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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

by 유앤나

Korea IT Times에 연재를 시작한 칼럼입니다.

최신 기술의 중심에서, 잠시 ‘끄는 법’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단지 멈춤이 아니라, 놓쳐왔던 감각, 리듬, 생각,

그리고 나라는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작은 실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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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동안
비로소 멈춘다.
걷기는 발의 리듬이 아니라,
뇌의 호흡이다


1987년, 심리학자 프란신 샤피로는 공원을 걷다 우연한 발견을 했다. 좌우로 움직이는 시선이 불안한 생각을 잠재우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의 관찰은 훗날 트라우마 치료법인 EMDR로 발전했다.


2014년, 스탠퍼드 대학 연구팀은 176명을 대상으로 앉은 상태와 걷는 상태에서의 창의성을 비교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걷는 동안 창의성이 평균 60% 증가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내든 실외든, 트레드밀이든 공원이든, 공간이 아니라 걸음 그 자체가 뇌를 바꾸었다.



산책 할 때,


먼저, 감각을 열어둔다. 이어폰을 빼면 들을 수 있는 것은 거리의 소리만이 아니다. 나의 발걸음, 숨소리, 옷자락이 스치는 모든 나의 행동이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몸이 천천히 흔들리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대부분의 통찰은 ‘억지로 붙잡으려 할 때’가 아니라 ‘가만히 걷고 있을 때’ 다가온다.


산책 갈 때,


월요일: 15분, 같은 길. 집 근처를 돈다. 이어폰 없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발이 땅에 닿는 감각만 느낀다.


수요일: 20분, 다른 길. 가본 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지도를 보지 않는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 산책은 원래 길을 잃는 그리고 찾는 연습이다.


금요일: 30분, 질문과 함께. 한 가지 질문을 품고 걷는다.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본다. 걷기를 마친 후, 질문이 달라져 있을지도.


일요일: 시간 정하지 않고. 언제 돌아올지 정하지 않는다. 몸이 "이제 돌아가자"고 말할 때까지 걷는다. 즐기자. 경험을 누리자.



그리고 마지막 실천은 오늘의 산책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걸음 수를 세지 않는다. (세면 욕심난다. 혹은 평가한다) 칼로리를 재지 않는다.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산책은 데이터가 아니다. 숫자가 아닌, 감각으로 그리고 성취가 아닌, 존재로 산책을 해보자.


산책을 사치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생산하지 않는 시간.

뭐가 남지 않는 시간.

목표도 평가도 없는 과정.

하지만 바로 그 사치 속에서, 우리는 회복해간다.

세상을 통과하는 방식이면서도 세상에 짓눌리지 않는 드문 방식으로.



"자연과 함께 걷는 모든 순간, 우리는 찾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는다." 존 뮤어 (John Mu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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