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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롱 Aug 02. 2021

너무 순수해서 벌어진 해프닝

하루하나 글쓰기 챌린지 30일, 열네 번째 날


여덟 살 때였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학년, 학급별로 어머니회라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들이 돌아가며 모임을 가지고, 친목 도모와 정보 교류는 물론 학급 운영에도 목소리를 냈다. 특히나 내가 기억나는 모습은 교실에서 급식을 먹던 때라 배식을 해주시던 모습이었다. 

급식 어머니는 정해져 있어서 학급 아이들은 어머니들의 얼굴을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누구네 어머니 인지도 잘 아니까, OO 아줌마! 하고 어머니도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렇게 지냈다. 



당시 같은 반 친구 중에 은희와 재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사실 은희는 분명히 기억나는데 재현이는 이름이 맞는지 가물가물하다. 은희는 몸이 가녀리고 약해 보였다.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희 어머니는 은희를 그때까지도 아기 보살피듯 했다. 당시 내가 은희를 바라보던 시선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은희 어머니가 극성으로 은희를 챙기던 것, 그리고 은희가 내 몸의 반 쪽일 정도로 마르고 하얀 아이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은희는 재현이와 쌍쌍바처럼 붙어 다녔다. 재현이는 짧은 단발과 머리띠를 한 세트처럼 하고 다니던 명랑한 아이였다. 재현이는 나와도 친해서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는데, 은희랑은 더욱이 친했다. 그래서 나도 은희랑 친해졌다. 아이들끼리 친하니, 자연스레 우리 엄마와 은희 엄마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갈 때였다. 

이제부터는 훗날 성인이 된 뒤 엄마가 나에게 들려주어서 알게 된 이야기인데, 어느 날 은희네 어머니가 우리 엄마를 집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은희네 집은 매우 예쁜 정원이 딸린 단독 주택이어서 엄마는 내심 차를 마시러 가는 것을 설레 했다. 

그러나 예쁜 은희네 집에서 은희네 어머니가 조심스레 꺼낸 한 마디는 다소 심각했다. 

은희 엄마 : 어머님, 실은 … 얼마 전 민주가 배식하는데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 엄마 : 네?

은희 엄마 : 저보고 힘이 얼마나 세냐고 묻더라고요, 어머니께서 제가 힘이 세다고 했다고요.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은희와 재현이는 2학년 반 배정 당시 다른 반이 되었다. 은희가 걱정이 되었던 은희 엄마가 교장 선생님께 은희를 챙겨주는 재현이와 같은 반으로 해 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드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촌지가 오갔는지, 아니면 은희네 어머니가 어딘가 권력이 있는 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은희는 반을 옮길 수 있었고 이 사실이 어머니회에서 소문이 났던 것이다. 엄마는 내가 설마 이런 식으로 말을 전할지 몰랐을 거다. 

엄마는 나에게 "은희 아줌마가 힘이 세서, 재현이랑 같은 반으로 은희가 옮길 수 있었어."라고 했고 나는 그 힘이라는 단어를 당연히 '힘' 그 자체로 이해했다. 

천진난만한 여덟 살 아이는 그대로 쪼르르 은희 엄마에게 달려가 아줌마가 얼마나 힘이 센지 궁금해했던 것이고, 우리 엄마는 곤경에 처했다. 


엄마는 그날,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진땀을 많이 흘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에 그렇게 덫에 물리기는 또 처음이었다고. 아마 그 이후로 나에게 하는 말들은 더 조심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너무 순수해서 벌어진 해프닝이니 나를 혼낼 수도 없고, 내가 당사자라고 생각하면 정말 도망치고 싶었을 것 같다. 후에 성인이 되고 나서는 엄마의 단골 이야깃거리로 1년에 한 번씩은 등장해서 지금은 내 기억 속의 일처럼 선명하다. 엄마가 얼마나 당황했으면... 


은희네 어머니는 그 해프닝을 지금도 기억하실까? 허약했던 은희는 건강해져 있을까? 그런 은희를 매일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던 착하고 명랑한 재현이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지난 이야기지만 묻어두기 아까워 세상에 내놓아본다. 

어머님들! 우리 엄마같은 일이 없으려면요, 여덟 살 아이에게는 생각보다 더욱더 말조심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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