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Rare Books, Antique Maps and.....
당신이 무얼 가져오든 파리는 대가를 주었다. 아주 가난하면서 아주 행복했던 우리의 젊은 시절에 파리가 해준 게 바로 그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A moveable Feast'
뉴욕의 59번가에는 오래된 서점이 있다. 어떤 곳에서는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서점이라고도 하니 아마도 꽤 오래됐음에는 틀림이 없는 책방이다. 이 곳은 루이스 코헨이라는 당대 도서 수집가가 1920년대에 처음 문을 열었고, 지금은 그의 세 딸이 함께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미국 서적은 물론 전 세계 각지의 고 서적들과 지도, 그리고 프린트와 편지 및 유명인의 사인본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낡은, 보물이 가득한 곳이다. '아거시argosy'는 스페인 범선의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물을 모아 온 말 그대로 '보물섬'이었다. 그래서 서점의 입구에는 나무로 된 오래된 범선이 매달려있다. 전 세계에서 보물을 데려온, 서점.
아거시서점 입구에는 1달러 혹은 3달러짜리 중고책들이 가득 쌓여있다. 그곳에서 한참 동안 책을 뒤적거리며 '와,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정말 많네.'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와아'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오래도록 상상해왔던 '서점'이란 아마 이런 곳 일거라고. 오래된 책들이 정성스럽게 놓여있고, 그보다 더 오래됐음직한 팩들에서 잘라낸 예쁜 프린팅이 전시된, 아마도 백 년도 전의 지도들이 벽에 걸려있으며, 초록색 갓을 쓴 노란 조명 아래 타닥타닥 타자를 치고 있는 직원들. 여기야, 내가 찾던 서점.
'오래된' 책에만 있는 것들이 있다. 지역, 인종, 국가를 너머 몇 번이나 누군가의 손에 닿았을법한. 그 누군가들이 소중하게 펼쳤다가 더 소중한이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던. 서랍 깊숙하게 보관했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한. 어느 연유에서 여기,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책-이랄까.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면 맨 먼저 뒷 장을 펼치곤 했다. 맨 뒷 페이지에는 빌린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꽂혀있었는데, 누가 언제 얼마나 빌려보았는지 적어두는 기록이었다. 그곳에 묻은 흔적을 읽으면, 가슴에 설렜다. '이 사람은 이 날 여기에 왔었구나.' '글씨를 참 잘 쓰는구나.' 가끔 나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만날 땐 신기했다. '어, 이 사람 저번에도 내가 빌리기 바로 직전에 빌렸었는데. 어쩐지 내가 계속 따라서 읽는 것 같잖아?' 그래서 느낌이 비슷한 책 들중에 '그'가 아직 보지 않은 책을 빌려서 내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놓기도 했다. 그 책이 다음번에 그에게 꺼내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Old&Rare.
오래된 드문 것.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것.
어쩌면 처음 보는 책도 반갑게 맞이하고, 누군가 보던 책은 더 따뜻하게 품어줄 곳. 그들이 만들어온 이야기를 좋아할 곳. 그래서 그곳, Argosy에 책 한 권을 들고 갔다.
"당신이- 아거시서점의 주인인가요?"
"맞아요."
날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가져온 책을 건넸다.
"이건- 한국 책이에요."
"어머나."
책을 받아 든 그녀는 조심스레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고은, 이라는 시인의 책이에요. 최근 몇 년간 노벨문학상에 노미네이트가 되기도 했고, 따스한 시로 유명하죠."
"이런 일이. 너무나도 고마워요. 이런 일은 처음 있는데, 놀랍군요."
그녀는 급기야 자매들을 모두 불러, 나를 소개해주면서 "한국에서 온 책이야. 고은이라는 시인이 쓴 책 이래." 하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쩐지 책과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Old 그리고 Rare 한 책들이 가득한 곳에서.
그녀는 위층에 더 다양한 책들이 있으니 구경하지 않겠냐고 했고, 나는 기쁘게 응했다. 아거시 서점은 총 6층 건물이며, 2층에는 큰 지도와 그림들이 있어 들어서자마자 마치 미술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5층은 초판본과 세계의 책 들, 6층에는 친필 사인본이 있다고 한다. 아, 3층과 4층은 책을 보관하는 곳들이라고. 초판본이나 세계의 귀한 책들이 있는 곳은 손님들이 보고 싶어 하면 그때 문을 여는 특별한 장소인셈이다.
그렇게 아거시서점에서는 한참, 오랫동안 머물면서 책을 구경했다. 다른 서점들과는 달리 책을 펼쳐보는 것보다는 책 자체를 구경하고 때로는 지도 앞에 머물고, 그림들을 보며, 혹은 낡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서점 문을 닫는 시간, 떠날 채비를 하는 내게 나오미는 말한다. "또 올 거지?" 난 웃으며 "금요일 밤에 떠나니까, 그전에 꼭 다시 올게요." 대답했다. "꼭, 다시 와야 해!" 어느새 다정한 친구처럼 내 손을 잡는 그녀에게 약속했다. 꼭, 다시 오겠다고.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의 삶에 우연히 끼어들고, 떠나는 시간이 되면 아쉬워하지. -페르난두 페소아, I got off the train
여행의 중간 즈음엔,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편지를 썼다.
한국에 있는 보고 싶은 그들과 뉴욕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에게. 물론 그중엔 아거시서점도 포함되어있었다. 작은 선물을 큰 마음으로 받아준, 한국 책에도 많이 관심을 가지겠다고 약속한, 그리고 날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러다 문득, 내 가방 속에 '여기, 뉴욕'책이 보였고 이 책이 있어야 할 더 좋은 장소 또한 생각났다. 두고 가자 뉴욕에. 내 '여기, 뉴욕'을.
뉴욕의 오래된 서점. 낡은 보물들이 가득한 곳에 내 기억도 두고 가자. 더 이상 난, 이 책 없이 '나의 뉴욕'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
정말 신기하게도,
다시 내게 온 순간.
뉴욕의 공립도서관 1층엔 작은 가게가 있다. 책은 물론 엽서와 필기구, 지도와 수첩 등을 파는 곳이다. 편지를 다 쓴 후 1층으로 내려와 책과 소품을 구경하는데, '어!' 책을 발견했다.
'Here is Newyork.'
뉴욕의 수많은 유명한 혹은 골목의 작은 서점들을 들렸을 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책.
여기, 뉴욕. Here is Newyork.
두고 가겠다고 결심하자, 새롭게 나를 찾아온 책.
그렇게 다가온 책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래, 새롭게 한국으로 갖고 갈 책.
여행의 마지막 날.
"Hello, again!" 반갑게, 익숙하게 나를 맞아주는 그에게 나 역시 손인사를 했다.
또 왔네, 인사가 정겨운 인사를 나중에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역시 날 발견하고 활짝 웃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다렸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편지와 '여기, 뉴욕'을 건넸다.
Oh my god!
너무나도 놀라는 그녀.
"지금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그녀는,
"이 책은 50년도에 나온 이후 지금까지 뉴욕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책이야. 난 이 책이 다른 나라말로 번역된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지. 오, 이 책은 정말 charming 해. charming이라는 뜻을 아니?"
평소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잔뜩 흥분한 채로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도 놀라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지금 뉴욕에서도 굉장히 귀해졌어. 그래서 여기, 뉴욕이 있다고 하면 '오-너 그 책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정도야.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된 [여기, 뉴욕] 이라니. 세상에, 난 이 책을 1층에 두지 않을 거야. 가장 귀중한 손님들만 볼 수 있도록 우리 서점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에 전시할 거란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지만 '다행이다.' 싶었다.
아주 오래된, 이 곳에 한국시집과 여기 뉴욕까지 두고 가니 무엇을 더 바라겠어.
그리고 마음 편히 가족들에게 줄 그림을 골랐다. 오래된 prinnting, 예쁜 그림들을.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줘, 꼭. 네 가족들은 틀림없이 좋은 사람들일 테니까." 나를 꼭 안아주던 나오미.
꼭 다시 오라는, 그녀에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널 믿어, 넌 꼭 다시 올 거야. 너의 말은 틀림없지."라고 말하는 나오미를 보며, 나 역시 듣고 싶다고. "Hello, again." 편안하고 다정한 그 인사를.
나오미! 뉴욕 여행의 마지막 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어요. 기억하죠?
난 뉴욕에 오고 싶었어요. 대체 왜 뉴욕에 가고 싶을까- 이유를 찾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뉴욕에 오고야 말았죠. 그 답을 찾기 위해. 이 곳에 머무는 동안 내가 만난 뉴욕의 모든 것을 좋아했어요. 작은 길거리, 어느 골목의 서점, 누구나 사랑하는 공원과 미술관, 그리고 이렇게 더운 날씨마저도.
나는 이곳 아거시서점도 꼭 오고 싶었죠. 그리고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 '우리'가 서로에게 기억을 선물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참, 뉴욕에 올 때 '여기, 뉴욕'을 가져왔어요. 60여 년 전의 뉴욕 그리고 지금의 뉴욕을 오가며 함께 만나고 싶었어요. 과거인 듯, 현재와 기억인 듯 현실로 이어지는 페이지를 드나들고 싶었죠. 그리고 내 뉴욕 여행의 마지막 날 '여기, 뉴욕'을 아거시서점에 두고 가려고 해요. 나는 이제 '여기, 뉴욕' 없이도 나만의 뉴욕을 기억할 수 있고, 이 책은 이곳 '여기, 아거시' 서점에서 더 빛이 날 테니까요. (아마도, 기억나는 부분 letter)
나오미는 편지를 거듭 읽었다. 한번 읽고, 다시 또 읽고.
처음엔 함박미소를 짓다가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내 표정도 그녀와 같아졌다.
그곳도, 나도 옛날의 무언가를 그리워했고 작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작은 책이 우리에겐 특별했고, 잊지 못할 과거가 될 이 순간이 벌써부터 그리운 것임을- 알고 있기에.
오래된 추억과
누군가 두고 간 기억을 보관하는
아거시서점Argosy.
나의, 뉴욕을 두고 왔다.
뉴욕의 오래된 서점에는
특별한 손님-아마도 그들처럼 기억을 사랑할-을 기다리는 전시관에,
'여기, 뉴욕' 한국어판이 있다.
Old&Rare Bookstore
낡은 보물이 묻힌 곳, 아거시서점 어딘가에.
*여기, 뉴욕)
『샬롯의 거미줄』의 작가로 유명한 E. B. 화이트는 1948년 여름, 푹푹 찌는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뉴욕의 한 호텔 방에 앉아 『여기, 뉴욕』을 썼다. 작가의 통찰력 있고 재미있는, 그리고 향수 어린 이 맨해튼 산책 ― 독자와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 ― 은 미국 문단의 거목이 쓴 뉴욕에 바치는 연서(戀書)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E. B. 화이트가 이 글을 쓴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복구기였다. 특별한 경멸의 뜻 없이 ‘니그로’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던, 남부에서는 아직도 합법적으로 흑인 차별 및 분리 정책을 시행하던 당시의 뉴욕 풍경을 담은 글이다. 뉴욕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세련된 문장으로 아직도 뉴요커들이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꼽히고 있다.
*아거시서점)
주소: 116 E 59th St, New York, NY 10022
연락처: +1 212-753-4455
영업시간: 오전 10:00~오후 6:00 (토요일은 5시까지이고, 일요일은 쉽니다)
tip: 1층을 구경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도 둘러보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오래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