가서 증손자가 초등학교 갈 때까지 안 갈 거라고 장담하신다.
어머니 고운 마음처럼 치매도 예쁘게 드시는 것 같다. 어쩌면 저 하늘에서 정말 아버지가 잘 살펴주신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며칠에 걸쳐 심란하던 마음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서야 큰 누나가 얘기한 어머니의 행복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보내시면서 자식들 앞에서 숨겨야 했던 슬픔과 앞 날의 불안감, 늘 부족했을 생활비를 어떻게든 당신 스스로가 메꿔야 하는 절박함, 친자식을 손수 거두지 못했다는 마음에 손주들은 당신이 가능한 한 보살피려 한 말년의 안쓰러움. 어머니는 이런 질곡들을 특유의 무던함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텨내셨을 텐데 서서히 이 기억들 역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때도 행복하셨겠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운 행복을 누리진 못하셨을 것 같다.
기억을 잃으시는 만큼 어머니의 행복이 늘어나리라 믿고 싶다. 언젠가는 내가 드렸던 냉점함도 잊으시겠고 그러면 좀 더 평화로우실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가 행복한 삶을 오래 누리셨으면 좋겠다. 먼 나라에서 아버지와 재회하실 날이 조금이라도 늦게 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 말이 우리 가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행복을 조금씩 얻으시는 유쾌한 징후일 뿐이고 역설스럽게도 내겐 다행이다. 난 평생을 어머니의 효자로 살지 못했지 않는가?
멜라니아. 어머니가 소녀적에 받았던 본명처럼 오랫동안 음악을 늘 곁에 두고 아버지와의 사랑만은 끝까지 간직하시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