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기억할수 있는건, 네가 있었기 때문에.
Take it!
'이상한 사람인가 봐.' 지나치는데 그는 다시 말한다. "Take it!" 지나쳤을 법도 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그를 다 보았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판단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3초라고 했던가. 목소리나 억양 그리고 표정과 옷차림까지. 장난을 거는 게 아니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아니 순간.
그래도 경계를 완전히 풀지는 않은 채 그를 향해 물었다.
"Why?"
"너한테 아이스크림을 주고 싶어서."
"(아 그러니까) 왜 주는데?"
"너 아이스크림 먹고 싶잖아. 먹어, 내가 사줄게. 여긴 뉴욕이니까."
여기는 뉴욕의 밤, 브로드웨이 거리.
길을 거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게다가 여름밤, 아이스크림같이 달콤한.
"그래, 줘!"라고 말하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고, 자기 몫을 다시 주문한다. 받아 들긴 했지만 차마 먹지는 못하고 그의 뒷모습만 쳐다보며 어정쩡하게 서있는데,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한다.
"Try!"
짧은 그 순간, 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믿어도 되나, 내가 이걸 왜 받았지. 저 아이스크림 주인과 한 패 아니야? 이거 먹으면 쓰러지는 거 아닌가. "Try-!" 먹는 시늉까지 하는 그의 재촉에, '에라!' 아이스크림을 앙 베어 물었다. 그제야 그가 웃고 우리를 지켜보던 아이스크림을 파는 청년도 웃는다. "맛있지?" 그는 물었고 나는 같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다시 주문한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그. 우리는 더 이야기를 할 듯 말 듯 순간의 어색한 기류를 보내고 인사를 나눴다. "잘 가. 좋은 여행 해." "고마워, 안녕."
'우리 자신이 그 장소 안에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그 장소도 우리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래드보통 Alain de Botton
"어, 어!"
"와우- 아이스크림!"
뉴욕 한복판에서 내가 '어!'를 외칠 확률,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줄 확률,
그리고 그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 얼마나 될까.
뉴욕 한복판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반갑게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싱긋 웃으며 묻는다. "그날 아이스크림은 잘 먹었어?" "응!" "맛있었지?" "응!" 끄덕이며 그에게 물었다. 근데 그 날 왜 사준 거냐고.
"네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거든. 그냥, 네 눈빛이."
"그게 이유야?"
"응. 난 좋은 일을 하면 돌고 돌아 나에게 온다고 생각해. 그 일은 꼭 너에게 되돌려 받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너를 통해 돌고 돌아 -그는 '돌고 돌아'를 말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또 허공을 가리켰다- 나에게 온다는 거지. 이해가 되니?"
"응."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의 '돌고 돌아'라는 말에 아주 멀리까지, 다녀온 듯했다. 그가 내게 건넨 작은 즐거움으로 내가 지었을 미소와 내가 아이스크림을 쥐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사진을 찍었을 때 "와, 쟤봐. 하하 빌딩처럼 아이스크림 사진을 찍는 거." 하던 외국인 커플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기운들이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랄까. 돌고, 돌아 지금, 여기 우리 앞에.
"What is your name?"
먼저 물었다. 그의 이름은 Bahi란다. 록펠러센터에 있는 금융회사에서 근무 중이라고 한다. 내가 혼자 여행 중이라고 하자 그는 이 시간이 나에게 더없이 좋은 시간이 될 것이란다. 그러더니 내 전공과 하는 일을 묻는다. 처음이었다. 그런 것을 묻는 사람은. 경영학과를 전공했고, 홍보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냐고 물었다. 내가 하는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그는 "Finance를 배웠어?" 란다. 경영학과에 필수적인 기초과목으로 포함되어 있기에 배웠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주 전공은 그쪽보다는 다른 과정이라고도. 그러자 그는 "오, 넌 파이낸스를 보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라며 기업에서 일을 할 때 자금과 회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엄청나게 강조를 했다. -절대 한 귀로 흘린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잔) 소리를 했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중요한 것은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쪽은 재미가 별로 없는걸."이라는 말과 함께 엄청난 부연 설명을 들어야 했는데, 뉴욕 한복판에서 재무 공부를 하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조차 못 하였기에, 그의 열성적인 말에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어쩐지 혼나는 느낌이 든 건 내 착각이었을까.
"*Cuny라고 알고 있어? 뉴욕에서 회계분야로 유명한 대학인데, 아시아 학생들도 굉장히 많아. 네가 관심 있다면 교육과정을 추천해 줄 수도 있어."
"큐.. 큐니?"라고 되묻자 "C.U.N.Y 큐우니" 하며 한참 동안 설명을 이어갔던 그.
"Where is your favorite place in Newyork?"
재무와 회계에 대한 심층(일방적인) 대화가 끝난 후, 그에게 물었다. 그가 뉴욕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나의 이번 여행의 keyword. '어디를 가장 좋아하는지.' 물으면 간단하게는 뉴욕의 가장 인기 있는 장소부터 그의 취미나 목표, 나아가 그가 소망하는 꿈의 작은 조각과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All of them." 뉴욕 전부. 이런 대답 역시도, 처음이었다.
"All?" "Yes, all."
그는 뉴욕이 모든 곳이 좋다고 했다.
어디에나 좋은 이유가 있지.
그래서 난, 뉴욕의 모든 곳을 좋아하고
실제로 어디에 있다고 해도 좋아할 거야, 그곳을.
어디에나, 어느 순간이나, 좋은 이유는 있다고 말하는 그.
나중에 Cuny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같이 끄덕였다. 마지막, 인사 전에. 그리고 이제는 다가온 우연에게 인사를 할 시간.
"기억할 거야."
"뭐를?"
"아이스크림 사줬던 거."
내가 허허- 웃자 그도 웃는다. 분명히 내 이름을 말해줬는데도 날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르겠다는 그.
"그래, 다음에 보게 되면 내가 꼭 아이스크림을 사줄게!"라고 말을 했다.
"Good, Bye icecream!"
"아오!"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뒤를 돌아서며 상상했다.
그러니까 돌고, 돌고 돌아서 언젠가 어느 길거리에서 누가 "어이! 아이스크림!" 하고 외치는 순간을.
뉴욕의 모든 곳에서,
내가 걷는 거리에
세상의 모든 장소에
행복해질 이유가 있음을 알려준 그.
그리고 돌고 돌아, 언젠가
낯선 거리에서 짓궂지만 유쾌한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를.
상상하며 다시, 뉴욕의 밤을 걸어갔다.
*Cuny :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Baruch Commege라는 학교는 약 20여 개의 캠퍼스로 구성된 CUNY(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학교 중에서 비즈니스를 가르치는 곳이다. 미국 학교 중에서 학비가 무척 저렴한 편은 반면 교육의 수준이 좋아 한인교포나 유학생들도 많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학교는 뉴욕에서는 NYU 만큼이나 회계학으로 유명한데, 대학교재를 집필하는 저명한 교수진이 많이 있고 AICPA합격률도 매년 3, 4위권 안에 든다고 한다.
뉴욕에서 엽서가 왔다.
9 월 2일에 보냈으니 거의 열흘이 걸린 셈이다. 어쩌면 오지 못했을, 엽서.
엽서를 샀던 브로드웨이 소품 가게
엽서를 썼던 뉴욕 공립도서관
엽서를 보낸 타임스퀘어점 우체국
그리고, '그' 가 떠올랐다.
밤에 문이 닫혀있어, 아침에 다시 찾은 뉴욕우체국 타임스퀘어점은 아침 일찍인데도 몇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은 의외로 나뿐이었다. 무인 우체통에서 차례로 우표 구매 버튼을 눌렀고, 국제 우표 8장을 결제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표를 기다리는데, 왠지 나오지가 않는다.
'왜 안 나오지?' 쪼그리고 앉아 기계를 보았다가 다시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슨 문제 있니?"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온다. "네. 내 우표가 안 나와요." 그는 화면을 보고 이미 결재 완료된 상황을 확인하며, 우표 나오는 창구에 손을 넣어 더듬더듬 찾더니 기계 뒤 쪽에 있던 비상 호출벨을 누른다. "직원이 나올 거야." 염려하지 말라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죠?" 유리 벽안으로 빼꼼 직원의 모습이 보였고,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나 설명을 들은 직원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기다려요. 가끔 우표가 늦게 나오기도 하니까." 란다. 순간 황당한 그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있는데 우표가 나오지 않는다구요." 그러자 직원은 다소 짜증스러운 말투로 "기다리라고요. 기계가 작동이 느려서 그럴 때가 있으니까. 아니, 이봐요. 그렇게 급하면 뒤 쪽에 있는 다른 우편기계를 이용해요." 그러자 그 역시 화가 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난 이 아가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서 10분 이상을 기다렸고 이 아가씨는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렸어요." 그때였다. 뒤 쪽 기계를 이용하던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한다. "여기, 이 기계를 써요 아저씨. 이 기계는 잘 되니까." 확, 몸을 돌리는 그.
"아니요. 난 이 아가씨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볼일은 다 봤고, 이 아가씨의 국제 우편이 나오지 않고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거라고요." 직원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하길 원하냐고 했고, 그는 "우표를 대신 발급해주지 않을 거면, 환불을 해줘요. 그렇게라도 이 아가씨에게 해줘야 해요."라고 말을 했다. 그제야 유리 문밖으로 나오는 직원. 기계를 점검하더니, 웬 걸. 기계가 작동이 멈춰 막혀있었단다. 그리고 기계 중간에 걸려있던 우표를 주면서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더니 이내 어느 사과 없이 다시 직원 문으로 들어가고 만다.
손에 쥔 우표 8장을 보니 마음이 먹먹했다.
우체국 직원과 다른 사람들이 "이봐요, 다른 기계를 써요."라고 말했던 소리가 생각났다.
'이봐, 내버려둬. 그녀의 일이야. 귀찮은 데서 빠져나와.' 들리지 않은 목소리도 함께.
그리고 "아니, 난 그녀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라는 생생한 목소리가 곧 그 모든 것들을 덮었다.
우표를 한 장씩, 엽서에 붙이고 꼭꼭 눌러 덮었다.
보내는 우편함에 가니 엽서를 넣는 곳은 두 곳.
잠깐 머뭇거리면서 살펴보고 있는데,
"자, 나는 국내니까 여기. 너는 국제니까 여기." 자신의 편지를 넣으며 자연스레 알려주는 그. 자기 볼 일은 다 끝났다고 하더니, 아직 편지를 보내기 전이었구나. 내 일이 해결이 되고 나서야 편지를 보내는 거였어.
마지막 엽서를 보내고, 가방에서 작은 책갈피를 꺼냈다.
"이거, 작지만 선물이에요."
"오, 아니야. 괜찮아." 사양하는 그에게 말했다.
"아뇨, 정말 작은 거예요. 책갈피일 뿐인걸요. 한국 기념품이에요. 받아도 괜찮아요."
그는 "오..." 하더니 그제야 받아 든다. "정말 예쁘다, 고마워."
그가 아니었다면 우표를 찾을 수도 엽서를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날은 내 뉴욕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었으니까.
나중으로 미룰 수 없었던 날.
끝내, 내 여행을 고마운 일 투성이로 만들어준,
마침내, 내 사람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준,
마지막까지, 뉴욕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뉴욕의 우체국 타임스퀘어점, 그의 목소리가 담긴 엽서를 간직하다.
"자, 너는 그쪽을 잡아. 난 당길게!"
가방지퍼에 꽉 껴버린 스카프. 아무리 잡아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점원에게 가위를 빌리는데, "자르려고? 오, 세상에. 이 예쁜 스카프를. 내가 해볼게!" 하며 선뜻 내게 와준 그녀.
"아냐, 아무리 해도 안돼. 자르는 게 나아."라고 설명해도 그녀는 "포기하기에 네 스카프는 너무 예쁜걸." 이란다.
평일 점심시간.
소호에서 가장 긴 줄을 가진 Chop't 샐러드 전문점. 내가 뉴욕에 머무는 동안, 가장 기다란 줄을 본 곳.
그녀가 아무리 잡아당겨도 스카프는 지퍼에 꽉 걸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으, 그만해. 다칠 거 같아." 내가 말려도 조금만 더 해본단다. "오, 안녕- 오랜만이야." "저 쪽 줄로 가세요." 쉴 새 없이 긴 줄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계속해서 내 가방에 걸린 스카프를 빼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 결국 다른 직원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한다. 줄은 차고 넘치는데, 전체 매니저를 맡고 있는 그녀와 배달직원 한 명이 붙어 가방에 낀 스카프를 빼내는 광경이라니. 미안하고 고맙고, 고맙고 미안해서 "그만해, 제발. 다칠 거 같아. 이 스카프는 진짜 잘라도 돼."라는 말만 해줄 수밖에.
결국에는 스카프를 잘라내야 했지만.
가위로 자르고도, 지퍼에 끼어있던 작은 천조각을 하나하나 끝까지 다 빼내 준 배달직원.
그리고 "오,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이렇게 여기 이 부분만 가리면 여전히 예쁜 스카프야. 정말로!" 하며 잘린 부분을 가리며 날 위로해준 그녀.
스카프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누군가에게선물 받은 의미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백화점에서 2만 원을 주고 산 스카프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무래도 괜찮지 않은 스카프가 되었다.
버려도 되는 스카프가
버리기 싫은 스카프가
되고야 말았다.
고마워서 기억하는 순간들.
지나치지 않고 바라봐줘서
귀찮도록 오래 머물러줘서
뭉클함을 안겨준 그들에게
부디 돌고, 돌고 돌아
이 가을에 어느 행운이, 그들에게 가 닿기를.
*뉴욕에서 엽서보내기)
뉴욕에 있는 post office를 이용하면 되는데, 무인우체통이 있어서 편리합니다 (물론 기계가 고장났을 경우는 제외하고요) 국제 우편의 가격은 1달러가 약간 넘으며, 한국에 도착하는데까지 열흘정도 걸렸습니다. 주말과 공휴일을 모두 포함해서요 :)
*참, Newyork 아이스크림은 일반적인 바닐라 맛인데 꽤나 평범합니다. 맛보다는 기분으로 먹어보는데 의미가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