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운설 Feb 21. 2021

[서평, 리뷰] 한국과 일본, 2000년의 숙명

역사인식에 숨겨진 악마의 디테일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이나 치명적인 요소가 세부사항에 숨겨져 있다는 의미로 쓰는 관용구이다. 종종 자신의 이해를 드러내지 않고 관철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명분이 약하거나 과도한 이익을 얻으려고 할 때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사안일수록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의도적으로 숨긴 실체를 꿰뚫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그릇된 주장과 믿음을 이용해 사람들을 호도하여 속이고 부당한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혹세무민과 일맥상통한다.
 
  '한국과 일본, 2000년의 숙명'은 한일 양국 간에 고대 이래로 이어온 애증과 은원 관계를 밝힌 책이다. 일본 아스카 문명을 발원시킨 백제의 선진 문물과 백제계 지배계층이 주도한 양국 교류 시기로부터 여몽연합군의 무자비한 일본 침공으로 인한 적대 관계로 치닫다가 왜관과 통교의 공존시대를 거쳐 임진왜란과 정한론으로 이어지는 대결과 침탈의 역사까지 알기 쉽게 서술다. 그리하여 지난 2천 년간 이어져 온 친선과 대립이 반복된 양국 간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허심탄회하게 소통하여 공존, 공생 미래를 열어 나가자는 결론을 제시한다. 반박할 논리가 마땅찮게끔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 먼대승적 차원에서 일본과 친선관계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속내가 은연중에 깔린 내용이다.
 
  책을 덮은 후 이 책에 숨겨진 악마 디테일을 찾고 싶었다.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인으로서 식민시대 아픔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과 끝없는 갈등과 대결을 벌이자는 취지가 아니다. 양국 근대사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식민지배와 수탈의 역사를 극복하고 선린과 공영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방법론을 찾고 싶어서다. 진정한 공생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양국이 각자의 길에서 무엇을 노력해하는가를 알리려는 취지였다.
 
  '무쿠리고쿠리'. 일본인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상상을 넘는 잔혹함 접할 때 무의식적으로 쓰는 말이다. 무쿠리고쿠리는 몽고군과 고려군를 한다. 여몽 연합군이 일본 규슈를 토벌하면서 잔인하게 양민을 학살한 데서 유래했다. 일본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선진문물과 인적 교류 덕택에 고대 문명을 이루었다. 한반도에 우호적이던 일본이 한국에 적대적로 돌아서게 된 결정적 계기가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탈에 있다는 해석이다. 삼국시대에 왜구 피해가 없었던 반면 여말선초 격변기에 왜구가 극심하게 창궐했던 원인이 고려에 대한 복수심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역사 인식이라면 한민족이 가만히 있는 일본을 건드린 셈이다. 고려의 일본 출정이 임진왜란일제가 저지른 조선병탄을 야기했다는 논리다. 그러나 한 질문만으로도 이를 반박할 논거가 꽤 많다. 중세 전후 당시 왜구는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동남부와 태국 심지어 베트남까지 진출하여 약탈했다. 한반도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면 태국과 베트남, 중국이 일본에 저지른 만행이나 침략이 있었던가? 또 삼국시대 출몰한 왜구에 대해서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 중앙정부가 규슈와 혼슈 해안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결과 지방 토호세력의 주도로 왜구가 창궐했다는 해석이 타당하다. 한 마디로 왜구는 해적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유격 군대이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무쿠리고쿠리는 저자가 숨겨 넣은 악마의 코드라고 해석하는 게 결코 지나친 판단이 아닐 것이다.
 
  본문에서 고대 이래 한일 관계에 대해 설명하거론되는 역사학자들 중에 눈에 띄는 이들이 있다. 김 현구 고려대 명예 교수와 동북아 역사재단 이 재석 박사이다. 김 현구 명예 교수의 임나일본부 해석은 사뭇 논쟁적이고 복잡한 사안이다. 그는 재야 소장학자 이 덕일과 법적 소송까지 진행한 바 있다. 김 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의 핵심은 임나일본부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는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목라근자가 야마토 왜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 남단에서 임나(가야)를 구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목라근자가 백제 출신 장군이라는 점에서 임나를 백제가 경영한 것과 같으니 자신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는 논법이다. 이재석 박사는 동 소송에서 김 현구 교수 측 증인이었다. 그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철제 무기를 무장하지 못하여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다거나 목라근자가 누구의 명령으로 신라와 가야지역을 평정했다고 가설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김 교수가 임나일본부 자체를 부정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증언하여 사실상 김 현구 교수를 지지한다.
 
  형식 리상 김 교수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이 한반도 남단에 임나일본부를 경영했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 없다. 오히려 그의 주장은 가야를 백제가 지배했다는 임나백제본부설에 가깝다. 그렇다면 김 교수는 식민사관이 아니라 이에 맞서 싸운 민족사학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그는 목라근자에게 신라와 가야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자를 명확히 지적하지 않는다.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이 책에 나오는 소가노 마치와 동일인이며, 소가노 일족이 천황마저 갈아 치우는 야마토 정권의 핵심 지배층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목라근자와 그 후예들이 임나를 경영했다는 그의 해석은 꽤나 위험하다. 백제계 도래 귀족인 소가노 일족과 야마토 정권이 임나를 경영했다는 주장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덕일은 바로 이러한 악마의 디테일을 지적한 것이다.
 
  동북아 연구재단은 정부의 후원을 받아 중국 동북공정에 맞서 한국을 둘러싼 동북아 역사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설립된 연구단체이다. 이 재단은 한반도 역에서 독도를 제외시키고, 4세기까지 한반도에 백제와 신라가 존재하지 않는 지도를 만들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삼국시대를 기록한 삼국사기 사료마저 부정한 것이다. 재야 사학자들은 고대사를 바로 세워야 할 동북아 연구재단이  오히려 식민사관에 경도되었다고 의심다.
 
  오늘날 일본을 이끄는 천황과 정, 관, 재계를 이끄는 지도층의 상당수가 백제계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본 천황마저 일본에 도래한 백제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은연중에  인정다. 일본 지배 계층이 백제계 출신이라면 한민족의 피가 섞혈연인데 한국에 대해서 왜 이다지 적대적일까? 막연히 선진문물을 한반도에서 전수받았다는 역사 문화적 열등감 이로 인한 자격지심 혹은 삐뚤어진 경쟁의식 때문이라 여겼다. 이 책을 리뷰하면서 전에 읽었던 몇 권을 다시 들추어 곰곰이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일본 지도층들이 갖는 혐한론, 정한론의 태동 동이족 역사 그 자체에 뿌리가 있을 거란 해석에 이르게 되었다.
 
  동북아 역사는 漢族의 중국과 대립해온 북방 민족의 역사이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동이족은 단지 오늘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韓民族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동이족은 중국 화북, 만주, 몽고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고대 동북아에 근거했던 북방민족을 통칭한다. 우리 한민족은 여진족, 몽고족, 선비족, 거란족 등과 함께 동이족을 구성하는 한 분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할까? 일본 열도에는 역사시 이전부터 토착민들이 존재했다. 한반도 도래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다음부터 여러 도래 세력들 고대 일본과 토착민들을 지배하면서 서로 경쟁하였다. 일본 고대 야요이 문화와 아스카 문화, 고분시대는 가야, 신라, 백제에서 전수받은 문물에서 비롯되었다.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계가 주도했으나 후기에는 백제계가 일본을 지배했다. 야마토 정권은 사실상 백제 왕족 출신 천황과 백제계 귀족의 연합정부였다.
 
  이 책에 소개 야마토 정권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소가노 일족은 백제의 목씨 귀족이다. 소가노 이루카를 죽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신라계로 추정된다. 결국 고토쿠 천황과 나카노오에 황태자, 나카토미노가 연대해서 소가노를 죽인 것이다. 백제계 천황이 신라계 호족을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소가노를 실각시킨 친위 쿠데타다. 결국 소가노 살해사건은 같은 백제계 출신임에도 정권의 명운을 놓고 왕권과 신권이 쟁투한 결과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림 - 백제 왕실과 일본 천황가 계보]

  출처 : 대쥬신을 찾아서, 김운회


  문주왕 이래로 백제 왕족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가 계보를 이어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일본에 있던 백제 왕족 부여풍이 백제로 건너가 복신,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다. 이들 원군 요청 덴치 천황 대규모 군사를 보내지만 백강에서 허무하게 패한다.


덴치 천황 본국인 백제 멸망과 동 항렬인 의자왕 복수를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백강에서 허무하게 패배하여 백제 멸망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나당 연합군에 위협을 느낀 백제계 천황은 처음으로 일본이란 국호를 쓰며 백제와의 관계 지우기에 나선다. 한편으론 백제를 무너트린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깊어갔다. 나는 오늘날 한일 양국 간 내포한 애증의 뿌리가 나당 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향한 원한에 있다고 해석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백제는 부여를 이은 고조선의 적통이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당한 후 부여가 고조선을 잇는 주도세력역할을 담당하였다. 고구려가 발원하여 대륙 부여를 멸망 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역사, 혈연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만주와 요동에서 세력을 잃고 한반도로 몰린 백제를 달리 표현하면 반도 부여이다. 반도 부여의 일부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 왜, 즉 열도 부여를 이끄는 중심세력이 되었다. 열도 부여 세력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인 반도 부여를 멸한 신라야말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을 공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인식이 일본 지배 계층 면면에 이어져 온 결과가 오늘날 혐한과 정한의 뿌리가 아닐까 싶다.
 
  만일 신라가 원흉이었다면 신라가 망한 이후로 고려, 조선, 대한민국에 걸쳐 왕조와 국가가 바뀌었음에도 정한론이 이어져 온 것은 어떤 이유로 해석해야 하나? 이 점에 이르 내 역사 해석이 편협할 수 있음을 미리 전제한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고려 개성 세력만의 단독 정권이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힘을 합 신라 지배계층이 자연스럽게 고려를 이끈 중심세력에 편입되었다. 조선도 마찬가지이다. 신진 사대부뿐만 아니라 고려를 이끈 권문세족 상당수 역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그 세력을 조선까지 이어 나간다. 한편 조선병탄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을사오적중 한 명이 이완용이다. 이완용이 조선 후기를 이끈 집권당 노론의 영수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자기 나라를 다른 나라에 고스란히 갖다 바친 사례는 없다. 대개의 경우 최소한군사적 대항이라도 시도한다. 압도적인 무력에 맥없이 굴복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친일파들이 식민시대를 이끌고 해방 이후에도 살아 남아 그 후예들이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어쩌면 우리 역사는 기실 통일신라를 이끈 기존 지배 세력들이 왕조와 국가가 바뀌는 변혁의 시기에도 변신을 거듭하여 지배력을 면면히 이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또한 천황을 중심으로 고래의 역사관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고대의 적대관계가 오늘날까지 한일 양국의 무의식 속에 이어지고 있건 아닐까?
 
  전술한 동북아 역사재단의 역사 지도나 김 현구 명예주장의 학설을 직접적으로 식민사관이라 단정할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다소 부족하다. 이 덕일 소장이 주장하는 바가 어느 정도 무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사료들을 종합하여 고증하면 역사적 진실이 충분히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 일본서기를 근거로 한 김 현구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한반도 남단에서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신라를 침략하고 7 가야를 평정한 기록이 공히 기록되어야 한다. 특히 피해 당사국인 신라와 가야 입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 신덕 황후가 신라를 침공하고 가야를 평정하였다고 기록된 같은 연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국의 사서 어디에도 신라, 가야가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와있지 않다. 일본이 아닌 백제가 임나를 경영하였다는 김 현구 교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신라, 가야를 평정하여 임나를 구원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임나가 가야라는 이론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임나가 가야라는 그의 해석 비록 그가 의도하지 않았을 지라도 일본 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오용될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싶다.
  
  주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사군과 고대 한민족이 경영한 국가의 강역에는 국내외 사료상에서도 많은 허점이 있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남북에 위치한다. 그러나 중국 위서에서는 고구려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한다고 알려진다. 대륙 부여의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이다. 단재 신 채호, 북한 역사학자 이 지린, 한국 윤 내현 교수 그려내는 고조선은 우리가 교과 과정에서 배운 역사 상식과 너무나 다르다. 역사학에서는 사료와 고증에 근거하여 치열하게 논박이 되어야 할 이슈임에도 주류 사학자는 몽상가 내지 사이비, 유사 학자라고 비하 혹평하며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이 회피하는 것은 인용할 사료와 고증이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에 너무 옹색하고 모순된 때문이다. 주류 사학자들이 스스로를 역사학자라 여긴다면 재야 사학계가 제시하는 고대 상고사의 異論에 대해 응당 학문적 논쟁으로 진지하게 맞서야 할 일이다.
 
  톰 크루즈가 열연한 '라스트 사무라이' 영화에서 메이지 유신 세력에 저항하고 천황을 복위시키려는 우국지사가 등장한다.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라스트 사무라이를 본 관람객들은 최후 결전인 세이난 전쟁에서 청렴결백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를 따르는 사무라이가 분연히 칼을 들고일어나 근대식 기관총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하는 라스트신을 보며 비장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이코 다카모리야말로 유신 3 걸 중 가장 극단적으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펴다 실각한 메이지 유신의 주체였다. 근대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한론을 주창한 이가 요시다 쇼인이다. 그에게 사사받은 사츠마, 죠슈 번 출신 제자들이 훗날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주역이다. 유신 3 걸과 조선병탄을 이끈 이토오 히로부미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재 아베 수상과 과반 이상의 내각, 그리고 자민당의 최대 세력은 정한론을 추종하는 일본회의라는 극우단체 출신이다. 이들에게서 진정한 과거사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일 종족주의가 화제이다. 저자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실이 부끄럽다. 아시아를 침탈한 일본이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답습한 궤변이 하나의 진실로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낄 지경이다. 이 시대에 역사 지성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은 일차적 자료객관적으로 철저히 검토하여 진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역사학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의 공정한 관찰자야 한다. 자신의 역사의식과 역사관에 배치되더라도 오직 사료와 고증에 입각하여 사실을 추론하고 해석해야 한다. 어쩌면 유 시민 작가가 지적한 대로 역사에 대한 공정한 관찰과 해석이 현실에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가 있기에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체 게바라의 말이야말로 역사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理想이라고 말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리뷰]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