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사랑은 식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뜨겁다는 건 뭔가 가벼워 보였습니다. 서늘한 사랑이 더 깊어 보입니다.
유리창에 손을 대어보니 아직 여름이 남아있습니다.
금세 땀이 번져 유리가 미끌어 집니다. 그것 하나 잡지 못합니다.
물기가 날아간 손자국은 심란합니다. 눈 속의 아지랑이는 끈적거립니다.
목덜미가 나보다 먼저 축축해진다 창피해하던 그 여름,
당신을 처음으로 안았습니다. 그때 우린 둘 다 으스스 떨었지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한여름의 서릿발이 우리를 감싸 안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엔 눈이 오기 마련입니다.
서늘한 땀방울이 좋았습니다.
내 코가 당신의 목을 감았을 때 초록의 물비린내가 났습니다.
눈까풀 없는 생선 두 마리가 밤을 꼬박 지샜습니다.
서로의 목을 기대고 얇게 울었습니다. 표정 없는 사랑이 뚝뚝 떨어집니다.
말로 못하는 사랑이 너다. 라던 그 표정을 기억합니다. 달도 묵묵합니다. 어둠이 사각거립니다.
잠자는 등어리가 왜소합니다. 등 돌린 안쓰러움이 눈에 박혔습니다. 가만히 손을 등에 대봅니다. 고른 숨이 번집니다. 마음이 텅 비고 한없는 눈물이 내립니다. 발바닥에서 만납니다.
등골이 서늘해진다는 느낌을 아십니까. 그건 두려움이 아닙니다.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이 구르다 등골로 떨어집니다. 너와 내가 고요하고 호흡을 멈추고 구르르 구르르 소리만 나며 내려갈 때 너는 차가워지고 나는 그에 놀라 서늘해집니다. 타는 햇빛을 가리는 그림자 뭉치가 되어 너는 나를 나는 너를 품고 미세하게 떨었습니다.
나는 보채 듯, 그랬던 서늘함을 그리워 그려 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원히 차가워졌습니다.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란 건 뜨거웠다 식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원래 차가운 것이니 식었다고 말하는 건 착각 일 수 있습니다. 섬세하다가 무뎌질 순 있겠습니다. 그게 더 정확해 보입니다. 무뎌지지 않으려면 뭉개지지 않으려면 서늘해야 합니다. 경계의 마찰로 소름 끼쳐야 합니다. 너와 나는 여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맞잡은 손의 온기가 온몸에 퍼집니다.
그러나 차가운 건 외롭습니다. 날이 서 있습니다. 그래서 무뎌짐 쪽으로 기대려 합니다. 쓰러집니다. 사랑과 정을 구별하기 힘들어집니다. 모르겠습니다. 시(詩)는 한자로 소리를 내는 말(言)과 터를 뜻하는 사(寺)가 합쳐져 있다 합니다. 저에게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랑은 어쨌든 서늘한 곳인 가 봅니다.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테니스 레슨을 받는 아침이면 지나게 되는 서대문역 1번 출구 앞 조마난 공터는 버려진 섬처럼 보입니다. 주인 없는 자전거가 수북하고 바닥은 여러 것들로 지저분합니다. 나보다 늙은 한 여자가 비둘기에게 모이를 줍니다. 그녀가 미웠습니다.
시끄러운 아침이 사라지는 시간이면, 그녀는
기웃거린다. 눈먼 자들은 지하로 구석으로 흩어지고 남은 건 그녀와 나.
경계 서린 눈으로 바닥을 훑으며 걸으면 그녀의 가슴 아래에선 부스러기가 흘러내린다.
당신이었오?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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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랜다.”
그녀의 이름은 춘희. 동사무소 직원이나 그녀를 불러주었다. 자식을 죽인 어미.
고집이 힘줄 같은 늙은이. 어쩌다 죽였오?
의심 많은 눈을 피해 땅으로 꺼진다. 비둘기처럼 목을 빼고는,
등을 일부러 휘어 그늘을 만든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척추의 한토막. 아기가 잠을 잤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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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는 것이냐. 내가 살려주리라.”
서대문역 1번 출구. 타일 위로 달라붙은 피, 똥, 껌딱지.
구구구구. 자꾸만 모이잖아. 이보시오. 더 이상은 안되겠소.
왜 자꾸만 기어 나옵니까. 발 없는 듯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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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지 마라라. 마라라. 내 새끼들은 깨끗한 것만 먹는다.”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어떤 젊은이는 수십 마리의 이물질에 혀를 찬다. 나는 그 혀 속의 동질감에 얼른 올라타 주책없는 새들을 한없이 내려 보았다.
대화를 지웠다. 상관하지 않을 랜다.
달콤한 오렌지 주스가 입안에 맴돌았다.
그녀에게 일어난 느낌은 외면하고 싶은 미움입니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렌트카를 반납할 때 엄마는 휘발유 몇 리터가 더 들어갔으니 기어이 만원을 깎아야 한다며 직원과 말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미움이 바로 외면하고 싶은 미움입니다.
외면하고 싶은 미움은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그 사람과 친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그녀에게서 그 미움이 나왔습니다. 지나치면 그만일 일인데, 나의 마음은 불안해집니다. 왜 그럴까? 갑자기 짜증이 납니다. 테니스를 치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난 상쾌한 마음으로 테니스를 치러 가고 있었습니다. 테니스 채가 꽂힌 가방을 둘러메곤 바쁜 행인들을 가르며 지나갑니다. 그들은 나를 쳐다봅니다.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는 도취에 취할 찰나. 나와는 정 반대의 특별한 사람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은 순식간에 정리를 하려 합니다. [특별한 나 > 평범한 행인들 > 기이한 그녀.] 정리를 해서 특별함의 질을 구별합니다. 그래도 무의식은 불안합니다. 특별함과 기이함은 어쩌면 한 끗 차이라는 두려운 마음도 번집니다.
남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보여주고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라는 자괴감이 듭니다. 그녀로 인해 내 마음을 들키게 되어 미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외면하고 싶은 미움입니다. 지레 겁을 먹고 그녀와 난 다르다며 혼자서만 외치는 미움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은 음흉하고 가볍습니다. 눈치로 가득합니다.
두 편 모두 여자를 바라보고 썼습니다. 첫 번째 시에선 ‘사랑’을 두 번째 시에선 ‘미움’을 여자로 썼습니다. 내가 쓴 사랑은 서늘해 보입니다. 내가 쓴 미움은 외면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어쩌면 미움인데 여기에서 이 두 단어는 어쩐지 닮아 있습니다. 둘 다 거리를 두려 합니다.
적당한 거리로 여지를 두며 사랑하고 싶지만 그 거리가 조금 벗어나면 외면해 버리고 싶은 미움이 생깁니다. 어려운 마음입니다. 지구를 도는 달처럼 우주만이 만들 수 있는 어려운 확률 같습니다. 난 내가 무던한 성격이라 항상 생각해왔고 나를 만났던 여자들은 대부분 예민하다 했습니다.
과거의 기억들, 불안하게 모든 것들이 맞아 들어갑니다. 이젠 미래마저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 생의 기운이 없어지는 건 단순히 늙어서가 아니라 나를 다 알아버리기 때문 아닌가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게 가장 행복한 듯싶습니다.
모호했던 잠재의식들이 튀어나옵니다.
시를 쓴다는 것. 딱히 좋은 시도가 아닐 수 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