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실수노트

할머니가 들려주는 동화, 네가 찾고 난 세고.

by 유앤나


할머니는 동네 산책로를 늘 같은 속도로 걷는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굳이 이름 붙이자면 할머니의 속도다.


아침마다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어폰을 꽂고 쌩쌩 지나간다.


숨이 일정한 리듬으로 들리고,

발걸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하다.


그 사이에서 할머니는

손을 뒤로 깍지 끼고,

길을 조금 넓게 쓰며 걷는다.


손자는 그런 할머니 옆에서

몇 번이나 앞서갔다가 돌아온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묻는다.

“할머니, 왜 이렇게 천천히 걸어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길가를 가리킨다.

“저기를 좀 보렴.”


손자는 처음엔 잘 보지 못한다.

그저 평범한 길가 풀숲처럼 보인다.


할머니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쪼그려 앉는다.


“나는 말이야, 꽃을 세며 걷는단다.”

“오늘은 벌써 열두 송이나 발견했어.”


노란 민들레,

보라색 제비꽃,

하얀 토끼풀.

그리고 이름 모를 아주 작은 꽃 하나.


손자는 그제야 고개를 숙인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아까 조깅하던 사람들의 발밑을

이런 것들이 조용히 지나갔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해진다.


“열두 개면 많은 거예요?”

손자가 묻는다.

할머니는 웃는다.

“많고 적은 건 중요하지 않지.”

“어제 봤던걸 또 찾아내거나, 어제 못본걸 새롭게 보면

그게 오늘의 수확이란다.”

그날 산책은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실험 가설:

뒤처진다는 느낌은, 어쩌면 비교에서만 생기는 착각일 수 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손자는

일기장을 펼치고 그림을 그렸다.

꽃 한송이.. 두송이..

별모양 돌맹이...

갈색 잎사귀...


할머니는 마음속에 적었다.

관찰 결과:

느린 걸음은 어딘가에 도착해 있음을 알아차리는 방식이다.


바위 밑에 빼꼼 보였던 풀잎을 색칠하며 손자는 말했다.

“내일은 내가 꽃을 먼저 찾을래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네가 찾은 꽃을 세어볼게.”




내가 빨리 지나쳐온 것 중,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느리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탓하던 순간은 언제였나?

오늘 하루를 ‘속도’가 아니라 ‘발견한 것’으로 남긴다면 무얼 적어볼까?







할머니의 서랍에는 색색의 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라벤더색, 하늘색, 금색, 연두색, 분홍색...


"할머니, 이 펜들은 뭐예요?"

손녀가 물었을 때, 할머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름을 바꿔주는 펜이란다."

"이름을요?"

"그래. 세상이 붙인 이름 말고, 내가 붙여주고 싶은 이름으로."


할머니는 낡은 노트를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빨간 펜으로 쓴 글자 위에 다른 색깔 펜으로 고쳐 쓴 글자들이 겹쳐져 있었다.

"네가 실수라고 생각하는 걸 가져오렴. 같이 이름을 찾아보자꾸나."








손녀가 첫 번째 종이를 내밀었을 때,

할머니는 정원에서 민트를 따고 있었다.


집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엄마를 걱정시킴


할머니는 흙 묻은 손을 닦고, 하늘색 펜을 꺼냈다.


"얼마나 늦었니?" 할머니가 물었다.

"30분 이요. 엄마가 걱정하셨어요..."

손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디서 무엇을 했길래?"

"그게..." 손녀가 머뭇거렸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데, 평소랑 다른 길로 걸었어요. 그냥... 궁금했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에서 뭘 봤니?"


손녀는 잠시 생각했다.

"작은 서점이 있었어요. 고양이가 창가에서 자고 있었고요.

그리고 낡은 벽에 담쟁이가 가득한 집도 있었어요. 금목서 냄새도 났고..."


할머니가 웃었다.

"네가 원래 길로 왔다면, 그 모든 걸 만나지 못했을 거야.

집에 도착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단다.

빠른 길, 익숙한 길, 그리고 더 긴 여정."


할머니는 따온 민트를 손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더 긴 여정은 더 많은 것을 품고 온단다.

그게 한 시간이든, 한 달이든, 한 인생이든."


손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엄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해요?"

할머니는 손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짜를 말하면 돼. '엄마, 나는 더 긴 여정을 택했어요.

그래서 이걸 발견했어요'라고. 그리고 네가 본 것들을 들려주렴.

걱정은 설명으로 풀어지는 법이니까."


할머니는 노트를 펼쳐 말했다.


“다음번엔 이름을 붙여보자.

‘수요일의 여행’처럼 말이야.

그리고 엄마에게도 미리 말해주렴.”


할머니는 파란색 펜으로 제목을 적었다.


긴 여정으로 데려온 친구들


“이어서 써 볼래?”

할머니가 펜을 건네자,

손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만난 풍경들,

이름 모를 꽃,

길가에 머물던 냄새와 빛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손녀는 펜을 잠시 멈추고

민트 향을 깊게 맡으며 생각했다.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걷는다는 건,

늦게 가는 일이 아니라는걸.

보이는 것 하나, 냄새 하나, 마음 하나씩

손을 잡고 함께 가는 방법이라는 걸.





할머니의 실수노트에는 무엇이 적혀있을까?

"실수 덕분에 너를 만났어",

"실수 덕분에 이 집을 샀지",

"실수 덕분에..."

노트를 한장씩 열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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