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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에 처음으로 달렸던 날

2.5km 달린 대 서사시

by 유앤나
5년만에 처음으로
둘레길을 쉬지않고 달렸다


2.5km


이 거리가 뭐라고, 5년이나! 라기에는 그만큼의 의지도 이유도 힘도 없었다.

꼭 달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가능하지만 우선 의지가 없었다. 둘레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사람 구경도 하고, 산책의 기쁨을 누리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유도 없었다. 달려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누가 시키지도 않는걸.

마지막으로는 힘. 그렇다. 힘. 좀 달려볼까, 러닝을 시작해보고는 싶은데... 싶다가도 1km 남짓 뛰고는 앞에 나란히 걷는 사람에 막혀서, 어라 저건 뭐지? 눈으로 구경거리를 좇으며, 아이고 그냥 걸을까, 온갖 이유로 멈춰서곤 했다.


늘 달리고는 싶었다. 한번쯤.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웠다.


난 잘 못 뛰니까. 늘 달리기를 꼴등했으니까. 폼도 이상하니까. 힘도 드니까. 난 못 할 테니까. 한다고 해도 느려지고 초라해지면서 이상해질거야. 모든게 다 이상해질거야. 남 보기에도, 나 스스로도.


달려보고 싶은데, 에서 달리고 싶어, 에서 달리기 까지 걸린 시간. 5년. 이렇게 보면 너무 긴 시간 이지만 한 편 좋은 점들이라면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장면을 상상했다는거다. 달리는 모습을.


만약 달리면, 달려질까?

상상하며 잘 뛰는 내 모습을 떠올했다. 어느새 능숙히 달리는 걸음, 단단히 흔드는 팔,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 비가 오면 어떠려나, 너무 더우면, 시원한 반바지도 좋아보여. 대개는 좋은 모습들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안 좋은 모습 -달리다 멈추는 모습, 우스꽝스러운 자세, 느려지는 걸음은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뭐 에서 끝났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상상속에서조차 어떤 사고도, 위험도. 그러니 재미도 없었다. 그러니 상상도 멈춰질 수 밖에.

대신 더 잘 뛰는 모습, 어느새 보기좋게 탄 모습, 의욕이 샘솟는 기분, 즐거워진 마음, 같이 뛸래? 친구에게 전화하는 장면, 운동화 끈을 꽉 묶고 나서는 모습, 모든게 좋아지는 모습은 상상의 상상으로 이어졌다. 더 재밌게. 그리고 오늘.


5월 10일. 역시나 더부룩학 피곤하게 깨났다.

어제 늦게까지 먹은 아이스크림과 과자때문이기도 하고, 불을 켜두고 잔 피곤함때문이기도 하고, 여러 생각으로 푹 잠들지 못한 심란함때문이기도 했다. 예보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쩐 일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 낫다는 생각도 했다.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뛰기엔 좋겠어. 정말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산없이 나서는 것도 괜찮았다. 금방 뛰고 올거니까. 괜찮아. 그 동안 몇 번 비오는 날 걸은 것도 경험이 됐다. 사실 비오는 날 우산을 써야만 하는건 아니다. 그 당연한 걸 잊는다. 마치 써야하는 것 처럼. 꼭 정해진 것처럼. 비는 나름 맞을만하고, 상쾌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정말로 그렇다.


둘레길 초입으로 걸어가며 뛸 수 있을까. 계속 걱정은 됐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년동안 달리다가 멈춰놓고 오늘은 왜, 싶었지만 알았다. 사실 그 동안 멈출만큼 힘들었던 적은 없다. 그러니까 멈출 이유마다 멈췄던 걸 알아서. 오늘은 멈추지 않을거라서, 멈추지 않을거다.


시작점에 도착. 두근거렸다. 이제 뛰면 한 바퀴를 다 돌 때 까지 안 멈출거야.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달려. 이제 뛰면, 안 멈출거야. 누가 보면 엄청난 속도일줄 알겠지만 -정말 달리기에 젬병일수록 뛰는 것에 대한 이토록 부담을 느끼는 거다- 내 목표는 하나. 걷지만 말자. 걷는 속도, 걷는 모양새일지라도 멈추지는 말자. 제자리 뛰기여도 좋으니까.


그렇게 이제 뛰면 한 바퀴야. 그리고 절대 빠르게 달리지 마. 달리는게 아니야. 멈추지 않는거야. 멈추지만 않는거야. 마지막까지 되새기고, 달렸다.


달렸다!


비가 내리고 우산을 쓰며 걷는 관광객들 사이를 달렸다. 빗소리, 챙모자에 토톡 떨어지는 물방울, 서툴고 묵직한 걸음, 탁탁 어색하게 딛는 마찰음, 색색깔의 우산을 지나치는 바람, 신났다.

이백미터쯤 달렸을까, 조금 숨이 차길래 되새겼다. 아니 달리지 말라니까. 잊지마. 달리는게 아니야. 빠르게도 아니야. 멈추지만 않는거야. 걷는 속도여도 되. 걷지만 말자.

그렇게 몇 번. 그리고 멈춰설 뻔한 것도 몇 번. 나란한 우산에 남은 도보 틈이 좁아서, 웅덩이가 보여서,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관광지 입구에 늘어진 줄을 보니 그 장관을 사진찍고 싶어서(너 갈길이나 가), 비가 조금씩 더 오는것 같아 멈춰서 하늘을 확인하고 싶어서(그냥 가), 메시지 온거 없나(당연히 없다. 뛴 지 10분만에 무슨 카카오톡이 오겠는가), 엄마는 뭐하지 전화해볼까(끝나고 해), 이렇게 달리기를 15분쯤. 둘레길의 2/3를 달렸을 때의 쾌감이란!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멈추지 않겠구나. 달리기 시작한 그곳에 뛰어서 도착하겠구나. 그리고 예상처럼 알았다. 멈춰야 할 이유가 수백가지면, 뛸 수 있는 이유도 수백가지다. 언제나 달릴 공간은 있고, 비켜서고 돌아갈 길은 있다. 힘이 들면 쉬면서 달리면 되고, 심지어 걷는 것 보다 느리게 달려도 된다. 정말로.

그렇게 마지막 한 사분면을 남겼을 때는 웃음마저 나왔는데, 왜 오늘이었을까 싶었다. 사실 알았는데. 왜 5년이나 걸렸을까. 글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던거다. 하면 할 수 있다는걸 아는게. 더 솔직해지자면, 그렇게 하고 싶은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난 못하는 게 더 어울려서. 내가 내 기대와 상상을 깨는게 싫어서. 정말 아이러니하게, 난 달리기는 젬병이라는 내 판단을 벗어나기 싫어서. 내가 달릴 수 있다는걸 알게되면, 내가 재편되며 너무 많은게 달라질까봐.


도착점에 닿는 모습은 어떨까. 기분은 어떨까. 그 순간이 기대되며 점점 신났는데 끝 모습은 -우습게도- 불켜진 신호등에 그런 감흥을 느낄 여력도 없이 와다다 달려서 지나쳐버렸다. 그리고 또 웃겼고. 그래, 경복궁 한바퀴 달리고는 무슨 감격이야! 이제 비 그만맞고 집에나 가자!


달렸다. 잘 끝났다. 사실 끝나고는 의외로 몸이 너무 뜨거워지고 숨이 차서 (네, 평소에 절대 안뜁니다) 어라, 싶을만큼 약간 어지럽기도 했는데 또 불켜진 횡단보도를 보고 뛰다보니 정신이 들었다. 역시 뛰면 뛰어지고, 살면 살아진다.


뛸거야, 대신 멈추지만 말자는 생각으로 달렸던 날.

걷는 것 보다 느려도 좋아, 그래도 달려보자는 결심으로 해냈던 날.


오늘 알게된 것.

뛰면 풍경이 안보여. 난 역시 걷는게 좋아-라며 찬찬히 보았던 풍경은 오늘도 잘, 보였다. 느리게 뛰었으니까. 게다가 뛰어야 보이는 풍경까지도.

난 진짜 못 뛰는데. 기준이 속도가 아니라면 잘 뛴다. 앞으로도 내 기준은 엄격할 예정이다. 속도보다 엄격한 내 기준으로 달릴거다.

언젠가 한바퀴를 온전히 뛸까? 기분은 어떨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좋다. 정말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많고, 쉽다. 찾으면 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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