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무수한 부분은 서로를 구했다.
누군가는 자서전을 쓸 때 '사람'으로 카테고리를 분류한단다. 그에게 시간보다는 사람, 특히 몇 명의 사람에 대해 쓰면 그게 곧 그의 삶이라는 것이다. 어머니, 첫사랑, 스승, 친구. 그들과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보다 더 분명한 좌표가 된다.
다른 누군가는 장소로 자서전을 쓴다. 태어난 집, 처음 혼자 산 원룸, 이별을 고한 카페, 새벽에 걸었던 강변. 장소는 시간을 담는 그릇이 되고, 그곳에 서면 서사가 연결된다.
또 어떤 이는 실패로 삶을 기록한다. 떨어진 시험, 끝난 사업, 헤어진 사람, 포기한 꿈. 아픈 선택들이 그린 지도가 오히려 더 정직한 자화상이 되기도 한다.
당신에게는 무엇인가. 사람인가, 몇 마디 말인가. 실패였나, 버렸던 습관이었나. 멈췄던, 돌아갔던 길들이었나.
자서전의 의미를 묻는다. 그것은 회고가 아니다. 창조다.
자서전이라고 하면 대개 한 권의 책을 떠올린다.
목차가 분명하고, 태어난 시간과 연대기가 정돈된 책. 표지가 있고, 챕터가 나뉘고, 결말이 있는 완결된 이야기. 하지만 완성된 자서전은 없다. 아니,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
삶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서전이 끝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종종 삶을 잘 편집하려 한다. 의미 있는 부분만 남기고, 부끄러운 부분은 지우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건너뛴다. 그렇게 만든 자서전은 깔끔하지만, 정작 나는 희미해진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글쓰기"를 '자기 배려(care of the self)'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였다. 푸코가 강조한 것은 이것이다. 자서전은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발견하는 도구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리된 과거가 아니라, 넘겨진 페이지, 그어버린 내용, 찢겨나간 부분인지도 모른다. 잘 편집한 내용이 아니라, 편집하기 위해 잘라낸 것들.
찢겨진 페이지는 그것을 인정한다. 나는 아직 모르고, 사실 우연히 이뤄낸 거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고, 이 부분은 잊어버리고 싶고, 여긴 회피하고 싶고, 이 불완전한 서사는 정직하다. 진심은 이해받는다. 나에게. 그러면 덜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을 인정하면 조금은 측은해지고 어쩌면 이해하게 되듯이.
그러니 가장 작은 것, 버린 것, 지워둔 것을 써보면 어떨까. 완전한 자서전을 쓸 자신은 없지만, 찢어도 좋은 한 장을 쓸 자신은 있으니까. 한 페이지만 써도 좋고 중간에 멈춰도 좋다. 논리가 없어도, 맞춤법이 틀려도, 빈칸이 있어도, 심지어 나중에 찢어버려도 괜찮다. 정말이지 상관없을 테니까.
내가 버린 열 개의 물건. 왜 버렸는가. 무엇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는가.
멈춘 지점들. 왜 거기서 멈췄는가. 무엇이 나를 주저하게 했는가.
그리워하는 다섯 사람. 왜 그들인가. 그들과의 시간이 내게 무엇이었는가.
한 번 먹고 안 먹은 것. 왜 다시는 먹지 않았는가. 그 맛이 싫었던 건가, 그 순간이 싫었던 건가.
다신 안 간 곳. 왜 돌아가지 않았는가. 누가 있는가. 또는 없기 때문인가.
그러나 굳이 찢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게 얼마나 덧없는지 알게 된다면
성공을 위해 이른 실패와 실패에 이른 성공과
분명 좋았던 기억과 분명 아팠던 일들이
한 장의 앞뒷면에 같이 적힌다면,
그래서 같이 찢기고 같이 남겨질 수밖에 없다면
이 찌질함과 가끔 위대함이 얼마나 같은지 알게 된다면
그때 내가 보지 못한 것, 지금은 봐줄 수 있는 것.
내 곁에 분명히 있었던 고마움. 배겨, 양보, 희생.
그때 내가 알아주지 못한 것.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날의 환경, 한계, 그리고 애씀도.
내 삶의 무수한 부분은 서로를 구해왔다.
어떤 날의 나는 다른 날의 나를 위해 버텼고, 어떤 순간의 나는 다른 순간의 나를 위해 포기했고, 어떤 선택의 나는 다른 선택의 나를 위해 희생했다. 나의 어떤 모습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위해 숨죽였다. 대신 나섰다. 지켰다. 위했다. 그 찢긴 모습들, 봐주지 못한 모습들을 적는다면. 찢긴 페이지를 덕지덕지 붙여낸다면.
버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알게 된다면,
하나라도 더 - 알아간다면
그게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 한 장씩 써보면 어떨까.
그저 쉽게, 아주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