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서른이 되고 싶은 스물아홉의 이야기
- 2022년에 쓴 글입니다.
스물여섯의 나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애청자였다. 일도, 사랑도, 우정도 멋지게 해내는 서른의 진주, 한주, 은정이가 멋있었고, 서른은 그런 나이인 줄 알았다. 인생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이룰 만큼 이룬. 일도, 사랑도, 우정도 잘 해낼 수 있는.
올해로 스물아홉. 학교를 빨리 들어가서 스물여덟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친구들은 서른 예방 주사라며 생일 케이크에 큰 초를 세 개 꽂아주었다. <내가 삼십 대가 됐다>라는 제목의 책도 사주었다.
올해 말부터 내년 초까지 원하지 않아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서른이라는 얘기를 들을 텐데 굳이 스물아홉의 시작부터 서른을 준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말을 하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스물아홉의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 말 한 마디 더 하기도 귀찮은 사람.
올해 말부터 내년 초까지 가장 많이 듣게 될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서른 되니까 기분이 어때?"
"니가 벌써 서른이야?"
아니 이미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나.. 혹시 미래에서 기억을 잃고 과거로 돌아온 걸까?
친구들은 벌써부터 서른이 되기를 걱정하는데 나는 사실 하루 빨리 서른이 되고 싶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믿지 않지만 <멜로가 체질> 속 진주의 입봉작 제목만큼은 믿기 때문이다.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이 말은 이십 대 후반을 살고 있는 나의 유일한 믿을 구석이다. 스물아홉의 나는 어쩐지 엉망이고 진창이라서. 일도, 사랑도, 우정도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마법의 주문을 외는 것처럼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하다가 나중에는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서른 되면 괜찮아지는 것 맞죠? 안 괜찮아지면 안 되는데 하면서 어서 그렇다고 해달라고 진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기분.
스물아홉의 나는 하나도 안 괜찮고, 아직 인생에 대해 잘 모르겠고, 크게 이룬 것도 없고, 일도, 사랑도, 우정도 잘 못 해내고 있다. 학생이니까 공부했고, 대학생이니까 취준했고, 직장인이니까 일하고 있는데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몰라도 문제, 알아도 문제다. 어른의 삶이란 열심히 한다고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니까.
일을 하고는 있는데 하기 싫고. 이걸 평생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더 싫고. 남들은 좋은 사람 잘만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는데 나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너무 어렵고. 연애도 못 하고 있으면서 결혼이 하고 싶으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고. 오랜 친구들과 멀어지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고.
게임이면 이미 포기하고 떡볶이나 시켜 먹었을 텐데 태어나 보니 인생이라서, 태어난 세상이 백 세 시대라서, 별일 없으면 칠십 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그 칠십 년이 생각만 해도 아득하고 힘들다. 힘들어요. 힘들어.
사실 서른의 나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인생에 대해 잘 모를 것이고, 달리 이룬 것도 없을 것이고, 일도, 사랑도, 우정도 잘 못 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른의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잘 모르는 나라도, 이룬 게 없는 나라도, 잘 못 해내고 있는 나라도 괜찮다고.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나 자신이니까. 지금보다는 나에게 조금 더 관대한 내가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힘들어 하는 동생들에게 웃으며 말해줄 수 있기를.
"걱정하지 마. 서른 되면 괜찮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