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롱 Aug 17. 2020

한여름, 뚜벅이의 제주 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여행은 선물같은 것 


2020년의 여름 휴가를 받았다. 



아프신 할아버지를 일 핑계로 계속 뵙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 휴가 기간에 시골에 내려가 손도 잡아드리고 이야기도 나누려 했다. 그러나 휴가 2주 전 위급하시다는 연락이 왔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정신없이 상을 치르고 돌아오니 나의 휴가 계획은 텅 비어 버렸고, 마땅히 갈 곳은 제주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주도 갈 사람!" 한 마디에 걸려든 친구는 장롱 면허 8년 차, 나 또한 장롱 면허 8년 차. 면허가 무색한 두 명이 모여버렸다. 약 4년 전에도 이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월정리 바다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게스트 하우스에 콕 박혀 만화를 보며 낄낄댔던 기억이 스쳐갔다. 떠나기 이틀 전, 한 명이 또 제주에 함께 가겠다며 연락이 왔다. 이 친구도 장롱 면허 8년 차. 변한 건 없다. 나는 배낭을, 친구들은 캐리어를 끌고 김포 공항에서 만났다. '어떻게든 되겠지.'


제주 착륙과 동시에 비행기 문에 물방울이 맺혔다. 긴 장마 기간으로 불안한 서울을 등돌려 떠나온 이들에게 심통을 부리는 것인지, 제주는 여행 내내 이방인들을 반겨주지 않았다. 3일 내내 비가 오다 말다 했다. 




다시는 제주도를 뚜벅이로 오지 않으리 



날씨부터 시작해 이번 여행은 어디서부턴가 잔뜩 꼬여버려 매번 힘들고 지치는 일이 계속 되었다. 가려고 했던 분위기 좋은 카페와 음식점은 하필이면 번갈아가며 휴일이었고, 길게 대기줄이 늘어서 있거나 혹은 운영 시간이 이미 끝나버리거나 했다. 성수기의 게스트하우스는 사사건건 참견하는 주인 할머니가 옆 방에 상주하셨고 마지막엔 그 참견이 싫어 인사도 하지 않고 깨금발로 소리 없이 체크아웃했다. 수건에서는 원인 모를 개오줌 냄새가 나서 마음놓고 사용하지 못했다. 햇빛 없이 구름 낀 하늘임에도 해수욕으로 노출된 친구의 몸은 빨갛게 달아올라 밤새 몸을 벅벅 긁어댔다. 반복되는 실패(?)가 계속되는 와중, 우리는 택시비를 줄이자는 명목으로 1박2일 전동 킥보드를 대여하는 무모함을 발휘했다. 


가만히 서서 방향만 조절하면 될 것 같았는데 습하고 더운 제주의 여름에는 걸맞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우리가 여행한 3일은 심지어 강풍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나름 속도감 있는 전동 킥보드 위에 올라서서 해안가와 바짝 맞붙어 있는 곳을 달리니 은근히 몸이 긴장도 되었는지 땀이 줄줄 흘렀다. 네이버 지도에 자전거로 15분이라고 나오는 거리가 체감 30분은 훌쩍 넘었다. 시원하게 바람을 만끽하며 원하는 목적지에 부드럽게 도착할 것이라는 상상은 첫 코스를 경주하곤 산산조각났다. 



모든게 다 뚜벅이라서 벌어진 일이라며,
차만 렌트했어도 쾌적했을 것이라며,
세 명의 여자는 투덜대며
육지로 돌아와 기필코 연수를 받으리라 다짐했다. 




이튿날 곽지 해변부터 협재 해변까지를 달렸고, 쉬다가 먹다가 곽지 해변을 다시 지나 애월에 있는 숙소로 돌아오니 7시간이 흘러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동 킥보드를 다음날까지 타기 위해서는 방으로 옮겨 충전을 해야 했다. 하필이면 게스트하우스에는 승강기가 없었고 세 명이서 전동 킥보드를 옮기기 위해 세 번을 오르락 내리락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할머니는 우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역시나 내다보며 "전기 많이 쓰면 안 되는데..." 했다. 



 행복한 중간 쉼터가 되어 준 한림의 한 카페 : 바위 위에서 쉬다


"우리 그냥 킥보드 반납 해버리면 안 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택시를 타고 여행하고 싶었지만 이미 1박 2일 대여료를 지불한 터라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대로 씻고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맥주라도 마시고 하루를 보상 받자며 걸어서 이동 가능한 한 펍을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취향 저격 : 인디안 썸머 애월


이번 여행에서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장소에 감동 받고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보통 그런 순간은 주로 계획하지 않았거나 기대가 사라졌을 때 찾아오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인디안 썸머 애월'은 취향저격의 공간이었다. 두 마리의 사랑스러운 대형견이 반겨주었고, 우연인건지 보헤미안 스타일의 손님들이 많았는데 참 가게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사장님이 직접 선별하시는 음악은 평소에 나와 친구들이 좋아하는 감성과 놀랍도록 잘 맞아서, 노래 한 곡이 나올 때마다 호들갑 떨기 바빴다. 우리는 그렇게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 곳을 즐겼다. 


좋은 장소가 힘들었던 하루를 모두 감싸안아 준 날이었다. 찡찡대던 세 명은 숙소로 돌아올 때는 다 잊었다는 듯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충전되고 있는 전동 킥보드를 보며 '내일 또 어떻게 타지..'와 같은 생각을 하다 바로 곯아 떨어진 제주도의 두 번째 밤이었다. 


마지막 날, 열심히 놀다 가겠다는 각오로 밤 9시 비행기를 예약해 뒀었지만 뚜벅이 여행자들은 생각보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예쁜 카페를 찾고, 맛있다는 곳을 찾아 들렀는데도 시간이 여유롭게 남았다. 우리는 전동 킥보드를 빌린 곽지 해수욕장으로 이동해서 일단 반납하기로 했다. 해안 도로를 향해 달리는 도중,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놀리듯이 오다 말다 하는 비가 이제는 시원하니 반가웠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오기 시작해 잠시 쉴 곳을 찾아야 했다. 마침 도로 옆 쪽에 커피 전문점이 보였다. 자그마한 손간판에 쓰여진 이름은 가게의 감성을 대략 예측할 수 있었다. '가을 남자의 커피 향기'. 



시끌벅적 소란을 피우며 들어온 가게는 생각보다 더 고즈넉하고 좋았다. 인스타그램에 유행할만한 감성은 아니지만 '시골스러움'을 좋아하는 나에게 정말 반가운 공간이었달까. 

주인 아저씨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셨고 귀여운 강아지도 함께였다. 아저씨는 큰 유리병 안의 장수 풍뎅이를 보여주셨다. 장수풍뎅이는 아저씨가 포도 한 알을 먹이고 싶어 잠시 유리병에 모셔온 손님이었다. 하루종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여유롭게 포도를 반 쯤 먹은 그 아이는 포도와 함께 다시 방생되었다. 핸드드립 커피도 맛있고 저렴했는데 아저씨는 사과까지 덤으로 깎아 내주셨다. 비와 땀으로 젖은 몸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주고 붕 뜬 시간을 채워준 고마운 장소였다. 


아저씨는 우리가 갈 때 함께 퇴근한다고 했다. 저녁 있는 삶을 살러 가신다는 그 말이 참 부럽게 느껴졌다. 내가 제주에 살며 카페를 하나 한다면
꼭 이런 다정한 주인이 되고 싶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 



아마도 이번 여행을 끝으로 나는 정말 제주도에 뚜벅이 여행은 오지 않을 것 같다.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까지 겹쳐져 더욱 고단하기도 했겠지만, 아무튼 다음 제주는 무조건 운전을 하겠다고 몇 번씩 다짐할 만큼 힘든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몇 가지 순간들이 내 여행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장소와 사람들이 만들어 주는 이 특별한 순간들이 결국 이렇게 기록의 중심이 되고, 힘들고 지쳤던 기억은 그저 배경이 되어 나중에는 사라질 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또 다시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다녀와서는 '힘들어도 좋았어.' 하며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어간다. 여행의 선순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뭐든 혼자 잘 하는 게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