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은 Nov 07. 2019

대화,

8월 중순의 일기 몇 장

1.



대화, 그것이 여행자가 지녀야 할 덕목인지도 모르겠다. 


대화.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찾아내는 어쩌면 간단한, 그 기제를.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는 바 사장님들에게 더 나아간 질문을,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지 못한 내가 아쉽다. 열흘이란 긴 시간 동안 어떤 인연도, 의미 있는 대화도 이어지지 못한 여행. 특별히 돋보이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과, 오분 만에 티가 나버리는 부족한 대화능력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건 외로움을 자처하는 길이 아닐까. 진짜 혼자 여행을 간다면, 잘은 모르지만, 퍽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행에 동반자를 정해놓고 간다는 건 그와의 독점을 뜻한다. 시간도 대화도 시선도. 혼자서 어찌 보낼 줄 모르겠는 시간에 그와 말 한마디를 더하며 보내면 되고, 눈을 둘 곳 없어 민망한 때에 그에게 시선을 향하면 되고, 밥 먹으며 맛에 감탄하고 싶을 때도 그에게 하면 될 테다. 


혼자 가려고 마음먹고 출발 이틀 전 끊은 비행기표에 따라붙은 엄마 덕분에 엉겁결에 여행의 테마가 어정쩡히 바뀌었다. 엄마가 함께라서, 엄마가 나를 독점해서 싫다고 그리 티를 냈건만. 어제에 이어 문득 상상해본다. 혼자였다면, 하고. 엄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동반자 없이 홀로였다면 어땠을까. 


그 긴 시간을 오롯이 홀로 감내할 수 있었을까. 초점이 어디로 향했을까. 시선을 어디에 두었을까. 누구에게 어떤 대화를 건넬 수 있었을까. 서로를 독점하겠다는 약속 없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능력의 한계치라든가 잠재력 같은 건 그때 드러날 수 있는 걸까. 





2.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후다닥 집어 나온 건 책방이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바깥보다 실내가 더 무더웠으므로 <안에는 여름>. 여름은 여름인데 왜 빠이는 여기보다 덜 덥다는지 이유를 모를 여름. 한국은 동남아보다 더운 여름. 


웃긴 건 이 책의 첫 장은 <입동>. 춥다 추워. 근데 왜 책 제목은 여름일까 궁금. 


어젯밤에는 여름 바이브를 느낀다며 바깥에서 곱창구이를 먹었다. 뜨거운 불에, 흐르는 땀에. 정말 바깥은 여름이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익숙해지는 바깥 자리는 이제 가장 선호하는 자리가 되었다. 처음 유럽에 갔을 때 항상 어둑하고 시원한 실내 자리를 좋아했다. 구석진 곳이라면 금상첨화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잘 없어서 홀에는 우리 일행뿐이었다. 전세 낸 듯 좋아했다. 차가 매연을 뿌리고 담배 연기와 먼지에 뜨거운 햇볕까지 들어오는 곳을 보며,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바깥을 고집하지?' 하던 때다. 


햇빛을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늘 그렇게 여행이란 게 사람을 바꿔놓듯,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꾸리는 게 손에 익을 때쯤 나는 태양 아래 서는 데도 퍽 익숙해졌다. 바깥이 여름이라도 바깥에 앉는 게 좋을 만큼. 내리쬐는 볕이 정수리만 콕 집어 때리기보다는 온몸을 사방에서 뜨거움으로 감싸 안아주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그 빛과 열기 사이에서 부둥부둥 부유하듯 걸어 다닌다. 


이젠 실내의 찬 공기가 반갑지 않다. 바깥의 뜨거움과 괴리가 너무 큰 차가운 실내는 오 분만 지나도 몸서리치듯 춥게 느껴져 도망치듯 바깥 자리로 나오고픈 마음을 먹게 한다. 어찌어찌 오래 버티고 있다가도 스윽 문을 밀고 나올 때 스미는 온열감은 아, 여름이구나 하며 마음을 놓게 한다. 추위에 꽁꽁 얼어있던 손발도, 뇌도, 마음도 풀리는 여름의 바깥. 열기가 지나쳐 잔뜩 흐르는 땀도 거북하지 않고 여름이니 땀이 나는구나 하며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바깥의 여름. 그 안에서 견뎌내려 아등바등 있자면 지옥이겠지만, 즐기고 있으니 내겐 천국이 된다.


빠이가 좋았던 이유다. 에어컨이 없는 게 자연스러워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기후에 몸이 마음이 풀어져 좋았다. 너무 찬 것만 마셔 배탈이 났는지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에 걸린 건지 몸이 으슬으슬했었다. 그때 나를 품어준 빠이의 따뜻한 날씨를 잊을 수 있을까. 어느 카페에서 가벼운 토마토 샐러드를 시키곤 또 금세 추워져서 테라스 자리로 옮겼는데,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아픔이 가시는듯했다. 늦은 저녁 거닐던 워킹스트리트의 찻집은 또 어땠나. 지날 때마다 신기했던 큰 토기에 끓여낸 레몬그라스 차를 화덕 곁에 앉아 마셨을 때, 비로소 겉과 속의 온도가 비슷해짐을 느꼈다. 일치감. 통일감. 편안함. 


속은 뜨거운데 겉은 차가울 때, 나의 열정과 열의, 혹은 분노와 슬픔이 내 바깥공기와 어울리지 않아, 덧없이 차가워 내 안의 불씨마저 말려버리는. 


속은 차가운데 겉은 뜨거울 때, 내 감정은 모두 말라, 시들어, 쪼그라든 채 겨우 버티는데 바깥은 한없이 뜨거워, 손을 뻗을 엄두조차 나지 않게 더욱더 속에 그대로, 가만히, 멈추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온도의 불일치는 단절이다. 불편하다. 아프다.


나와 온도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면 좋겠다. 같은 데서 열을 내고, 또 같은 데서 차가운.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곤 내가 아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있었다. 물먹은 풀이 내 몸에서 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입동>, 김애란




3. 


내 마지막 화자, 검은 피부에 우아한 속눈썹을 가진 노인은 누군가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눈 맞춰준 뒤,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하는 건 몹시 오랜만'인 데다 '너무 평범하고 친근해 눈물이 날 것 같은' 모국어로 뭐라 대꾸해주길 바랐다. '응'이나 '그래' 같은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그뿐이라도.

<침묵의 미래>, 김애란


나는 성실한 청자이지 못하다. 화자를 고독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했던 얘기를 또 해도 기억에 오래 담아두지 않기에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했던 얘기를 또 하면, 그것이 기억에 꽤 선명하게 남아있을 때는 금세 무료한 표정을 짓는 게으른 청자가 되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끝내 그의 공간과 시간을 나눠 갖지 못하고 빼앗아 버리는 데 급급한, 공격적이나 수동적인 청자. 화자에게서 빼앗은 시간과 공간과 이야기의 여백, 그 크기를 어림짐작하며 승리를 점치는 호전적인 청자. 빼앗은 크기만큼의 내 이야기를 꾸역꾸역 집어넣을 때 비로소 이김을 확신하며 의기양양해지는 못된 청자. 문득 나의 화자들에게 미안해지는 밤. 


대화하는 방식이 곧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라 한다면 나는 진실로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곁에 둘 성정이 되지 못한 걸 테다. 나의 취향에 물들이고 내 시간표에 길들이며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내 사람', 소유로 상대를 도구화하는 여전히 못된 친구, 못된 연인, 못된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여백은 하나도 내어 보일 줄 모르는 얄팍하고 심술궂은 사람. 


대화에 미숙한 나는 글을 쓰고 서로 보여줄 때도 말을 전할 때와 같이 굴었다. 타인의 글은 손에 잠시 두었다 씻어 날리는 먼지처럼 본 것이다. 그 가벼움이, 업신여김이 타인에게 어떤 폭풍과 상처를 남기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어 모인 사람들끼리 공부하면서, 내가 기억지 못하는 수많은 패악질로 사뭇 외로워진 이들이 이 길을 그만두려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를 때면, 정말. 싫다. 



작가의 이전글 슬픔의 뉴트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