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정성들여 읽기 시작한 것은 트레바리 모임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 전까지 나는 역사적 사실이나 이성적 사유에 기반하지 않은 글에는 흥미가 없었고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시, 소설, 희곡과 같은 애매하고 완곡한 문장들은 망상이거나 어떤 면에선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철학, 사회, 인문, 역사 등의 책만을 주로 보았다. 특히나 20대에는 변하지 않을 확고 부동한 진리 따위를 경험하고 싶은 욕망에 마음이 급했다. ‘심오’하다거나 ‘사색’이라는 단어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크리슈나무르티(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나 에크하르크 툴레(지금 이순간을 살아라)와 같은 잠언적 명상가의 책들에 빠져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책속의 말들은 잡힐 듯 하다 모호해지고 충만해지다 곧 사그라 졌지만 문제는 나라고 생각했다. 아직 트이지 못한 내 생각의 한계라 자책하며 책속에, 그 행간에 숨어있는 진리의 이면을 언젠가는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다짐했다.
소설은 가볍거나 지루했다. 가벼운 책들은 흥미진진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기도 하였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래서 머 어쩌라고? 라며 마지막 책장을 덮기도 하였다. 그 나머지 대부분의 소설은 지루하다 느꼈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남의 사정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그 시절의 나 때문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소설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굼떠 보였다. 그들은 생각이 많았고 방황했다.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괴로워 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야 하는, 쌓아올려야 하는 20대의 나는 그들과 친해지기 싫었다. 공감하거나 섞이기 싫었다. 오지선다형의 정답만을 찾아왔던 소년에겐 굳이 저만치 돌아가거나 술에 물을 탄 듯 흐릿한 문학은 성취감을 주지 못했다.
나는 당시,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사회적 압박 때문이었는지 아님 타고난 기질로 인한 것이었는지는 이젠 중요치 않다. 돌이켜 보면 나는 지난 이십여년간 목적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 몸은 자동반사적으로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원하는 것들에 직선으로 다가가려 하였다. 그렇게 급한 마음을 당신들에게 숨겨놓고는 아니라며 여유부리는 쾌감도 좋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나를 안정감있게 만들어 줬고 잠시나마 나도 속일 수 가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척 했다.
욕망이 지속되면 성향이 되고,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사소한 것들에 무관심하며 스쳐지나 가는 것들을 애써 바라보지 않는다. 남아있는 삶의 경로에 모든 행동과 생각이 집중되어 있으며 오직 ‘나의’ 죽음 만을 두려워한다. 나는 이성과 헤어졌을 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있으나 아프다고 느낀 적은 없다. 나에게 그녀들은 움직이는 날씨와 같았다. 그래서 날씨가 거칠어지면 힘들었지만 아프진 않았다. 밖으로부터 오는 건 힘들었을 뿐이다. 아픈 건 안에서 터져 나온다. 비명을 지른다. 생각해보면 난 그녀들과 한 몸이 된 적이 없었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가끔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진심으로 적응의 동물이다. 나는 모든 살인자에겐 예상치 못한 결론까지 도달하게 되버린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살기위해 두 눈을 감고 갇혀있기를 선택한 삶. 한 곳에 그리고 한 마음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흐르지 못하고 고이게 된다. 그 안에서 자기만의 성을 쌓는다. 영화 속 인기척 없는 고립된 별장이 대부분 축축하고 괴기한 것들로 가득 찬 것처럼 홀로 떨어져 적응된 몸과 마음은 이상한 것들과 평범한 것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슬아슬히 쌓여만 간다. 오직 나의 눈에만 완벽히 정리된 모습으로. 20대의 나 그리고 그에게로부터 적응해 이어져 온 지금의 나는 어쩌면 괴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교묘하게 숨겨진 복잡한 논리와 이유들을 어깨에 진채로.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나마 풀어 헤쳐진 건, 숨통히 조금 트여 몸과 마음이 안과 밖으로 드나들게 된 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일기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글. 에세이, 시 그리고 끄적거리던 소설들. 일기는 처음엔 솔직하려하나 반성과 다짐으로 끝을 맺기가 일수여서 결국엔 어정쩡한 나와 화해를 시도한다. 글이 무뎌지고 뭉게진다. 그러나 남이 봐야하는 글은 오히려 거짓으로 쓸 때 제대로 된 나를 알아챌 수 있다. 난생 처음 법원에 들어가 선서를 한 후 증인석에 앉아 있는 생경스러움으로, 생각 하나 그래서 쓰여지는 단어 하나에서도 위증을 찾아내야 한다.
얼굴을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글을 쓰다보면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 내 가식과 허영, 모호한 말투 그리고 숨기는 단어 들이 눈에 보였다. 지금 이 글에서도 여전히 머리를 굴리며 들키기 싫은 어느 한구석 때문에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젠 그런 나를 알아차릴 수 는 있다. 굳이 만져봐야 뜨거운 줄 알고 우는 아이의 신세는 조금 벗어난 듯 하다.
요즘 들어 나는 20년 정도는 뒤쳐저 사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마치 ‘나 아직도 스무살 같아. 벌써 세월이... 말도 안대.’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철없는 꼰대의 한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제야 걸음마를 떼고 똑바로 설 수 있게 됐다는 느낌. 그래서 주변의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 요즘. 이제 부터가 진짜 삶이라며 그래서 앞으로의 나날이 두렵고 또 기대되기도 하는 하루. 나 아닌 다른 것들도 바라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렇다고 그 마음이 훈훈한 배려나 희생의 느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런 접근 방식 또한 대단히 자기 중심적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여전히 ‘필요’이다. 그러나 예전과 조금 다르다면 그 필요를 혼자서 찾지 않고 다른 사람, 다른 사물들로 채워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 채운다는 단어는 너무 일방적이니 서로에게 스며든다고 할까. 혼자서 에너지를 내는 건 태양 밖에 없다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이젠 받아들일 때가 됐다는 것. 그 태양 또한 결국 우주의 한 점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공허한 우주로까지 생각이 날아가 버리면 이제 막 시작하려는 티끌만한 내 삶이 너무 허무해지니 주변을 돌아보자. 특별한 사람이 아닌 사소한 사람. 옆에 있는 당신들을 좀 더 살펴보자는 것. 예전과는 다르게. 오해받더라도 조금 더 미소지으며.
닭살이 돋더라도.