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아름다운 수도원 도서관을 가다
생 갈 수도원 부속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문은 성당 뒷마당에 있다.
입구에 도착해 문을 당기다 밀다가하며 열지 못하자 커다란 나무 밑에서 쉬고 있던 할아버지가 직접 문을 여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달칵, 문이 열리자 잘 했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주는 그에게 아는 사이인 듯 친구처럼 손인사를 보냈다.
몇십 년 나이차 혹은 떨어진 거리쯤은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그리스어로 영혼의 약국(치유소)라고 쓰여있다.
16만 권의 장서
8~15세기의 필사본 2,100점
1500년 이전에 인쇄된 책의 초기 간행본 1,650점
지금이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이라는 수식어가 붙기에 역사 속에 가치가 더해졌다지만 그 시대에는 시간이 가진 의미가 오늘날만큼 중요했을 리가 없다.
단지 오래된 서적이라서가 아닐 것이다.
그 들을 치유했던 힘은 무엇일까.
천 년이 지난 후 지나가던 한 여행객도 이 곳에서 약을 구할 수 있을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소지품을 모두 보관함에 넣어야 하고, 신발을 감쌀 커다란 헝겊 신발을 신어야 한다.
내 발자국을 남길수 없는 곳.
사진 촬영이 안 되는 곳.
그래서 오직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곳.
신발에 덧댄 헝겊의 감촉은 부드러웠고
발걸음을 따라 나무 바닥은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마음의 약국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
조용히 옮기는 걸음들
경이로운 시선이 향하는
가지런히 정렬이 된 장서들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
어떨까, 그곳은.
여행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도
상트 갈렌 역에 내려서도 상상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서점.
천 년이 넘은 역사가 있는 그곳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들어가자마자 감탄이 나올지도 몰라,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 머물고 싶겠지.
상상 속에서는 도서관이 가장 아름다웠고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볼 수가 없었으니까.
그 들은 알까.
그의 뒷모습에서 위로를 받았고
그가 향하는 시선에서 희망을 얻었음을.
그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이 곳이 아름다운 이유는,
책이 오래 보존되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어서임을
건물 내부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보다
창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지금의 햇살이
책들이 뱉어내는 위엄보다
방문객들의 경건한 태도가
고서들이 담고 있는 지혜보다
배움을 위한 미숙한자의 열정이
이 곳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영혼의 약국
그에게 받은 치유,
나도 조그만 힘이 되었을까.
괜찮아 보이는 당신이 위로가 필요함을 보며
내가 미처 쏟지 못한 관심을 꺼내게 되었고
나보다 훨씬 더 세상을 오래 살아온 당신이 배움을 원하는 모습은
이 도서관에 꽂힌 장서들의 의미 조차 다 모르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으며
책이 가득한 곳 뒤로 텅 빈 의자를 쓰다듬는 손길에
여행이 그렇듯 사랑도 쉴 때가 필요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이와 손을 잡고 같은 책을 바라보는 눈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장소가 천 년이 넘게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음을 돌아보고 내려놓고 다시 얻으며
머물고 스쳐간, 사람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있는 곳.
오늘 묻힌 흔적이 내일의 기억이 될 곳.
아주 없어진대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그런 곳.
생 갈 수도원 도서관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앉아서 무언가를 끄적일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은 공간에서 생의 여러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벅찬, 공간이었다.
천으로 감싼 신발마저도
조심스레 움직이는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뒤로 하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도서관 옆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장소가 있다.
책과 엽서 그리고 펜. 도서관을 추억하기에 더없이 좋은 것 들.
책과 엽서는 그리스어로 쓰여있어 읽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보다
'그'가 하는 말을 사랑하듯
말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순간도 있다.
연필과 엽서를 샀다.
적은 만큼 남겨지고
쓰는 만큼 사라지는, 연필이 이 공간과 어울렸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추억은 멈추었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럼에도 기억은 지속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고 흠집이 날 테며
순서도 바뀔 수 있고 위치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소중함이라는 가치로 언제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불리듯,
사랑 역시,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내가 다시 이 곳에 오지 못한다고 해도
그 날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의 약국이었듯이
내가 다시는 너를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 날 기억이, 내게 마음의 치유소가 될 것이다.
수도원 밖으로 나오니, 아침보다 햇살이 환하다.
오전엔 닫혀있던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조용했던 길에 이야기가 채워지자
과거의 그 어느 곳 인 것 같던 길이
지금 이 순간을 걷는 길이 되었다.
아까 봐 두었던 가장 예뻤던 핑크색 레스토랑.
그리고 따스한 테라스로 가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다.
그곳에는 세 명의 여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잠시 후에는 네 명의 여자들이 웃음을 나누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이 곳에는 누구랑 왔으며,
앞으로 어디를 갈 건지,
여행을 하며 알게 된
'당연하지 않은 관심'에 고마움을 느끼며
한국에서 준비해 간 작은 인형을 건넸다.
매일 듣는 말.
안녕,
밥 먹었어?
요즘은 어때,
내일 보자.
여행을 하며 알게 된 것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날씨
아프지 않은 몸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한 때
머무를 수 있는 여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친구
그리고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하게 존재할때 갖게 되는 감사함.
이 곳을 떠난다.
작은 마을일 줄 알았지만
화려한 도시가 펼쳐졌고
평평할 줄 알았던 길을
오르락내리락 오가며
상트갈렌의 풍경을 담다가
자기도 상트갈렌이라는 청년을 만나
나도 그 순간부터 상트갈렌임을 깨달았다.
천 년의 시간을 담아낸 수도원에서
그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일,
그러나 내 생엔 가장 느린, '순간'을 보내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도서관에서는
지나간 시간, 오래된 기억, 소중한 추억.
그것을 가진 그대들이 더 아름다움을 느꼈다.
상트갈렌에는 생 갈 수도원(The Convent of St Gall)이 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위대한 수도원의 완벽한 모범을 보여 주는 이 곳은 8세기부터 1805년에 세속화될 때까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 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풍부한 장서를 갖춘 도서관이 있다.
그리고 상트갈렌 역에는 커다란 시계가 걸려있고 크고 고풍스러운 문이 있다.
역사 문을 열고 나가면 내 오랜 기억의 한 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그 예전과 지금을 오가다 보면, 깨달을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 당신임을.
상트갈렌 수도원 부속 도서관
1900년 이후의 책은 빌려볼 수 있으며, 필사본 도서도 미리 신청하면 내부에서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
도서관 사진 출처 : 방울소리님 블로그 (승인을 얻은 후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