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

- 결핍에 관하여

by 게으른개미

국내외 전시를 다니며 회화작품을 볼 때면 거울 앞에 선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느 날엔 렘브란트의 늙은 자화상이, 어느 날엔 이름 모를 한 소녀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한다. 17세기 작가인 렘브란트, 친숙한 모네와 고흐를 떠올려보더라도 최소 1-2세기 전 사람들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 내가 보고 있는 게 그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음에도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세히 작품을 읽는 건 내가 전시를 보는 방식 중 하나다. 그 순간의 감정과 머릿속에 떠오른 부유물들은 현재의 나를 가장 잘 마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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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녀온 <바스키아: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은 동시대(20세기) 작가 바스키아의 전시다.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서 힙한 셀피와 작품을 인스타로 업로드할 것 같은 그는 이미 1988년 세상을 떠났다. 이전까지 누군가의 자화상에서 나를 발견해 왔다면 이번 바스키아 전시에서는 숨겨진 상징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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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캔버스)라는 형태적 요소가 중요하지 않았던 작가 바스키아는 캔버스뿐만 아니라 길에서 주운 모든 것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찢어진 천에 가까운 캔버스에 얇게 그은 선, 독립적인 철자들, 초록 빨강 노란색을 활용한 그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건 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한번 지나쳤다가 되돌아갔는데, 이 작품은 그의 예술인생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첫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바스키아는 유색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에 태어나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그 시기 엄마로부터 받은 해부학책에서 수많은 예술적 가지가 뻗어 나왔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의 작품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굵기와 채색의 강도, 해부학적 그림, 암호 같은 텍스트, 왕관까지 그가 표현한 것들은 삶 그 자체였다.







나는 나의 결핍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가.


처음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단순하고 강렬한 색감이었다. 어딘가 익살스럽고 개구진 선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캔버스 속 모든요소가 그 자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60년대 태어난 바스키아는 아프리카계 이민자로서 겪어야했던 인종차별과 사회적 시선을 언어와 비언어로 표현해 나갔다. 이유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를 작품 속 색과 선 앞에서 나는 왜 분노, 결핍, 자기표현이란 단어가 떠올랐을까.


작품의 배경을 모른채 나만의 즐거움을 발견하는것을 좋아하지만 바스키아 전품은 그의 삶 자체이므로 과거사를 알게 되었을 때 더 깊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거친 선은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거칠다'라는 단어의 온도는 모두 다르게 느낀다.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알파벳과 선, 색으로 과감하게 표현한 그의 작품을 보며 새로운 쾌감을 느꼈다.

'속으로 숨기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게 바스키아는 대면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위트있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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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는 어떤 이에게 결핍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각기 모양은 다르지만 누구나 결핍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내가 자라면서 느낀 결핍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내 안에 잠겨있다. 언어로 남기는 것 조차 두려워했던 나였기에 바스키아의 거침없는 외침에서 나는 그가 느낀 무게를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표출하지 않으면 아마 견디지 못했으리라.


자신의 결핍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크고 작은 캔버스에 써 내려간 작품을 읽다 보면 하나의 기록과 반복적 외침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전시를 보았을 무렵에 나는 숨겨두었던 결핍의 그림자 아래 서 있었다.

마주설 용기가 없어 묻어두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나의 감정과 문제를 소화하는 방식이 달라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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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질 외침

한 줄의 글

낙서

반듯하지 않은 선

암호화된 나만의 언어 등

결핍을 스스로 마주할 때

나는 조금 더 강해질 것이다.


바스키아의 끝은 좋지 못했지만,

언어와 비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한 작품세계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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