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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은 Nov 16. 2019

여행이 끝날 수 없는 이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느낀 것은, 여행 내내 온종일 신고 다닌 쪼리가 유난히 한국 땅에선 발바닥에 고통이 밀려온다는 것이었다. 오르막을 오를 땐 벗겨지기 일쑤요, 내리막을 걸을 땐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가 찢어질 것 같았다. 바닥은 또 얼마나 얇던지, 쿠션이 풍성한 운동화만 찾던 내가 이 쪼리를 신고 어떻게 사방팔방 다녔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한국에선 다시 신을 일 없을 것 같은 쪼리를 신발장에 깊은 곳에 넣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와야 했다. 


여행은 일상에 상처를 남겼다. 매번 여행에서 돌아온 후엔 여행 기간의 곱절만큼 힘들어했다. 도무지 일상이란 게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떠나는 것에 대한 환상과 갈망은 필히 떠나온 곳과의 단절을 동반했다. 그 단절을 넘어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압박감은 더욱 이곳과 그곳의 괴리를 증폭시킬 뿐이었다. 이곳의 하늘과 바람과 햇빛마저 그곳에는 못 미치는 듯했다. 마음은 일상에 발붙이지 못한 채 여전히 그곳을 맴돌고 있었다.


‘그곳은 뭔가 달랐다’며 매일 일상을 한탄하고 괴로워하던 중, 클라우드의 휴면 처리 알림이 날아왔다. 무슨 사진을 넣어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무렵 접속한 클라우드에는 또 다른 여행 사진 수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껏 찾아볼 생각도 못 했던 사진들, 인화해놓았다면 켜켜이 먼지가 세 겹은 쌓였을 테다. 매번 요란스레 앓는 여행 후유증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일상의 동요는 그곳에서의 기억이 찬찬히 빛을 바란 후에야 잦아들기 시작했다. 여행이 남긴 상처도 그렇게 아물어 갈 때쯤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여행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다. 나는 여행 전과 후로 나뉠 만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지 않았고, 그저 여행과 일상이란 이분법에 맞춰 끄고 켜지는 스위치에 불과했다. 여행은 유의미한 사건이 되지 못한 채 스위치가 꺼진 동안에는 깜깜히 잠들어 있는 역할을 강요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여행을 좋아하면서 나는 여행을 영원한 이등 시민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래서 일상으로의 초대장을 건네기로 했다. 떠남과 머무름은 반대말이 아니라는 걸, 물고 물리는 과정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될 수 있단 걸 보여주기 위해서.


황금빛이 감도는 보리 색깔의 쪼리를 신장에서 꺼낸다. 신는다. 문을 나선다. 이곳의 길을 한참 걷는다. 그러나 전과는 다르다. 여행을 하듯이 괜스레 온 사방을 둘러보며 걷는다. 하늘도 바람도 햇빛도 새삼스레 느껴 본다. ‘이곳 하늘도 그곳처럼 높구나’. 매일 뜀박질 같던 걸음걸이도 자연스레 느슨해진다. 발바닥이 더 이상 욱신거리지 않는다. 


쪼리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게 아녔다. 이곳의 나는 쪼리를 신고 걷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곳의 나’나 ‘그곳의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뉠 수 없다. 이곳에서 그곳의 신을 신고 걸어가는 한 하루하루가 떠남이자 머묾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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